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화
그의 손에 들린 돌은 법구다. 발품을 팔고 돈을 좀 쓰면 구할 수 있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다. 보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귀한 것이고, 그만한 능력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의 기능은 악의를 감지하는 것으로,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을 대상으로도 작동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것에 남아있는 사람의 사념을 감지하는 것이기에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고 시간이 흘러 사념이 다 흩어지고 난 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독인가?’
확신할 수는 없다. 독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저 음식을 만든 주방장이 무언가에 잔뜩 화가 나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주인과 봉급이나 다른 문제로 악감정이 생겼고 그런 감정을 품은 채로 음식을 만들었을 경우 그 악의가 음식에 약간 묻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카인은 가능성의 크기보다는 자신의 감을 신뢰했다. 그렇기에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작게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잊고 있던 업무가 갑자기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한 표정의 종업원에게 곧 돌아올 테니 자리를 치우지 말라 당부한 뒤, 식당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짜증스러운 기색과 살짝 빠른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카인은 속으로 맹렬히 여러 가지 가능성을 더듬었다.
‘암살? 납치? 뭐가 됐든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가정하자.’
문을 열고 나서기 전부터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끌어올렸다. 빠른 걸음걸이에 끌린 시선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그중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지 느끼려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품 안의 법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적어도 가까운 거리에는 적이 없다는 뜻이니.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법구의 감지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기껏해야 열 걸음 정도 내외 정도일 뿐. 카인은 주변의 행인들을 조용히 곁눈질했다. 황도에서 도망쳐 나온 후, 맘 편히 잠 한숨 이루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평범해 보이는 저들 속에 어쩌면 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식사를 끝내셨습니까?”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사내 둘이 다가왔다. 실비아 크렘보르가 붙여준 호위들. 한때 용병 일을 했었다고 하는데, 별로 대단한 실력자들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대동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카인이 너무 빨리 나오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같이 식사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리를 따로 해서라도 끼니를 챙기라고 말했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배 좀 채우자고 임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던가. 실력은 변변찮아도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가슴이 빨리 뛰는 와중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침착해지는 느낌이었다. 의지하지는 못하지만, 어쨌거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된다.
“잊은 업무가 생각나서 말이지. 청사로 가봐야겠네.”
“예? 급한 일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라서 말이지. 서둘러서 갔다 오면 될 걸세. 내 자리를 치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 음. 알겠습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얼떨떨해하면서도 알겠다며 몸을 돌리는 호위들. 카인은 그들을 따르며 마차를 장만할 걸 그랬다고 잠깐 후회했다.
실비아 크렘보르의 측근이 되었다지만 공식적인 직함은 아직 변변찮으니 마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물어뜯길 빌미를 주느니 청빈한 행세를 조금 더 이어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는데, 지금만큼은 그때의 결정이 후회스러웠다. 거리 어디에서 뭐가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마차 안이었다면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 텐데.
“나리. 거리가 너무 혼잡한데, 돌아갈까요?”
“음?”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소 이 시간대보다 훨씬 혼잡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의 두 배. 아니, 그 이상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마도 유랑극단…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호위가 고개를 바짝 세우며 말했다.
유랑극단이라. 그러고 보니 앞쪽 멀리에서 과장되고 경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간간이 터져 나오는 시민들의 환호성도.
“지나가려면 못 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저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상상만 해도 답답해져,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돌아가지.”
“예.”
키 큰 호위가 길을 잡았다. 매번 가는 길로만 다니는 카인과 달리, 그는 솔롬의 지리를 잘 알았다.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솔롬에 정착한 지가 벌써 근 7년 째라던가. 솔롬이 지금처럼 번성하기 전부터 정착했던 것인데, 그래서인지 솔롬에 그가 모르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복잡하게 설킨 골목길도 마찬가지였다.
“유랑극단이라니. 내성 시가지에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무심코 대꾸한 뒤. 카인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유랑극단이 내성의 시가지까지 와서 판을 벌인 건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 사실 처음 보았다. 전에는 그랬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예전에는 그랬었다고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유랑극단은 공연은 고사하고, 내성의 성문을 통과하는 것조차 힘들 수밖에 없다. 각지를 떠돌며 공연하는 떠돌이의 특성상 신분이 불확실한 이들이 다수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자들은 내성의 출입이 제한 되는 탓이다. 그렇기에 유랑극단을 비롯해 떠돌이 행상 같은 자들은 외성에서 머물고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내성의 한복판에서 판을 벌이고 공연을 한다고?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
어쩌면 과민한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카인의 신경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또한, 그는 우연이라는 것을 좀처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보게 콜린. 혹시…….”
“예?”
키 큰 사내. 콜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후끈한 통증이 복부를 스쳤다.
“큭!”
