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화
꿈.
군터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공간, 낯선 시간대에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솔롬의 전경. 밤중인 듯 어두운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을 때, 군터는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족히 백 걸음은 됨직한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했다. 두 걸음을 내디뎠을 때, 군터는 성문을 지켜야 할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이토록 감정이 요동치는 것도 꿈이라서 가능한 일일 테지만.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군.’
마지막으로 꿈을 꿨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는 분명 지금처럼 자유롭게 사고하지 못했었다.
성문을 지나 시가지로 들어섰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검게 물든 대로를 따라 내성 구역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마치 그늘 안과 밖의 세상이 나뉘듯, 어느 순간부터 도로와 건물이 밝아졌다. 밖에서 본 도시가 어두웠던 것이 꿈속의 세상이 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도시에 드리운 어둠은 밤과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빼곡하게 자리 잡은 건물들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오직 길게 뻗은 도로와 그 끝에 이어진 거대하고 긴 계단.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그 끝없는 길 한가운데에 익숙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보리스?’
기억 속에 있는 것보다 조금 더 거칠어진 얼굴. 그러나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격노해 있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살기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삿대질까지 해가면서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군터는 그런 보리스의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누구지?’
그 노여움이 향하는 대상은 보리스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었다. 보리스가 서 있는 곳보다 한참 아래에서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보리스보다 더 커 보였다. 뒷모습만 보일 뿐이지만, 군터는 그 뒷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함을 느꼈다.
‘누구냐.’
도시를 물들인 어둠이 매 순간 점점 더 덩치를 키워갔다. 불길함을 느낀 군터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걸음만 내디뎌도 백 걸음만큼 나아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보리스와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가까워지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분노를 토한 보리스가 검을 빼 들었다. 군터는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이 보리스에게 닿지 않았는지, 보리스가 기어이 정체 모를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안돼.’
정체 모를 사내와 가까워진 보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보리스가 작은 것이 아니라, 뒷모습만 보이는 사내가 그만큼 거대했다.
칼을 들고 달려드는 보리스에게, 사내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솔롬은 완전히 어둠에 물들었다.
* * *
쾅!
깨어나며 휘두른 주먹에 탁자가 박살이 났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대경하여 문을 두드렸으나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조금 거칠어진 숨이 잦아든 것은 병사들이 세 번째로 문을 두드리며 안부를 물을 즈음이었다.
“괜찮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의아해하면서도, 병사들은 안도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
박살 난 탁자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감정을 주체못하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단지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난리를 피우다니.
하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이런 꿈을 꾼 이유를 고민했다.
신비를 탐구하는 자들은 꿈을 단순히 그날의 감정과 잠자리에 따라 생기는 망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꿈은 하나의 신비이며, 하나의 영적 현상이다. 평소 군터는 그들의 주장과 이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지금은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이 뜬금없는 꿈을 단순한 개꿈으로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오랜만에 꾼 꿈이어서도, 내용이 기이해서도 아니었다. 그 꿈에서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잠에서 깬 지금조차도.
‘보리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하지만 지금 솔롬에는 살라스가 있다. 자식 녀석들의 다툼을 중재하라고 보낸 것이기는 하나, 보리스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면 살라스가 좌시할 리 없다. 녀석에게 전권을 허락했으니 설령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능히 대처할 수 있을 테고.
다만, 보리스가 덤벼들었던 정체 모를 자가 걸린다. 지금 느끼고 있는 불길함은 그자에게서 기인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만약 보리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자와 관련된 것일 터.
살라스의 마지막 서신은 이틀 전에 도착했다. 다음 서신은 아무리 빨라도 사흘 뒤. 가슴이 답답해진 군터가 방을 나섰다.
“장군. 시어문드가 정오쯤에 도착한다 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나갔던 시어문드가 짧은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다. 황자의 조용한 재촉에 대한, 좋게 보자면 성의 표시. 삐딱하게 보자면 눈 가리고 아웅이다. 거창하게 군대를 몰고 나가지만 하는 것이라곤 눈 닿는 곳에 무의미한 초소를 몇 개 세우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명목은 진군을 위한 거점 마련이니, 따지고 보면 아주 못 써먹을 핑곗거리는 아니다. 물론 재촉한 쪽은 속이 타고 머리도 뜨끈해지겠지만.
“장군?”
아드리안은 군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군터가 신경 쓸만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잠시 고민하고는, 곧 솔롬으로 간 살라스에게서 좋지 않은 소식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군터가 이런 묘한 반응을 보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솔롬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글쎄.”
