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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20화 (920/1,064)

920화

사절단이 무사히 돌아왔다. 살라스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실비아를 찾았다.

“이제 제 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실비아는 아쉬움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여기서 붙들고 늘어진다고 해도 살라스가 꿈쩍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솔롬에 남아준 것만 해도 살라스는 충분히 온정을 베푼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일은 이제 끝났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제게 고마워하실 일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장군의 명을 따랐을 뿐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공께서 제 사정을 봐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어쩌면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계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해합니다.”

가깝게 지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봐왔다. 처음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봐온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나 종종 살갑게 다가온 할렌과 달리, 살라스는 늘 어려운 존재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부친과 닮은 사내였다. 그는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고, 그를 아는 이들은 예외 없이 그를 어려워 했다. 실비아도, 보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 보중하십시오.”

담담하게 인사를 건넨 살라스가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단 몇 걸음 만에 멈춰섰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그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에 선 자는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반대로 따르는 이들이 자신을 의지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위에 서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입니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장군께서는 그러셨습니다. 보리스 공자 역시 그러고 있지요. 그를 상대로 홀로 서고 싶으시다면, 아가씨도 그러셔야 합니다.”

“…….”

“괜한 참견이었군요. 가벼운 변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살라스가 사라지고 난 뒤. 실비아는 그가 남긴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 * *

“니클라스에게도 같은 말을 했지만, 이제 자네에게 맡기겠네.”

“예.”

어둑하고, 금이 가 있는 것 같은 목소리. 살라스는 자신의 앞에서도 가면을 벗지 않는 할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지만,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요정의 팔을 이식한 후로, 꾸준히 변화를 겪어온 살라스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할렌 역시 변화를 겪었다. 아마 지금도 겪고 있을 것이다. 육신에서는 여전히 생기가 느껴지지 않지만 그 안에 깃든 영혼은 거세게 맥동하고 있다.

“자네는 장군과 연결되어 있지. 이곳에서도 그분의 존재가 느껴지나?”

“예.”

할렌의 영혼은 군터와 연결되어 있다. 아니,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까. 살라스는 군터가 말한 영혼 감옥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할렌의 영혼이 그것에 속해 있다는 말은 기억했다. 사람의 영혼에 직접 관여하는 놀라운 힘. 아마도 그것은 아마도 법보에 준하는 귀물일 것이다.

“다시 들어도 놀랍군.”

“가까이 있을 때처럼 감응하지는 못합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할렌은 군터와 가까이 있을 때 그의 감정과 생각 같은 것들을 일부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놀라운 것은 마찬가지야. 부럽군.”

“부럽…다고요?”

“그분의 뜻을 곧장 헤아릴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실수할 일도 자연스레 없어지겠지.”

“…부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언젠가, 살라스님도 저와 같아지실 테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라스가 장갑을 벗었다. 옅은 회색 피부가 드러났다. 손에서 시작된 변화는 어느 순간 그의 몸 전체로 퍼졌다. 이제는 상반신 대부분과 하체 일부까지 회색으로 물들었다. 조금 있으면 목을 타고 얼굴까지 이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숨길 수도 없을 것이다. 할렌처럼 가면이라도 쓴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쩌면…괜찮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라는 것, 자네도 알고 있겠지.”

“예.”

군터는 세상에, 정확히는 인간들의 세상에 흥미를 잃었다. 부귀와 권력. 정쟁 같은 것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 전장에 나가 있는 것은 오직 두 자식을 위해서였다. 그가 떠나고 나면 남겨질 그들을 위해서 선물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일이 끝나고 나면 더는 세인들의 눈치 따위 보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그때가 되면 자네도 그 답답한 가면을 벗어도 될 걸세.”

할렌이 말없이 가면을 매만졌다. 금속의 한기가 손을 타고 번졌다.

“어느 정도 기반은 잡았다지만, 그렇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지. 내가 돌아가면 보리스 공자가 다시 욕심을 부릴지도 몰라.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고.”

“…….”

“자네의 역할은 실비아 공녀를 지키는 것이지. 그러나 그 의미를 너무 한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게.”

“무슨 말씀이신지.”

“꼭 직접 손을 쓰는 것만이 위해가 아니라는 말이네. 사특한 말과 행동으로 엄한 곳에 이끄는 것도 위해지. 그렇지 않은가?”

“음.”

“변하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려면 늘 생각해야 해. 스스로 판단하게. 니클라스와 상의를 해도 좋겠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장군께서 자네를 믿는 만큼, 나 역시 자네를 믿네. 내가 이렇게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자네가 있기 때문이지.”

