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화
골고스에 뿌리를 박은 듯 꿈쩍도 하지 않던 군대가 움직였을 때. 멀리 있던 이들은 무언가 큰 변화를 기대하거나 우려했다.
그러나 골고스를 나서고 벌써 닷새째 되던 날까지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렘보르의 깃발을 든 군대가 빠르게 진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릿하게 여유를 부리지도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들을 막아서는 군대도, 그런 시도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곧 있으면 학센입니다. 넉넉잡아 이틀. 서두르면 한나절 정도는 더 당길 수 있겠군요.”
“서두를 필요는 없지.”
“예.”
골고스를 나선 이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여유로운 진군이었고, 그 의미를 시어문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시어문드도 두말하지 않았다.
학센은 작은 성이다. 상주하는 백성도 없는, 말 그대로 군사 용도로 지어진 요새. 그런 곳에 최대한 병력을 밀어 넣은들 기껏해야 이천 정도. 그것도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터. 본래라면 그런 자그마한 성 하나를 보고 이런 대군을 몰고 가는 것은 낭비다. 군터도, 시어문드도, 생각 있는 지휘관이라면 누구도 하지 않을 일.
그러나 이번만은 다르다. 이번 진군으로 노리는 것이 효율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억지로 버티거나, 포기하거나. 어느 쪽이겠나?”
“후자이기를 바라지만, 힘들겠지.”
아드리안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을 비우고 물러나는 것이 맞다.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으로 이 대군에 맞선들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휘하 군졸들을 개죽음으로 내모는 것보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챙기는 것이 현명한 지휘관으로서 내려야 할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위에 있는 이들의 생각은 다르리라는 것. 그들은 학센의 병력이 옥쇄를 각오하고 하루라도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대개, 일선의 지휘관들을 윗선의 판단과 명령을 거스르지 못한다.
“지저분한 학살이 되겠군.”
“한두 번인가.”
“그래도 이런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서로의 생사를 걸고 다투는 것과 일방적으로 상대를 도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투덜거리는 투로 배부른 푸념을 늘어놓는 아드리안의 표정이 썩 밝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이틀 뒤.
자그마한 성벽을 눈앞에 둔 시어문드가 피식 웃었다.
“예상이 빗나가긴 했지만…뭐, 잘됐군. 안 그런가?”
“그렇긴 한데, 이러면 골치 아파진 것 아닌가?”
“자네가 골치 아플 일은 없지 않나.”
“물론.”
“당당하군.”
“내 몇 안 되는 자랑 중 하나지. 매사에 당당해지는 것.”
헛웃음을 지은 시어문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학센의 성벽을, 적병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한 성벽을 다시 눈에 담았다.
* * *
“적의 반응이 예상과 다릅니다.”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예상했던 바라, 시어문드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피를 보더라도 시간을 벌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응이 신속하고 과감합니다. 생각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전력을 끌어모아 확실하게 저지선을 구축할 생각이던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계획 중이던가.”
“다른 무언가?”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드리안이 실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럼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당장은 모른다고 해도 염두에 두기는 해야지.”
뻔뻔한 소리도 능력 있는 사람이 하면 있어 보이는 법이다. 결국, 당연한 말만 늘어놓은 시어문드였지만 누구도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얌전히 발을 뺐지만, 부로노크까지 내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부로노크. 콜레인 동부의 거점도시. 교통의 요충지이면서, 대군을 주둔시키기에 부족함 없는 규모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시어문드가 굳이 그곳을 콕 집어 거론한 이유는, 바로 그곳이 군터와 황자가 맺은 거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황자는 군터에게 부로노크를 함락시키라고 했다. 그곳에 깃발을 꽂는다면 크렘보르에게 판니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군터는 그 사실을 측근들에게 숨김없이 알렸다. 그리고 황자의 조건을 받아들일 테지만, 그것에 목을 맬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일단 출진은 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무리할 생각은 없다고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 시어문드 등은 그 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군터가 총독 가문에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한번 헛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골고스에서 곧장 부로노크를 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은 결국 대비할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무리하기보다는 차근차근 정석대로 나아가는 편이 낫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학센까지의 무혈입성.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전과.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정찰병들이 보고하자, 아드리안이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성을 수색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드리안도 이상이 없다 보고하자 그제야 군터가 텅 빈 성에 들어섰다.
“병사들의 체력은 충분합니다.”
굳이 이 자그마한 성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 약간의 병사를 남겨놓는 정도면 충분하리라.
