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화
“보리스 공자는?”
“떠났습니다.”
이틀 전 예고했던 대로, 보리스는 오늘 아침 일찍 하잘로 향했다. 총독을 비롯하여 몇몇 이들과 만날 예정이라던가. 꽤나 바빠 보였다. 능력은 몰라도, 부지런함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보리스 공자는 일가를 이끌어갈 만한 재목입니다.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지니기 힘든 능력, 혹은 자질이지요.”
“인정하네.”
“공녀와의 일로 공자를 안 좋게 보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만.”
“사실이야. 지금도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감일 뿐. 그와는 별개로, 나는 보리스 공자를 크렘보르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네.”
“장군께서 정하셨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니클라스가 조용히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감찰대의 수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이기에, 그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본래 사람이 무뚝뚝한 면도 있었고.
“여전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시군요.”
“자네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장군께서 자네를 신뢰하시는 거고.”
니클라스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살라스를 바라보았다. 그 묘한 표정이, 마치 당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듯했다.
“곧 돌아가시겠군요.”
“내가 할 일은 거의 끝났으니까.”
“살라스님이 돌아가시면 보리스 공자가 다시 날뛸지도 모릅니다.”
“자네가 있지 않은가.”
보리스라고 해도 감찰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다. 후계자라고 해도, 성주 대리라고 해도 그가 쓸 수 있는 힘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크렘보르가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를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 까닭이다. 군부는 말할 것도 없고, 솔롬의 유력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이들이 상당수다. 이렇듯 솔롬조차 장악하지 못한 보리스인 만큼, 감찰대가 마음먹고 나서기 시작하면 여러모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감찰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항상 좋은 그림만 나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니클라스가 쓰게 웃었다.
“어지간히도 싫으신 모양입니다.”
“푹신한 의자보다는 말 위가 편하게 느껴지지. 항상 그랬네.”
“많은 이들이 살라스님이 젊었을 적부터 장군을 따랐다는 것을 잊곤 하지요. 저 역시 그랬나 봅니다.”
“젊었을 적부터가 아니야. 어렸을 적부터지. 원치 않게 불편한 일들을 떠맡곤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전장이 더 편해.”
니클라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떠나십니까?”
“공녀가 보낸 사절단이 돌아올 즈음이면 되겠지.”
사절단이 돌아올 때까지만 솔롬에 남아달라는 실비아의 부탁이 있었다. 사절단이 기반을 다지면 보리스의 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판단이 그른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살라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고 생각했다. 보리스와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도와주지 않았나. 거기에 그녀의 사사로운 부탁까지 들어주었으니, 이만하면 할만큼은 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줬는데도 실비아가 끝내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건 그녀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야심이 너무 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가 어찌해줄 수 없는 문제다. 강압적으로 뜻을 꺾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비단 실비아뿐만 아니라, 보리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
“뒷일은 맡기겠네.”
“짐이 무겁군요.”
“자네는 잘 할 수 있을 것이야. 할렌도 있지 않은가.”
“할렌이라……. 그렇지요.”
니클라스가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 * *
“카인님. 저자는 누구입니까?”
“이번 여정을 위해 내가 청한 자일세. 황도에서의 인연이지. 붙임성은 다소 떨어져도 실력 하나만은 확실하니 걱정 말게.”
“아, 예.”
얼굴까지 가리는 후드 달린 로브를 입은 거한. 간간이 드러나는 눈빛은 바위처럼 단단했으며,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덩치만 봐도 범상치 않았고, 눈빛을 보면 그가 사람을 여럿 죽여본 숙련된 전사임을 쉬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저 심상치 않고, 수상해 보이는 자가 솔롬을 나서고 이틀째 되는 날 느닷없이 일행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일행의 통솔자인 카인의 지인이라니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등장과 합류에 위화감을 느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카인의 설명이 있고서야, 그들은 카인이 이번 여정에 그의 과거 인연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카인이 장담한 낯선 거한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볼 기회는 국경을 넘은 바로 그 날 생겼다. 사절단의 정보를 미리 접한 간 큰 놈들이거나, 눈에 뵈는 게 없는 머저리 둘 중 하나임이 분명한 마적들이 그들을 덮친 것이다.
“흠!”
바로 그때. 거한이 나섰다.
덩치에 걸맞는 커다란 양날 도끼를 꼬나쥔 그는 그에게 덤벼들던 마적을 말과 함께 반으로 갈라버렸다. 말과 사람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충격적인 광경에 일순간 주변의 전투가 멈출 정도였다.
“지금이다! 도적놈들을 쓸어버려라!”
적절하게 정적을 깨는 카인의 호령. 기세를 탄 사절단은 마적들을 어렵지 않게 몰아냈다. 그사이 거한은 마적을 다섯이나 더 으깨버렸고, 전투가 끝났을 때 몇 번 숨을 고르고는 아무렇지 않게 근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충격적인 활약을 목격한 이들의 감탄과 두려움 어린 시선이 그의 등에 따라붙었다.
