922화
목소리와 말투, 몸짓은 모두 우아한 귀족의 정석그 자체였으며 싱그러운 미소는 특유의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과 어우러져 또 다른 초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그와 마주한다면 필시 열에 아홉은 경건함에 자세를 바로 하게 될 것 같았다.
“이 친구가 허언을 하는 친구가 아니고, 뭔가를 잘못 볼 만큼 어수룩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전부 믿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야. 그런데 그 불신이 내 어설픈 아집의 산물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놀라워.”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건지 모르겠군.”
“초월자가 자연적으로 태어난다는 것 말이네. 절대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게 가능했던 시대는 이미 옛적에 저물었고, 지금은 옛 시대의 유산과 잔재들만이 남아있지. 그런 와중에 자네 같은 자가 나타나다니. 비유하자면 다 꺼진 잿더미에서 불씨가 피어오른 격이지. 그러니 어찌 놀랍지 않겠나.”
군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이야기를 이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키리스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어떤가? 듣기로 얼마 되지 않았다던데, 그렇다면 아직은 남아있겠군. 혼란스러운가? 아, 자식도 있다고 했던가?”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법. 군터는 그가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환야는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 없다는 듯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 아니 분명 그럴 것이야. 하지만 그 순간, 그 혼란스러움을 충분히 즐기도록 하게. 조금만 더 지나면 그마저도 희미해질 테니까.”
“설교나 늘어놓으려고 부른 건가?”
“까칠하군.”
그가 씩 웃었다. 자연스러웠다. 꾸며낸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감정을 잃어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감정은 멀쩡하다네. 다만 인간성을 잃어갈 뿐이지. 저 나약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더는 동족이라고 여기지 못하기에, 그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될 뿐인 게지. 그 증거로…보게나. 난 자네를 만난 직후로 줄곧 즐거움을 느끼고 있네. 자네와 나는 동족이고, 대등한 존재이기 때문이야. 누구도 내게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지만, 자연스레 느낄 수 있지.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글쎄. 모르겠군.”
“부인하지 말게. 그럴 필요 없어. 자네도 곧 알게 될 걸세. 통제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감정, 상황, 무엇이든 마음을 쓰고 손을 대기 시작하면 어그러지기 마련이야. 그것을 모르거나, 끝내 부인하다 보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지.”
“황제처럼 말인가?”
“정확해.”
키리스트는 크게 웃으며 기뻐했다. 조금만 더 기뻤다가는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황제에 대해 알고 있나? 아니, 우리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묻는 편이 더 적절하겠군.”
“잘 알지는 못하오. 줄카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거든.”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니지. 웃긴 녀석이기는 하지만.”
줄카는 키리스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할 때 불쾌함과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세상을 불태워야 속이 풀릴 미치광이라면서 말이다. 반면, 키리스트는 줄카에 대해 그리 큰 감정은 없는 듯했다.
“서로 적대하는 줄 알았는데.”
“좋은 사이는 아니지. 의견충돌을 빚고 있는 것도 맞고.”
키리스트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웃기는 녀석이지. 순진한 녀석은 아닌데 엉뚱한 곳에 정성을 쏟으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키리스트가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새로운 동족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네.”
이 세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도 허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차를 마시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문득, 정성스럽게 차향을 음미하는 키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줄카는 키리스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야기가 나올 때는 짤막하게 지독한 미치광이라고만 표현하고 넘어가곤 했다.
“더는 나서지 말게. 이 전쟁은 우리의 것이야. 음. 설명이 조금 부족한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럼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탁자를 톡톡 두들기던 그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이건, 그러니까…뒷정리 같은 것이네. 마땅히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뒷정리지. 그러니 자네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게야. 이해했나?”
군터는 키리스트가 말로 하는 대화에 상당히 서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는 그 ‘편리한 대화 방식’으로만 의사소통을 해왔으리라.