하지만 군터는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겠다고 했다. 시어문드는 의아했지만 일단 떨어진 명령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 * *
“…….”
학센에 하나뿐인 탑. 본래는 봉화를 위해 지어졌으나 어느 순간부터 성주 내지는 지휘관을 위한 숙소로 바뀐 것이 틀림없는 이곳에서, 군터는 하룻밤을 보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시간은 늦었지만, 그의 몸과 정신은 멀쩡했다. 정신과 육체는 고작 며칠 간의 느슨한 행군으로 피로를 느끼기에는 너무 강건했다. 억지로 자려고 하면 자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군터는 창가에 서서 가늘게 들어오는 밤바람을 맞았다.
등은 켜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을 분간할 수 있었으므로.
[다시 만나는군.]
달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군터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척과 소리에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성 밖을 향했다.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는가.]
“당신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있나?”
[빠르게 익숙해졌군. 그러면서도 굳이 그런 고집을 부리는 것이 의아하지만.]
가늘지만 끊기지 않고 불어오던 바람이 한순간 그쳤다. 동시에 군터가 몸을 돌렸다. 어둠과 동화된 듯한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나는 상대. 그러나 군터는 먼젓번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최대한 조절하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새어 나오는, 이 불길할 정도로 음습하고 거대한 존재감은 결코 인형 따위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직접 행차하셨군.”
[존중의 표현이지.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
군터는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공허함과 권태를 느꼈다. 이런 자가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일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잠시 초대하지. 거부하지 말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다가왔다. 군터는 자신이 원한다면 그것을 뿌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내, 환야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이것이 자신에게 위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세상이 뒤집혔다.
* * *
군터는 자신이 숲속에 와있음을 깨달았다. 나무와 풀. 그리고 적막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허상이로군.’
색은 있으나 소리는 없다. 말하자면 환상? 하지만 단순한 환영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존재감과 현실감은 느낄 수 없었을 테니.
“따라오게.”
그의 앞에는 환야가 서 있었다. 조금 전처럼 어둠과 하나가 된 듯한 형상이 아니었다. 이국적인 용모의 사내가 역시나 이국적인 복장을 한 채 멀쩡히 서 있었다. 그것도 갑옷이 아닌, 얇아 보이는 평상복이었다.
“목소리로 말하는군.”
“인위적으로 구현한 세상이지. 듣고 싶은 대로 들리고,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거야.”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이건 내가 원한 모습이네.”
환야가 앞장섰다. 그가 걷는 곳마다 길이 생겼다. 무성하게 우거져있던 나무와 풀들이 연기처럼 변해 사라지고 길이 열리면, 그는 당연하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뻥 뚫린 공터와 그 한가운데를 차지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있는 자.
군터가 공터에 발을 들일 즈음, 그가 일어나 뒤를 돌았다.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기른 자였다. 외모도 여인인지 사내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놀랍군.”
심지어 목소리조차 그랬지만, 이 부분은 논외로 쳐야 했다. 환야의 말처럼 이곳에서 보고 들리는 것들이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저 목소리가 저자의 실제 목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
그래서 직접 물었다.
“당신은 사내인가 여인인가.”
순간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묘해졌다. 환야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호수 앞에 선 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글쎄. 어찌 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사내지만, 이 몸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영문 모를 말. 그러나 군터는 더 묻지 않았다. 눈치를 본 것은 아니지만, 굳이 상대가 내키지 않아 하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적대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누군지 아나?”
“짐작은 가는군.”
“그래. 그렇겠지.”
환야에게서 감출 수 없는 음습함이 풍긴다면, 이자에게서는 세상을 통째로 갈라버릴 것만 같은 예기가 느껴졌다. 이자 역시 초월자임이 분명하니, 떠오르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키리스트.”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원치 않게 붙여진 이름이니까.”
“…….”
“하지만…맞아. 그렇게 불려왔지.”
그가 웃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만나서 반갑군. 군터 크렘보르. 이런 세상, 이런 시대에 새로운 동포를 만나기는 힘들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만남은 실로 값지다 할 수 있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의자와 탁자가 생겨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 용기와 인원수에 맞춘 잔까지도.
“호기심이 생기더군.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세상에 우리 같은 자들은 많지 않으니까. 특히 자네 같은 경우는 더욱 드물지.”
일전에 헤이모라에서 줄카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군터가 초월자들에 관하여 묻자 줄카는 이런저런 말들을 해주었다. 그중에는 키리스트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게 된 키리스트는, 물론 실제 세계에서 만난 것은 아닐지라도, 제법 부드러운 사내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