“수고했네.”
“할 일을 했을 뿐이오.”
거한은 카인의 치사마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곤 정리가 끝날 때까지 앉은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 군주께 자네의 활약을 전해드리지.”
카인이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미동도 않던 거한이 반응을 보였다.
“그분께서는 너 같은 자의 말 따위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 아니다.”
“글쎄. 그런 것치고는 자네를 내게 붙여주시지 않았나. 알고 있겠지만, 그건 내 요청 때문이었지.”
“…….”
“뭐, 원치 않는다면 굳이 나서진 않겠네. 편히 쉬게. 오늘 정말 고생이 많았어.”
거한은 여유롭게 돌아서는 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묵에 잠겼다.
* * *
군터는 예상 밖의 손님을 맞았다.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이군.”
거무튀튀한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 카자쿠였다. 황자의 측근인 그가 이 먼 골고스까지 걸음을 한 것이다.
그가 황자의 사자로 왔음을 알지만, 그래도 뜻밖인 것은 여전했다. 그는 황자의 호위를 책임지는 인물. 어떤 일이 있어도 황자의 곁을 떠나지 않는 자였으니까.
“짐작하겠지만, 밀린 이야기를 나누려고 온 건 아니네.”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자쿠가 온 것은 뜻밖이지만, 군터는 카자쿠를 보자마자 그가 온 이유를 짐작했다.
“돌려 말하는 재주는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전하께서는 자네가 움직이기를 바라시네. 더는 미적거리지 말고 말이야.”
“미적거린다라.”
“아니라고 할 셈인가?”
그럴 리가. 미적거린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를 황자도 짐작할 테고. 카자쿠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도 이렇게 독촉하러 왔다는 것은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황자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것.
“자네가 솔직히 이야기했으니, 나도 솔직히 말하지.”
“물론. 그래 주었으면 하네.”
“난 더 피 흘리고 싶지 않아. 내 피든, 내 병사들의 피든.”
“그게 군인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는 둘째치고, 자네의 병사? 재미있는 말이군. 이 땅의 모든 군졸은 모두 전하의 것이다.”
카자쿠의 표정과 기세가 돌변했다. 동시에 군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 할 말은 없지. 돌아가게. 헌데.”
“…….”
“달라졌군.”
“…역시 알아보았는가.”
피식 웃은 카자쿠가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두 눈이었다. 맑은 흰자위에 뚜렷하게 대비되던 검은 눈이 불꽃처럼 붉게 변했다. 그리고 거뭇한 피부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뭐지?”
“뭐겠나. 자네 말처럼 달라진 것이지.”
그 균열은 점점 크기를 키우면서 오밀조밀해지더니, 곧 비늘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인간인가?”
“글쎄. 지금의 내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
군터는 침묵하며 변화를 마친 카자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자쿠는 예전의 모습이었을 때보다 한결 후련해 보였다. 거칠고 사나운 기세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감출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흘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것은 자연스러운 그의 기세였다. 그리고 이런 기세는, 평범한 인간은 흘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군터는 아니었다. 그건 그의 감정이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일전에 카자쿠와 비슷한 이형의 존재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줄카인가.”
그는 헤이모라에서 지금의 카자쿠와 외형적으로도 비슷하고, 기세도 비슷한 존재들을 다수 보았다. 줄카의 수하들. 용아라고 불리던 자들.
“묘하게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군.”
“맞아. 본 적이 있는가.”
침묵으로 긍정한 군터가 잠깐 일어났던 흥미를 거뒀다. 카자쿠가 용아처럼 변한 것은 뜻밖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사정까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군터의 심드렁한 반응을 눈치챈 카자쿠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와닿지 않겠어.”
“그래. 무슨 말을 한들 그리 와닿지 않아. 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네. 하는 일 없이 입만 놀려대는 것들과는 달리.”
“짐작했지만, 자네는 전하께 충성하지 않는군. 자네에게 전하는, 그저 주고받는 거래 상대일 뿐인 게야. 그렇지?”
이번에도 군터가 답하지 않자 카자쿠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솔직히 화가 나지만, 여기서 화를 낸들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알아. 전하께서는 자네가 이리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하셨지.”
“그런데도 날 독촉하러 왔나?”
“그건 내 바람이고, 전하께서는 제안을 하라 하셨네.”
“제안?”
“판니른의 총독 자리를 주겠다고 하셨네. 계승권도 함께.”
붉게 변한 카자쿠의 눈이 번뜩였다.
“받아들인다면 크렘보르는 총독 가문이 되는 걸세. 전하께서 이 전쟁을 끝내신다면 그분께서는 리비암으로 가실 걸세. 예로부터 변경주의 총독 가문들은 독자적인 큰 권세를 누렸고, 그건 전하와 그 이후의 치세에서도 마찬가지일 테지. 즉, 후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둔탁한 말씨로 황자의 제안을 읊은 카자쿠가 즉시 이어 물었다.
“받아들이겠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