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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13화 (913/1,064)

913화

살라스와 보리스 공자가 직접 만나 담판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몇몇 이들 사이에 은밀히 퍼졌다. 카인은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몇 사람 중 하나였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양보를 강요한 겁니다. 사실상 아가씨의 손을 들어준 거지요.”

실비아는 이미 살라스로부터 언질을 들었던 터라 카인의 말에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일이 잘 풀렸음에도 그녀는 고민이 깊어 보였다.

“그 말대로예요. 양보를 받았죠.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영역은 상계로 한정됐어요. 당장은 좋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어떨지…….”

바람이 불기 전과 분 후가 달라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오라비의 전방위적인 압박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 전전긍긍하던 실비아는 이제 상황이 좋아지니 다른 생각이 드는 듯했다. 카인은 속으로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훗날을 생각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보이면 살라스 공의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이미 보리스 공자에게 한 번 양보를 강요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알고 있어요.”

카인의, 어떤 면에서는 단호하게까지 들리는 조언. 사람에 따라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실비아는 그런 내색 없이 선선히 수긍했다.

* * *

“살라스 공은 성주님의 대리인입니다. 그의 중재안은 곧 성주님의 중재안과 같지요.”

보리스는 살라스와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로우렌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처럼, 이것은 말만 살라스의 입을 통해 나왔다뿐이지 실상은 성주의 뜻이었으니까.

강요받은 중재안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상당 부분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얌전히 양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아가씨의 기세를 조금 꺾어둘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아가씨의 곁에서 꼬리를 흔들어대는 놈들 몇을 쳐내겠습니다. 이곳, 솔롬에서 말입니다.”

“감찰대가 실비의 곁을 지켜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아가씨의 곁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지요. 아가씨에게 직접적으로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들도 어느 정도의 과격함은 용인할 것입니다. 아니, 분명 그럴 겁니다.”

로우렌이 확신하듯 말하자, 보리스는 궁금해졌다. 이런 쪽으로 머리 쓰는 재주가 탁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무턱대고 믿을 수만은 없으니.

“근거라도 있나?”

“토어릭 공이 말했었지요. 어느 정도 먹힌 것 같다고.”

“그랬지. 그래. 그런 줄 알았지.”

토어릭이 직접 살라스를 만나 그의 의중을 떠보고, 설득하려 했을 때. 그때 토어릭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니었지.

“토어릭 공이 오랜 동료의 분위기 하나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무딘 인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아가씨를 대상으로 일을 벌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의 곁에 머무는 쥐새끼들 몇을 때려잡자는 것이지요. 이 정도는 용인하지 않겠습니까? 저쪽도 공자님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는 고려해줄 테니까요.”

“그렇다고 한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단순 분풀이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첫째로 공자님의 위엄을 보일 수 있으며, 둘째로 아가씨의 팔다리를 잘라놓거나…못해도 힘을 빼놓을 수 있지요.”

“누굴 노릴 생각이냐.”

“카인이라는 놈. 기억하십니까?”

“…….”

보리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야 했으나 곧 어렵지 않게 그 이름과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때 자주 얼굴을 보고 대화까지 나눴던 상대를 곧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은 보리스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만큼 근래에 그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솔롬의 성주 대리로서.

“아가씨의 신임을 얻고 있답니다. 최측근이라더군요. 아가씨께서 황도 귀족의 고상함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한번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확실히 해낼 수 없다면 시도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억지로 물고 늘어지면 구차하게 모양새만 어그러진다.”

“변명하자면, 그때는 경고였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깔끔하게 처리하도록 해라. 어차피 짐작이야 하겠지만, 꼬리가 밟히고 안 밟히고는 전혀 다른 문제니까. 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예. 깔끔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로우렌의 힘 있는 대답에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가라 손짓했다. 그리고 곧장 방금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후우.”

실비아의 곁에 머무는 쥐새끼 몇을 처리하는 일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비단 쥐새끼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실비아에 관한 일 자체가 그랬다. 하나뿐인 동생이 자신에게 대드는 것이 짜증스럽고, 다른 이들이 거기에 휘둘리는 것이 심히 못마땅하기는 하지만…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안일이었으니까. 자신만 화를 삭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성주 대리로서,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해야 하는 일은 다르다. 무엇 하나 허투루 처리할 수 없는 일들.

‘해들리르의 잔당이 모습을 드러냈다라.’

몰던으로부터 온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접하는 것을 시작으로, 보리스는 자신의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로우렌이 책임지고 진행할 사소한 일들은 깔끔하게 잊은 채.