제대로 짚었군. 아드리안은 할 말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살라스가 갔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이유가 뭐지? 설마 철부지 공자가 억지라도 부리는 건가? 그럼 여기서는 철부지 공자를 적당히 씹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머리가 복잡해진 아드리안이 할 말을 고르는 사이, 군터는 꿈에서 보았던 알 수 없는 거인을 떠올렸다.
뒷모습, 그것도 형체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멀찍이서 본 뒷모습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뒷모습만으로도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도시 전체가 어둠에 물들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떠한 계시일까? 아니면 징조? 군터는 자신이 갑자기 예언자가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꿈의 내용과, 느낀 감정이 너무도 강렬했다.
‘답답하군.’
생각에 잠겨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고, 마땅히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도 없다. 모페이브라도 옆에 있었다면 논의라도 했을 테지만 그는 지금 솔롬에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살라스의 서신을 기다리는 것뿐.
“장군. 심려치 마십시오. 살라스님이 어련히 잘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글쎄.
살라스가 솔롬에 가 있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꿈을 꿨다. 어설프게나마 해석을 해보자면, 불안감의 크기가 살라스가 주는 믿음의 크기를 넘어섰다고 봐야 할 터.
‘그러고 보니…….’
꿈에 등장한 사람은 둘이었다. 하나는 보리스. 다른 하나는 정체 모를 거인. 실비아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꿈 하나에 너무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불길함과 불안감이 자꾸만 생각과 의심을 부추겼다. 군터는 자신이 정말 오랜만에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자식의 문제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나저나 장군. 타라냐드 쪽 전선이 조금씩 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대로 된 충돌은 없이 소규모 교전이 계속 일어나는데, 작은 포트락이 그래도 아비의 피를 물려받기는 한 모양입니다.”
물론 그 피를 제대로 물려받았으면 이미 전선이 크게 밀려도 진즉 밀리지 않았겠냐며 아드리안이 떠들어댔지만, 미안하게도 그의 말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어문드가 오면 알리도록.”
“아, 예.”
군터는 당황하는 아드리안을 뒤로하고 방으로 향했다. 꿈속에서 봤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불편하게 두근거렸다.
* * *
“실패했더군.”
“예. 당황했습니다.”
무심한 보리스의 말에, 로우렌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심각하게 받을 수도 있지만, 굳이 자신의 무능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모두 내가 벌인 일인 줄 알더군.”
“머리가 있는 자들은 어리석은 이들의 과잉 충성이 빚은 촌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네 말이 옳다. 어쨌든,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 난 네가 그들을 유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따로 준비할 줄 알았는데.”
로우렌이 쓰게 웃었다.
혹시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하긴,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긴 하다. 이 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준비했습니다. 다만 실패했지요.”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쉽지는 않더군요.”
“황도에서부터 여기까지, 괜히 멀쩡히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질긴 목숨이로군.”
“공자님이 원하시면 언제든 그 질긴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러는군. 말장난은 그만해라.”
보리스 크렘보르에게 있어 카인이라는 자는 잔챙이에 불과하다. 눈에 거슬리지만, 그렇다고 직접 손을 쓰기에는 체면도 그렇고 이래저래 걸리는 것들이 있다. 독하게 마음먹으면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다.
“살라스님은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럴 만한 명분이 없으니까요.”
이 일을 벌이면서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줄타기다. 실비아를 직접 건드는 것은 안 된다.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그녀의 사람들을 건드려서도 안 된다. 적당한 선에서, 심술이라고 보일 정도로만 일을 벌이는 것이 중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일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이걸로 쥐새끼들도 한동안은 자중하겠지요.”
“그건 다행이로군. 언제까지 이런 사소한 일에 발이 묶여있을 수는 없으니까.”
총독과 몰던, 그리고 몇몇 가문이 회동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물론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따져야겠지만, 총독과 몰던의 동향이 근래 들어 전과 달라지기는 했다. 그리고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을 그 사실 자체가, 보리스는 너무도 거슬렸다. 부친이 자리를 비웠다고, 애송이인 후계자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크렘보르를 얕잡아보는 것 같은 그 행태가.
‘그래.’
자신은 부친이 아니다. 보리스 크렘보르는 아무리 애를 써도 군터 크렘보르처럼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되지.’
그동안 보통의 귀족 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만만하게 본 것일까.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런 것이라면…그게 큰 오산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수밖에.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