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화
“죄송합니다.”
로우렌은 마땅찮은 눈으로 사내를 훑어보았다.
안색이 창백하고 한 손이 옆구리 쪽으로 가 있다. 비릿한 냄새가 은은하게 코를 간질인다. 척 봐도 적잖이 낭패를 겪은 모습. 면목 없다는 듯 숙인 고개에서 로우렌은 자연스럽게 실패라는 결과를 읽었다.
“어째서지? 내가 그 녀석을 과소평가한 건가, 아니면 자네를 과대평가한 건가?”
“조력자가 있더군요.”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였지. 비록 그 조력자라는 것들이 별 볼 일 없기는 했겠지만, 그래서 자네를 붙인 것 아닌가.”
“그랬지요. 헌데, 역부족이었습니다.”
“역부족?”
로우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역부족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는 이름난 해결사였다. 본래 하잘에서 활동하던 자였는데, 일 하나를 잘못 맡았다가 유력자 가문에 쫓기게 된 탓에 솔롬에까지 흘러들었다. 그는 솔롬에 와서 한동안 잠잠히 있다가 다시 해결사 일을 시작하려 했는데, 딱 그 시점에 로우렌의 눈에 띄었다.
로우렌은 그를 포섭하여 수하로 부리고자 했는데, 예전이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나 권력자에게 쫓기며 도망자 생활을 경험한 사내는 약간의 고민 끝에 로우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 언제까지 외톨이 해결사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둥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우렌의 휘하로 든 뒤로 그가 일을 맡은 횟수는 몇 번 되지 않았다. 놀고먹는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몇 번 안 되는 일은 완벽하게 해냈고, 로우렌은 그에 만족했다.
“그 정도였나? 설마 그 귀족 도련님이 힘을 감춘 실력자였던 건가?”
“아닙니다. 도련님치고는 제법이기는 했으나, 실력자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훼방꾼이 있었던 모양이군.”
“예.”
사내의 창백한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 * *
독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바로 입과 코를 막으며 거리를 벌렸지만, 그럼에도 곧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흐릿해지는 시야. 멀어져가는 의식.
낭패감이 좌절감으로 바뀌어 가는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역시 익숙한 뒷모습이 뿌옇게 물든 시야에 들어왔다.
‘네가 또 나를 구하는구나…….’
안도를 느낌과 동시에, 억지로 붙들고 있던 의식이 떨어져 나갔다.
*
“극독입니다.”
의사가 침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 식견이 그리 대단치는 않습니다만, 본 적이 없는 독입니다. 특별히 제조한 독인 것 같은데…일단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습니다.”
“그럼 괜찮은 거요?”
“다행히 흡입한 양이 미량이고, 환자의 체질이 건강하여 후유증이 남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그래도 당분간은 요양해야 합니다.”
“음.”
몸은 무거웠어도 의식은 비교적 또렷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도 분명하게 들렸다. 카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의사가 제지하자 그대로 몸에 힘을 뺐다.
“아가씨께 말씀드렸습니다.”
“직접?”
“그럴 리가요. 불안해서 어찌 형님을 혼자 두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을 보내 소식만 전했지요.”
“그래.”
피식 웃은 카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몸을 꿈틀거리자 레온이 눈치껏 등을 기대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할 일을 다 한 의사는 이미 돌아간 뒤였기에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하아.”
“좀 어떠십니까.”
“몸이 돌덩이가 된 것 같군.”
“날이 밝으면 다른 의사를 찾아보시지요. 뭐, 아가씨께서 어련히 신경을 써주실까 싶긴 합니다만.”
“그래. 그렇겠지.”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카인이 입을 뗐다.
“레온. 네가 나를 또 구했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네가 나를 또 구했어.”
“…….”
카인은 안도했고, 자책했다. 무엇에 대한 자책인지는 모르나, 그의 미묘한 감정선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 평소에 카인이 자신의 속을 겉에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도 이번 일이 적잖이 충격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내심을 짐작한 듯, 레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대로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실 겁니다. 이번 일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운이 좋았습니다. 매번 제가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고, 무엇보다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일은 예외적이었어. 설마하니 솔롬 안에서 일을 벌일 줄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
“빠르게, 높이 올라가셨지요. 덕분에 적도 많이 늘었습니다. 이번에 실패했으니, 다음에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더 위험하고 지독하겠지요.”
“하하. 이제는 내가 네게 이런 충고도 듣는구나.”
“저도 이제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간이가 아니니까요.”
“얼간이라니. 표현이 과하군. 순진무구한 청년이라고 순화하도록 해.”
“그 꼴을 해서는 농담이 나오십니까?”
“흐흐.”
쏘아붙이는 말도 정겹게 들린다. 자신을 염려해서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카인은 화가 난 것 같은 의제를 부드러운 눈으로 마주했다.
“면목이 없구나. 마음만 앞서서 주위를 돌아보는 데 소홀했어. 그러니 방심을 하고, 이렇게 허를 찔린 것이지.”
카인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레온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지금이라도 한 발자국 물러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아가씨의 곁에도 사람이 많아졌어요.”
“태반이 얼간이들이고, 나머지도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일 뿐이야.”