그런 그가 굳이 이런 방식으로 만남을 계획한 것은 나름의 배려였을까, 아니면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었을까. 군터는 이상할 만큼 빈번하게 드는 잡생각을 흘려보내며 키리스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더는 나서지 마라. 전투에 참여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뜻이겠지. 사실 그건 이쪽도 바라는 바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남의 싸움에 나서서 피를 볼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쪽도 이쪽의 사정이 있지. 설마 당신이 이렇게 불러서 한마디 한다고 그대로 따를 줄 알았소?”
줄카에게 들었던 미치광이라는 표현. 그에게서 풍기던 불쾌함과 적대감. 그것에 영향을 아예 받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군터가 키리스트의 일방적인 제안에 삐딱한 답부터 내민 것은 그냥 그 자신이 키리스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저자의 안은 비틀려있다.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심각하게. 그것이 줄카가 말한 광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군터는 그 섬뜩한 비틀림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꼬여 있다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은, 본질적인 어딘가가…….
“당돌하군. 나쁘지 않아. 막 세상을 굽어보기 시작했다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키리스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콥 그 녀석과 거래했나? 뭘 받기로 했지?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짐작이 안 가는데. 괜찮다면 알려주겠나?”
“총독 자리를 받기로 했소. 내 아들과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아.”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짤막한 대꾸. 오히려 반응다운 반응은 대화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환야에게서 나왔다. 그마저도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은 것에 불과했지만.
“신중하군. 어렸을 적부터 그런 녀석인 것을 알아봤지.”
“미리 정리해뒀다면 이렇게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환야의 말에 키리스트가 혀를 차며 부정했다.
“아니. 그랬다면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야. 고대했던 마무리가 아닌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지.”
“비틀린 것을 돌려놓는 것일 뿐. 거기에 괴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그리 말하는 자네도 그 우스운 일에 동참하고 있지. 부인하지 말게. 우리는 모두 같아. 이런 우스운 방식으로라도 보상받고 싶어 하는 피해자일 뿐이지.”
한 가지. 키리스트와 환야는 협력관계일 뿐, 상하관계는 아닌 듯했다. 처음부터 짐작했던 것이지만 이 대화로 짐작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핏줄이라. 역시 그렇군.”
다 안다는 듯한 웃음.
군터는 어느 순간 비어버린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 모금을 마셨고, 반보다 조금 못 미치는 양이 남은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잔은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의 후손들에게 영속할 권세를 약속하지. 판니른은 물론이고, 하나나 둘쯤 더 줄 수도 있어. 어쩌면 왕을 칭할 수도 있겠군. 어떤가? 이만하면 자콥 녀석이 약속한 것보다 더 근사하지 않나?”
“이 거대한 제국조차도 황제의 치세가 끝나기 무섭게 흔들리고 있지. 그런데 당신은 영속을 말하는군.”
키리스트가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전과 달랐다. 비릿한 조소였으며, 동시에 얼어붙을 것만 같은 서늘함이 감돌았다.
“카라누르와 비교하면 안 되지. 이 나라는 처음부터 거짓 위에 세워졌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라누르는 처음부터 세워질 수도 없고, 세워져서도 안 되는 나라였다. 모래 위에 세워진 화려한 궁이었지. 그러니 그 규모와 상관없이 쉬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 장황한 설명이 내가 당신을 믿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지.”
“애석하군. 불신보다 더 짙은 어둠은 없는 법이지. 음. 그러면 어찌한다.”
키리스트가 고민하는 듯하니, 환야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설득을 해야지.”
“그래. 설득. 하하. 오랜만이로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한편의 엉성한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비인간적인 외모를 가졌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배우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하고 중얼거리더니 일순 아련한 눈빛으로 변했다.
“알고 있나? 카라누르는 본래 자그마한 도시 국가였네. 그곳의 지배자는 왕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군소 지방세력의 주인 정도였지. 실제로 그때 당시에는 왕가도 존재하지 않았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도모하는, 그런 널리고 널린 작은 세력일 뿐이었다네.”