작고 얇은 주머니칼. 콜린의 손에 어느새 들린 그것이 배를 얕게 긁고 지나갔다. 만약 카인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뭐, 뭐야! 콜린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냐!”
콜린의 옆에 있던 또 다른 호위, 메이슨이 당황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런 와중에도 카인과 콜린의 사이를 막아서는 것이 전문적인 호위다웠다.
“어? 이게 무슨…….”
콜린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칼과 카인을 번갈아 보았다. 곧 그의 눈이 떨리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내가 아니야.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내가 미쳤다고 이런 짓을 할 리가…….”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거 내려놔! 당장!”
“우…우와아악!”
콜린의 눈이 뒤집혔다. 동시에 그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메이슨이 콜린을 막아서는 사이, 카인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함정이다!’
방금까지는 의심이었다면, 이제는 확신이다. 콜린의 상태는 이상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미치광이가 될 이유도, 암살을 꾸민 자가 목표를 앞에 두고 저런 모습을 보일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콜린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법구가 신호를 보내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더 있겠지.’
만약 이곳에 오도록 유도한 것이라면, 분명히 몸을 숨기고 있는 이들이 존재할 터.
“쉽게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서둘러. 경비대가 뜨기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포위하듯 사방에서 좁혀오는 인원이 대략 열둘. 아니 열셋.
“웬 놈들이냐!”
메이슨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거리 가득 퍼졌다. 소란을 눈치채고 병사들이, 아니면 상관없는 시민들이라도 몰리기를 바란 것이다.
성내, 특히 내성에서는 허가받은 이가 아니면 무장이 철저히 제한된다. 그렇기에 챙긴다고 해봐야 콜린이 든 것 같은 주머니칼이 고작이다. 암살자들이 설치기에 좋은 환경이 못 된다. 거기에 대낮이 아닌가.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끝이다. 아무리 대낮에 이런 짓을 벌이는 미친놈들이라도 대로에서 덤벼들지는 못할 테니.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속히 빠져나가십시오!”
정신이 온전치 않은지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콜린은, 설령 칼을 들었다 해도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메이슨은 콜린의 왼발을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리고 그대로 내팽개쳤다. 어정쩡하게 손에 쥐고 있던 칼도 뺏어 들었다.
기세를 올린 메이슨이 뒤쪽으로 내달렸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둘인가. 그 정도는 어떻게든.’
펑퍼짐한 옷을 입은 두 놈이 옷 속에 손을 넣었다. 메이슨은 그들이 칼을 빼 들 것이라 짐작했으나, 품에서 나온 손에 들린 것은 그의 상상 밖의 물건이었다.
‘석궁?!’
작았다. 멀리서 보면 장난감인가 싶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그 형태는 분명 석궁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메이슨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퓨퓩!
장난감 같은 석궁에서, 역시나 장난감 같은 화살이 쏘아졌다.
* * *
‘한심한 놈들.’
괜한 우려가 아닐까 싶었다. 나선 자들이 한둘이 아니고, 목표는 고작해야 입만 산 귀족 도련님 아닌가. 아, 몰락 귀족이었던가? 아무튼, 험한 일과는 거리가 먼 샌님이라는 점은 마찬가지 아닌가.
얼핏 듣기로는 거의 스물에 가까운 인원이 나섰다는데, 그놈들이 각자 반 사람 몫만 해도 그 도련님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보아하니 한심한 놈들이 그 반 사람 몫도 하지 못한 듯했다.
‘뭐, 나한테는 잘된 건가.’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그 귀족 도련님이 몸 성히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소리 없이 피 냄새를 따라 걸었다.
“흐음.”
그는 의식을 잃고 널브러져 있는 놈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피 냄새가 점점 더 짙어졌다.
‘여기서 꺾었군.’
본래는 대로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소형 석궁에 데이고서 곧장 방향을 틀었다. 위력도 별로인 데다 내구성도 엉망이지만, 처음 당해보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물건이기는 하다. 귀족 도련님도 예외는 아니었던 거다. 아니면 하나 남은 호위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기겁을 한 것일지도 모르지.
“허억…허억…….”
얼마나 걸었을까. 희미하게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걸음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저 앞쪽에 있을 도련님은 그의 존재와 접근을 눈치챘다.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지.’
도련님의 걸음은 멎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숨을 고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꽤 침착한 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저 거친 숨소리마저도 의도한 것이 분명했으니까.
‘거기서 열심히 칼이라도 갈고 있나?’
히죽 웃은 그가 소매를 털었다. 팔뚝에 고정해놓은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가 톡 하고 튀어나왔다. 주머니의 입구를 살짝 연 그가 주머니 안쪽으로 작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자그마한 불씨가 주머니 안으로 스며들었고, 곧 거무튀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엇차.’
그가 실타래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주머니를, 도련님이 기다리고 있을 골목너머로 집어 던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