* * *

보리스는 이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크렘보르의 후계자는 이런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둘 만큼 한가하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니 이 일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

보리스의 앞에서 확실하게 처리하겠노라 장담한 만큼, 로우렌은 쥐새끼들의 사냥에 제법 공을 들일 생각이었다. 이름을 거론한 것은 카인뿐이지만, 그 외에도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몇 있으니 모두 한 번에 싹 정리할 것이다.

‘하지만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지.’

보리스 크렘보르의 이름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복잡하게 갈 필요가 있다.

‘흐음.’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하던 로우렌은 다음날 몇 사람과 만났다. 그들 모두 보리스의 추종자들이었고, 능력에 비해서 야심이 크며, 집안이 제법 괜찮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로우렌은 그들 하나하나와 따로 만나 넌지시 이야기를 흘렸다. 요즘 공자님이 엇나가는 동생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시라고. 차마 동생이기에 강하게 나갈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사실 크렘보르 가문의 일에 우리 같은 자들이 이러니저러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맞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공자님께서 저리 힘들어하시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마치 보리스를 수십 년 섬긴 충신처럼 진한 한숨까지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보리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눈물이라도 짜내지 않았을까? 로우렌은 내심 눈앞의 사내를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침중한 기색을 이어갔다.

“그러게나 말이오. 속이 터질 지경이오. 나는 오래전부터 두 분을 봐 왔소. 아가씨의 어릴 적도 똑똑히 기억하지. 내가 아는 한, 그분은 결코 공자님을 거스르려 할 분이 아니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흥! 내 장담하지. 이건 아가씨의 뜻이 아닐 거요. 분명 아가씨의 곁에서 헛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놈들이 있을 테지. 그놈들만 어떻게든 아가씨에게서 떨어뜨릴 수 있다면 두 분의 사이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터인데.”

“으음. 아가씨께서 잡놈들에게 휘둘리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로우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나의, 우리의 불찰이지. 아가씨께 잡놈들이 꼬이기 전에 먼저 알아채고 쳐냈어야 했는데…그러지를 못했소. 변명거리야 대려면 얼마든지 대겠지만, 다 핑계일 뿐이지.”

자조한 로우렌이 잔에 가득 찬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실 공자님도 알고 계실 거요. 하지만 아무리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이라도 직접 손을 쓰기는 힘들지. 공자님은 크렘보르의 후계자이실 뿐 아니라, 이 솔롬을 다스리는 성주시니까.”

로우렌은 대리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와 대작하고 있는 사내도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로우렌의 한탄에 대꾸하면서도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

그리고 로우렌은 그런 상대의 표정, 눈빛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은밀히 살폈다.

‘됐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왜 모르겠나? 그런 생각을 하라고 몇 번이고 암시를 주었는데.

‘그래. 능력이 없다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열심히들 해보게나.’

평범한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욕심이다. 그러므로 평범한 이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그들의 욕심을 자극하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보리스 크렘보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던 간에 이 모든 것은 공자님의 총애를 얻고 싶었던 이들의 과도한 충성심에서 일어난 사고일 뿐이다.

‘잘 해줬으면 좋겠군.’

그가 부추긴 몇몇은 이것을 기회라고 여길 것이다. 뭐, 만약 정말로 이번 일을 깔끔하게 해낼 수 있다면 이름 정도는 보리스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이겠지만.

* * *

카인은 주로 집에서 식사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외식도 했다. 대외적으로 검소하다 알려진 그가 부리는 몇 안 되는 사치 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여인과 근사한 음악을 들으며 식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내들 대다수가 마다하지 않는 최고의 즐거움이고, 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음.”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종업원이 그가 자주앉는 자리로 자연스럽게 안내했다.

“오늘은 뭔가?”

“남부식 돼지요리입니다. 대협곡의 고원에서 나는 향신료로 맛을 낸…….”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능숙하게 답한다. 카인은 과실주 한잔을 따로 주문하며 동전 몇 닢을 건넸다. 가벼운 성의지만, 그 대가로 종업원은 주방장에게 이번 요리에 좀 더 신경 써달라 한 마디 정도 해줄 것이다.

“후우.”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요리가 근사하고 큼직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음식을 나른 종업원이 물러간 후, 카인은 식기에 손을 가져갔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품에서 자그마한 돌 하나를 꺼내 음식 가까이 가져갔다.

우웅!

음식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붙은 돌에서 희미한 울림과 함께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확히는 돌의 표면에 그려진 기이한 문양에서.

그 울림과 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카인의 표정이 손에 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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