“알고 있소. 그랬던 카라누르를 황제가 제국으로 일으켜 세웠다는 것도.”
“결과일 뿐이지. 하지만 그 과정은? 누가 그것을 알겠나?”
“알 사람은 알겠지.”
“아니.”
키리스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몰라. 단지 믿을 뿐이지. 온갖 거짓으로 범벅이 된, 보여주기 위한 역사를.”
“…….”
“어리석은 것들이 트라소프를 어찌 칭송하는지 알고 있네. 한심하긴 하나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야. 놈은 타고난 선동가였으니까. 그 간교한 꾀와 혓바닥에 놀아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새 한 마리 지저귀지 않는 숲속.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만이 음울하게 번졌다. 소리와 색, 풍경과 심상이 뒤엉키며 감각을 혼동시켰다. 한순간에 깊은 꿈속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키리스트의 영향을 받는 것이리라. 그가 이 세상을 구축한 주인이었기에.
“그 교활한 놈은 온갖 달콤한 말들로 우리를 속였다. 그리고 목줄을 채웠지. 우리는 놈의 사냥개가 되어 싸워야만 했다. 거듭되는 승리 속에 명예는 없었고, 우리는 기쁨 대신 분노와 모멸감에 사로잡혀갔지. 이해하겠나? 원수의 뜻대로 춤을 춰야 하는 꼭두각시의 심정을.”
“줄카는 그런 말을 하지 않던데.”
“그래서 웃긴 녀석이라는 거야. 그 녀석은 어느 순간, 자기가 만든 모래성에 애착을 갖게 됐다. 원해서 만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손이 닿았다는 거겠지.”
이제 키리스트는 한순간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말을 하는 사이에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아주 잠깐씩 입이 닫힐 때도 키득거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 거짓의 왕국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본래 존재해야 했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이야. 그 옛날, 열국의 시대로 회귀하는 거지.”
“복수의 대상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아바시스만 좋아하겠군.”
“복수가 아니야.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이지.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야.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니.”
키리스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적막했던 숲과 공터, 그 외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어둠. 깊어가는 밤인지, 밝아오는 새벽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자네를 만나고자 한 것은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네. 상관없는 일에 얽혀 고생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우리의 일은 우리가 마무리 지었으면 하네. 양해해주기 바라네.”
어둠이 키리스트를 집어삼켰다. 아니, 키리스트가 부서져 어둠이 되었다.
영혼이 밀려나는 것 같은 아찔한 감각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군터는 첨탑의 꼭대기 방, 달빛이 밀려 들어오는 창가에 서 있었다.
[고루한 아집이라고 여겨도 좋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군터가 그렇듯, 환야도 여전히 그가 있던 곳에 서 있었다.
“왜 내게 이렇게 공을 들이지? 손을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룬차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줄카는 룬차이가 키리스트에게 제거당했으리라고 짐작했다. 직접 보지 않아 짐작일뿐,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군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2황자와 7황자가 전면전을 벌이던 당시. 룬차이는 2황자의 진영에 가담하여 활약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고, 머리를 잃은 군대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그때 그 자리에서 싸웠던 당사자인 만큼, 군터는 룬차이의 실종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궁금해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억 한구석에 밀어두고 있었지만.
[룬차이 역시 우리 중 하나였다. 녀석은 선택했고, 대가를 치렀지.]
“그래서 직접 처벌했나?”
[아니. 구원이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으나 환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는 정말 자신이 룬차이를 처리했던 것이 그를 구원한 것이라 믿는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역시 룬차이를 처리한 것은 키리스트와 환야였다는 것.
[제안을 받아들이려거든 프레스크에서 멈춰라. 그곳까지는 막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은 무샤라트 트라소프를 움직이고 있다. 그를 완전히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 지역의 전선을 뜻대로 주무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전할 말은 다 전했으니 그만 물러나도록 하지. 선택은 네 몫이다.]
창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환야의 형상이 흐트러지며 사라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