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화
“유치하지 않습니까?”
“예?”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람이 영내에서 사람을 해치려고 했잖습니까. 자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비아의 표정과 목소리에 냉기가 흘렀다. 그녀는 이번 일에 분노하기 이전에, 그녀의 오라비에게 단단히 실망한 듯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전과 이번이 다른 것은, 그녀의 말처럼 영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어.”
“말씀대로, 분명 유치하지요. 힘으로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 드는 것은, 저열할뿐더러 썩 보기 좋은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효과적이지요.”
실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두둔하려는 건가요? 당신의 목숨을 노린 사람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자신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불손하던 이도 자연스럽게 겸손을 배우게 되지요. 그것이 본질입니다. 이런 저열한 방식의 통치는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대부분은 효과적이었지요.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군요.”
“보리스 공자에 대해 노하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을 택한 것뿐이니까요. 감정을 섞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만 앞으로 범할 실수를 줄일 수 있으실 겁니다.”
“앞으로 범할 실수?”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요.”
실비아는 잔잔하게 웃는 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꽤 옆에 두고 봐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동조하며 화를 내야 정상이다. 냉정 침착한 사람이라면 화를 겉으로 드러내는 대신 속으로 삭이며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애를 쓰겠지.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본질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자기 일 아닌가! 목이 달아날 뻔한 당사자가 마치 이 모든 것이 남의 일이라는 듯, 저리 태연하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전에도 여러모로 독특한 자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 이후로는 그 정도마저 넘어선 느낌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건만, 살아온 환경의 차이 때문일까.
속으로 한숨을 쉰 실비아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상단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그들도 빠르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를 낼지는 저들끼리 논의를 하겠지만, 결국은 원하시는 대로 흘러갈 겁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내 예민한 오라버니가 어떻게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
“살라스님이 계시는 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분입니다. 언제까지 그분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계시는 동안 더 적극적으로, 빠르게 움직여야 해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처음부터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분명 자신의 마음을, 결심을 알고 싶어서 일부러 저런 말을 했을 터. 시험당하는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넘어갈 수 있다.
“그들이 결정을 내리면 곧장 움직일 겁니다. 이번에도 내가…….”
“안 됩니다.”
“음?”
“아가씨가 직접 상행단을 이끄셔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개척의 의미가 있으니 행동력과 과감함으로 보일 수 있으나 두 번째부터는 다릅니다. 아가씨는 크렘보르의 독녀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것이 장사치의 재능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세간의 시선 따위에 신경을 쓸 것 같나요?”
“물론 아니시겠지요. 하지만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말은 하지 않았어도 실비아는 카인의 눈빛에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불쑥 반감이 일었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곧 깨달았다.
그녀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크렘보르의 독녀라는 배경은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지금 상인들이 그녀의 앞에서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조아리고, 그녀의 숨소리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다 그녀가 크렘보르의 여식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태생적인 조건은 실비아 크렘보르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니까.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버리고 싶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길은 터놨지만, 그 길은 아직 오솔길 정도입니다. 지금 제대로 닦아놓지 않으면 금방 다시 흙먼지로 뒤덮여 사라질 거에요.”
“물론 그렇지요.”
“그러니 내가 직접 가려고 한 겁니다. 공이 말했듯, 내 이름은 그곳에서도 제법 큰 무기니까.”
“아가씨께서 직접 가신다면 최선이겠지요. 하지만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금방 말씀드린 부분도 있거니와, 앞으로 매번 일이 생길 때마다 직접 움직이실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번에는 사람을 쓰십시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물으려던 실비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뒤로 기울였다. 푹신한 등받이의 감촉이 막 찾아온 여유에 더해져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공이 가려는 거군요.”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괜찮겠나요? 솔롬 안에서도 위험했는데, 공이 밖으로 움직이면…….”
“오히려 도시 안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할지도 모릅니다. 안에서는 암살이지만 밖에서는 습격이니까요. 살라스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국경을 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보리스 공자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보리스의 장악력은 솔롬에 국한되어 있다. 물론 솔롬을 벗어난다고 해도 아예 손을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국경을 벗어나면 확실히 힘이 빠진다. 도시의 관료와 유력자들은 그에게 충성하지만, 군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제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난다면 상황이 변할 수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던 실비아가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맡기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 * *
‘음.’
카인, 아니 레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원치 않는 기억이 물밀 듯 몰려올 때면 지금처럼 아찔한 느낌을 받곤 했다. 나날이 강가 약해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시하기 힘들 정도다.
그래도 지금은 가만히 서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으로 충격을 다 해소할 수 있었다. 엊그제는 정말 아찔했다. 꿈속에서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겪었을 때는, 그조차도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했다. 심지어 잠에서 깬 후에도.
‘그래도 좋은 현상이다. 반응이 격한 만큼 빠르게 동화되고 있다는 뜻이니.’
대상이 상처를 입고 기운이 빠진 상태였던데다, 서두르지 않고 비술까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사용한 것이 유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진정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 레온은 이제 자신의 몸이 된, 그러나 아직은 낯선 몸을 움직여 집으로 향했다. 실비아 크렘보르가 붙여준 호위들이 거리를 두고 그를 따랐다.
‘몸도 단련해야 할 것인데.’
나쁜 몸은 아니다. 오히려 제법 훌륭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본래 몸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했고, 레온은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단련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쉬십시오.”
“고맙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레온은 교대로 밤새 그의 집을 지킬 호위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 전에 아직은 낯선 하인들과 자연스럽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은 물론이다.
“후우.”
전 주인이 마지막으로 흘린 비통함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방은 적막했다.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방. 레온은 이 간소한 방이 마음에 들었다. 전 주인은 밖에 보이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이런 간소함을 연출했지만, 레온은 진정으로 이런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익숙해서일까.
‘이제부터 시작이다.’
역시 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 카인이 했을 일을 대신 맡았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본래의 자신이었다면 힘들었을 테지만, 카인의 기억이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처럼 사고하는 것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니 카인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면, 그의 모든 것을 가진 자신 역시 가능할 터.
‘운명이라.’
신비하면서도 늘 두렵고 어려웠던 어머니.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운명. 솔직히 아직도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말했던 운명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 언젠가가 되도록 빨랐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다.
카인은 그를 감싼 낯섦 사이에서 편안히 잠에 빠졌다.
* * *
쿵!
레온은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부터 눈을 감은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여긴?’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눈을 떼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의지가 그의 행동과 사고를 경직시켰다.
궁전이 보였다. 그 터무니없이 거대한 무언가가 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자유를 억압한 힘이 그의 사고를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이다.
카인은 또 한 번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당신은?”
거대한 궁전. 그곳의 가장 높은 곳. 화려하지는 않으나 웅장하다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옥좌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레온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두 발뿐이었다. 그 위로는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내가 해야지.]
바람이 몰아친다. 영육이 떨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레온은 그 바람을 맞고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넌 누구지? 기이한 놈이로군.]
흥미. 그리고 권태.
이 세상과 닿아 있는, 아니 이 세상 그 자체인 듯 압도적인 존재감이 레온을 짓눌렀다.
‘그렇군.’
그 순간. 레온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운명.
본래는 카인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운명. 그 운명의 실은 분명 저 존재와 닿아 있다.
레온은 확신했고, 이어 환희에 전율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