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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16화 (916/1,064)

916화

“카인 공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실비아가 변명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더군요. 독에 당했다더니, 그 때문이겠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혼잣말한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괜찮다. 저 사내의, 무례에 가까운 무뚝뚝함은 이제 익숙하니까.

“따라올 겁니까?”

“예.”

둘만 있을 때조차도 가면을 벗지 않는 의뭉스러운 사내. 부친이 전장에 가 있지만 않았다면 진즉 사람을 바꿔줄 수 없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실력은 확실하다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자를 곁에 두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후우.’

속으로 한숨을 쉰 실비아가 외출 준비를 했다. 그녀가 할 준비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외출복을 챙기고 호종할 시녀 몇 명과 함께 움직이는 것뿐. 호위에 관한 모든 업무는 롬바드의 몫이었다.

얼마 전까지 롬바드를 고깝게 여기던 실비아가 그에게 호위에 대한 전권을 넘긴 것은 새삼스레 그를 신임하게 되어서가 아니다. 조력을 약속하며 나타난 감찰대의 대장, 니클라스가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감찰대를 이끄는 그가 일개 친위대 장교에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친위대라는 집단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롬바드가 일개 장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무언가가 있다.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라면 진작 알았을 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거나 알 자격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녀는 그 위험할지도 모를 비밀에 굳이 관심을 기울일 생각은 없었다.

“아가씨.”

카인의 집. 생각 같아서는 숙소를 옮기게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추문이 나돌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대신 상주하는 호위를 더 늘리게 했다. 대낮에 대로에서 습격을 당하고, 호위 대상까지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추태를 보인 만큼 능력 면에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머릿수라도 확실히 늘렸다.

“수고가 많군요.”

레온. 카인의 의형제. 이번 습격에서도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을 치를 뻔했다던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초췌한 인상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깨어있나요?”

“아니요.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의사는 잠이 느는 것이 체내에 남아있는 독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만…….”

입술을 잘근 씹는 모습에서 비통한 내심이 엿보였다.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곤 발걸음을 돌렸다. 혹여 독기에 노출될 수 있다는 말이야 흘려들었지만, 깨어있지도 않은 상대의 얼굴을 봐서 무엇하겠는가.

상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셈이 되었지만, 그래도 헛걸음은 아니었다. 적어도 정신무장 하나는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지?’

대낮에, 그것도 내성 한가운데에서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지금은 참아야 해.’

상계에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하지만 현시점부터 보리스를 자극하는 행위는 일절 금해야 한다.

니클라스의 충고를 가장한 경고였다. 실비아는 그것이 니클라스의 뜻이고, 동시에 살라스의 뜻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최대치의 조건이라는 것도.

‘두고 보자고. 언제까지 이렇게 날 업신여길 수 있을지.’

실비아는 그렇게 후일을 기약하며 분을 삭였다.

* * *

실비아 일행이 돌아간 후. 레온은 다시 카인의 방문 앞을 지켰다. 자그마한 의자를 가져다 놓고 종일 문을 지키는 그에게 호위들이 다가와 쉴 것을 권유했으나 레온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충분히 버틸 만하고요. 아! 그대들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텁석부리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호위라고 붙여놓은 놈들이 대낮에 습격을 허용하고, 호위 대상은 사경을 헤매게 만들어놨으니 자신들까지 덩달아 불신한다 한들 억울하다는 소리는 하지 못한다. 그리고, 알아서 고생을 해주겠다면 굳이 사양할 필요가 있겠는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러지요.”

호위들까지 아래로 내려가고, 홀로 좁은 복도를 지키게 된 레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이 모두 조용해지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눈치챈 건가?’

실력 없고, 감은 더더욱 없는 다른 호위들은 안중에도 없다. 그가 신경 쓴 것은 조금 전 실비아 크렘보르와 함께 왔다 간 가면의 사내였다.

롬바드.

적잖은 시간 동안 국외에서 함께 움직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그 가면 속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하지만 그가 가공할 실력의 무인이며, 그의 감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였다. 조금 전, 스치듯 지나간 시선에 잔뜩 긴장했던 것은.