“자신감은 좋지만, 그게 과신이 된다면 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젠가 내가 해준 말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 그대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형님은 지금 스스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부귀니 권세니, 손에 대기도 전에 목이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걱정은 접어둬. 이번에 제대로 경험했으니, 두 번 당하지는 않아.”
레온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모르시겠습니까? 이 도시 안에서, 그것도 대낮에 내성에서 일을 벌였어요. 마지막에 형님을 노렸던 자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저조차 놈을 쫓아내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분명 보리스 공자가 손을 쓴 겁니다.”
“…….”
“보리스 공자가 더 독하게 마음먹고 제대로 나선다면, 형님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 제가 쫓아낸 자. 그런 자가 한 명만 더 나서도 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아가씨께서 신경 써주신다고 해도 마찬가지고요.”
“하하. 정말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저는 심각합니다. 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마시…….”
“이미 한번 눈 밖에 난 이상, 내가 자중하려 한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야. 한 마디로, 이미 늦었다는 거지. 게다가, 난 괜찮아. 나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아.”
“…그걸 어찌 그리 장담하십니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목숨이었다면, 한참 전에 리비암에서 이미 죽었을 테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에 혹시나 했던 레온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여기서 운명론 같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믿지 않겠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긴 해.”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너무 뜻밖이라 당황하긴 했습니다.”
“미친 소리 같겠지. 독을 들이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싶기도 하겠고.”
실제로 지금의 카인은 평소와 달랐다. 독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 풀려 있는 듯했고, 한편으로는 감정이 복받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난 황제의 피를 이었다.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황자라고 할 수 있지. 내 몸 안에 있는 황제의 피가 얼마나 짙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신의 피를 이었어.”
“…….”
“그러나 그게 내가 믿는 전부는 아니다. 날 좀 일으켜다오.”
“무리하지 마십시오.”
“완전히 일으켜 세울 필요는 없다. 약간만 움직여다오. 내 등만 보일 수 있으면 돼.”
“등…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면서도, 레온은 카인이 거듭 부탁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돌려 앉혀주었다.
“상의를 벗겨다오.”
“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의 연속. 그러나 레온은 카인의 얼굴에 어떤 단호함과 결연함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곤 한숨을 쉬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잘 보거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한다.”
“마술이라도 보여주시려고요? 그런 거라면 저 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잠깐이다.”
레온의 푸념 아닌 푸념을 무시하고, 카인이 짤막하게 말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멈췄다. 레온은 그렇게 느꼈다. 한순간. 카인이 말을 마치고 숨을 멈춘 한순간. 레온의 시간마저 멈췄다. 카인의 등 한복판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기이한 무언가를 목격함과 동시였다.
그것은 점이었고, 곧 선이 되었다. 이어 그림이 되었고, 문자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레온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와 비슷한 그림도, 문자도 본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인의 등 한복판에서 떠오른 그것은 곧 등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어깨와 팔, 그리고 등 아래쪽으로도 퍼져 나갔다. 눈으로 바로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저 그림, 혹은 글자를 다 담기엔 너무나 작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신비로웠으며, 매혹적이었다. 레온은 그 기이한 무언가에 막대한 신비와 힘이 녹아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 멀리 높이, 우뚝 선 산을 보며 그것이 거대하다는 것을 짐작하듯이.
“하아.”
나직이 터져 나온 한숨. 그와 동시에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신비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아아.’
최면에서 깨어나듯, 레온도 매혹에서 깨어났다. 그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레온의 시선을 느낀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언제부터 내게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 기억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난 이것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어. 제대로 발현했던 것은 내 신세를 깨달은 후였지. 그때도 난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게 범상치 않은 신비라는 건 알고 있지. 어쩌면 보물일지도 몰라. 혹은 저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이 내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만은 분명해.”
“…….”
레온은 힘겨워하는 카인을 부축해 다시 침상에 눕혀주었다. 방금 그 ‘발현’ 때문인지 카인은 훨씬 더 지쳐 보였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조금 전에 한 말은 내 진심이다. 난 운명을 믿는다. 정확히는 내게 주어진 운명을 믿지. 날 여기까지 이끈 것은 그 운명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알겠습니다. 알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운명이라는 것이 목에 닿은 칼날을 막아주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카인이 힘겹게 웃었다.
“그래. 내 주의하지.”
“쉬십시오. 밖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르시고요.”
“미안하다. 그리고…고맙다.”
“별말씀을.”
카인이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한 레온이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방문을 닫고 돌아선 레온.
‘이거였군.’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은 환희로 가득했고, 입매는 가면무도회에서나 쓸 법한 가면처럼 길쭉하게 찢어져 올라갔다.
* * *
쿵!
그의 걸음이 멎었다. 뒤따르던 거한이 의아한 듯 고개를 꺾으며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먼저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인에 대한 물음은 그에게 허락된 권한이 아니었기에.
[찾았다.]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거한마저 고개를 꺾고 올려봐야 했다. 그러나 그의 막대한 존재감은 그의 육체적인 거대함에 기인하지 않았다.
[나를 속였단 말이지.]
기쁨. 그리고 분노.
거인. 아간투스베록은 저 먼 북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