본래 살라스는 남을 띄워주는 말뿐만 아니라, 아예 말 자체를 길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상대는 몇 되지 않았고, 할렌은 그 얼마 되지 않는 이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오래 알아서가 아니라, 할렌이 그만한 격이 되는 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살라스는 자신과 마주하는 이들이 자신과 동등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것은 지위나 재력, 신분의 차이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가늠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무언가였다. 살라스는 이러한 변화가 군터 역시 겪고 있는 것임을 알았고, 어쩌면 자신 역시 상관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점점 회색으로 변하고 있는 피부와 관련이 있거나.

자연스럽게 차이를 느끼지만 내색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할렌은 그 불편함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정말 몇 안 되는 상대였다. 이유는 모른다. 짐작 가는 것이야 여럿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 동료를 여전히, 순수하게 동료로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것 없이 좋은 일이었으니.

“그리고…….”

자리를 뜨려던 살라스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니클라스에게도 이야기해두었지만, 헤이모라 쪽도 신경 쓰게. 장군께서는 염려할 필요 없다 하셨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야. 그가 움직이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봐야 하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헤이모라에 누가 있는지는 할렌도 알고 있었기에, 살라스의 당부에 선선히 그러겠노라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내심 헤이모라에서 일이 일어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쪽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던 군터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거대한 허상의 세계.

카인. 혹은 레온. 혹은 둘 다 아닌 사내는 이제는 이곳이 익숙했다. 거의 하루건너 하루꼴로 이곳에 끌려오고 있으니,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곳의 풍경이 익숙한 것이지, 영혼을 옥죄는 이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변함없이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늦다.]

거인은 자신의 조급함과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카인의 일 처리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더 빠르게 움직일 것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무리다.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어째서 직접 움직이지 않으십니까? 당신께서 나서신다면 원하시는 만큼…….”

[그럴 수 없다. 내가 더 끼어든다면 분명 눈치를 챌 테니까.]

“…….”

[그래. 지금도 나를 주시하고 있는 내 적들이 눈치챌 것이다. 놈들이 알아채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이 꼬여. 그러니 네가 해야 한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굳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저 무시무시한 거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유용한 말인지 상기시키기 위해서.

‘초월자에게도 적이 있지.’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신과 같은 존재지만, 그들은 그저 인간보다 위에 있을 뿐이다. 세상에 유일한, 비할 데 없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카인은 굴복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었다.

[기둥을 찾아라. 길을 내면 내가 움직일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면 놈들도 대응하지 못할 테지. 내가 그것을 손에 넣으면,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

“저 또한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하하하하!]

거대한 공간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웃음소리라 해야 할까? 그것은 차라리 폭풍에 가까웠다. 즐거움이 느껴지는 거센 웃음에, 카인은 뿌리가 드러난 잡초처럼 초라하게 흔들렸다.

[걱정하지 마라. 약속은 지킨다. 내가 자유를 얻으면 너의 하찮은 소원도 곧바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뿐이랴. 원한다면 내 종으로 삼아주마.]

웃음은 그쳤건만, 웃음소리는 여전히 허상의 세계에 메아리쳤다.

카인은 영혼이 흩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미소지었다.

* * *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살펴보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 난잡한 그림과 선들이 문자임을 알 수 있었다.

고대의 문자. 형태보다는 뜻에 초점을 둔 옛 시대의 문자다. 하지만 아직도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연구한다면 성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줄카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자신에게 그만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우습군.]

한때는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건만, 지금은 평범한 사람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가늠하고 있다.

“뭐가 좀 읽히십니까?”

카니악이 다가왔다. 자리를 비운 아라얀을 대신해 용아를 이끌고 있었는데, 평소 아라얀에게 언제 자리를 넘길 것이냐며 농을 던지던 것과 달리 아라얀의 복귀가 늦어지자 간혹 초조한 기색을 비쳤다.

[조금은.]

줄카의 손끝이 벽을 파고 들어간 선을 따라갔다.

[이 기록은 원시 세계의 종말을 표현했다.]

편의상 원시 세계라 했을 뿐이다. 어쩌면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줄카는 그런 것에는 흥미 없었다. 사실, 지난 역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 시대도 큰 틀에서는 현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에.

“종말이라. 으스스한 단어군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늘 상대적인 것이지.]

질서가 있었고, 어느 날 재앙이 내려왔다. 그 재앙은 감당하기에 너무나 거대했으며, 결국 기존의 것들이 뒤틀리고 사라졌다.

온갖 거창한 표현으로 꾸민다 해도 진실은 이것이다. 그렇기에 줄카는, 기록자들이 비탄에 차 새겼을 고대의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절망의 순간에도 이런 것을 남겼다는 점 하나만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뿐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자들은 그걸 몰랐을 뿐이지.]

부드럽게 선을 따라가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벽을 파고들어 거칠게 긁어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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