‘타인의 안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자다. 실비아 크렘보르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가 이상을 눈치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지금 하는 걱정은 괜한 것일 가능성이 열에 아홉. 아니, 백에 아흔아홉이리라. 그런데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일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눈에 밟힐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끼익-

잠시 생각을 정리한 레온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삭막한 방 안. 덩그러니 놓인 침상에는 카인이 눈을 감고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레온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형님.”

“…….”

감겨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러나 시선은 허공을 향했고,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그 공허한 눈을 내려다보던 레온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러자 뿌연 가루가 그의 소매에서 흘러나와 흩날렸다.

치익!

그리고 그것은 곧, 허공에서 피어오른 자그마한 불씨에 휩쓸려 흐릿한 연기로 변했다.

“형님께는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레온. 그의 눈은 카인의 것만큼이나 텅 비어있었다.

“형님께 형님의 운명이 있듯, 제게도 저의 운명이 있습니다. 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겠군요.”

뱀처럼 꿈틀거리던 연기가 점점 가늘고 길어졌다. 그러다 얇은 실처럼 변한 그것은 카인의 입과 콧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서로 다른 운명이 마주치면, 때로는 뒤엉키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운명이 불운하게 뒤엉켰을 뿐이라고.”

연기는 계속해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카인의 눈은 더욱 흐릿하게 변해갔다.

“형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쉬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는 아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를 기른 건 어미였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차기 전까지 어미는 그에게 있어 세상 전부였다.

빼앗아야만 가질 수 있는 운명.

그의 어미는 그가 어렸을 적부터 그런 뜻 모를 소리를 반복했다. 그를 앉혀두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야기를 해대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았으나 알 수밖에 없었고, 의문도 가질 수 없었다. 그의 세상 전부가 그에게 그토록 지겹게 속삭였으니까.

네가 빼앗아야만 하는 운명.

그의 어미는 홀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을 때도 끝없이 예지했다. 그녀가, 그녀에게 깃든 신이 알려주었다.

‘너의 운명은 이미 한 번 흔들리고 무너졌다. 난 네가 빼앗긴 것을 되찾아주지는 못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 길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네 선택에 달렸을 뿐.

그것은 말 그대로 사족이었다. 선택?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 길은 외길이었으니까.

“힘드시지요.”

고개 숙인 그가 카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제대로 제 소개를 한 적이 없었군요. 용서하십시오.”

바로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낯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레오니우스 코누디스. 제 이름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제 부친께서는 귀족 비슷한 것이었다더군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저도 귀족인 셈이지요. 뭐, 황제의 피를 이으신 분께 견줄 바는 아니겠습니다만.”

고통은 없을 것이다. 최대한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의식을 끝내기 위해 지금까지 공을 들였으니까.

“쉽지 않은 삶이셨지요.”

이 불쌍한 의형의 운명 역시 자신만큼이나 기구하다. 만약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그가 꿈꾸는 것처럼 밝게 빛났을까?

무의미한 가정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말 중 만약이라는 말 만큼 허망한 것은 없으니.

“이제 푹 쉬십시오.”

그의 속삭임을 들은 카인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던 탓이리라.

* * *

한동안 침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던 카인이 마침내 쾌차했다. 그를 진찰한 의사로부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은 그는 곧바로 미뤄두었던 업무를 이어갔다. 실비아 크렘보르가 며칠은 더 쉬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으나 그는 그럴 수 없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중요한 시기이지 않습니까. 의사도 문제없다고 했으니 저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헌데…그대의 의제는?”

며칠 동안 홀로 방문을 지켰다는 레온이 보이지 않자, 실비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요 며칠 그 친구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해서 한동안 쉬라고 했습니다. 다 쉬고 나면, 따로 일을 맡길 생각입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좋은 의제를 두었습니다. 든든하겠군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카인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실비아의 집무실을 나오기 전. 카인의 시선이 실비아의 오른쪽 뒤편에 석상처럼 선 가면의 사내를 향했다.

우연이었을까. 스치듯 지나친 그 짧은 순간. 카인은 자신을 향한 무심한 눈길을 느꼈다. 그 순간에도 그의 입가에는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흐릿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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