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화
로우렌은 문을 열려는 병사를 만류하고 직접 열겠다며 속삭이듯 말했다. 병사는 의아해하면서도 알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후우.”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로우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문 너머, 암도 창을 보며 서 있을 보리스가 꽤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질 떨어지는 말장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웃으면서 가볍게 면박을 주는 정도에서 그치는 보리스다. 하지만 간혹 그의 기분이 가라앉아있을 때는 말 한마디 꺼내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생기기 시작한 위엄은 그런 반응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냈다.
“공자님.”
역시나, 보리스는 창가 쪽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너도 들었겠지?”
“예.”
“우리의 눈과 귀가 꽉 막혔다.”
정확히는 실비아 쪽을 염탐하던 눈과 귀가 막힌 것이나, 지금 그런 구분은 불필요하다.
“감찰대가 움직이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럴 테지요.”
“위쪽의 뜻일까? 어찌 생각하느냐.”
그 구성원조차 대부분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는 감찰대는 친위대와 마찬가지로 오직 성주의 명령만 듣는다. 그런 면에서, 보리스가 감찰대를 의심하며 위쪽 운운하는 것은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아마도 살라스 공의 뜻이겠지요.”
“차이가 있느냐?”
힘 빠진 목소리에 마찬가지로 힘 빠진 웃음이 섞여 있다. 몸을 돌린 보리스가 가죽이 깔린 널찍한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감찰대가 움직인 거라면 더는 의미가 없다.”
보리스는 성주 대리를 맡기 전부터 자신만의 사람들을 꾸려왔다. 그중에는 은밀한 일에 재주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고, 그는 그런 이들을 한데 묶어 자신을 위해 일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후로, 적잖은 성과가 있었다. 그러면서 보리스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능력을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들을 감찰대와 비교할 수는 없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일만 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감찰대가 마음먹고 손을 쓰기 시작하자 보리스의 눈과 귀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깜깜하게 멀어버렸다.
“무력하군.”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당연한 일입니다. 힘깨나 쓴다고 으스대던 왈패가 훈련된 병사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놀리는 거냐?”
“별것도 아닌 일에 너무 마음을 쓰시니 그렇지요.”
“별것도 아닌 일?”
보리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로우렌은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실수했군요. 당연한 일이라고 정정하겠습니다. 아무튼,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엄한 곳에 심력을 낭비하는 것보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야지. 살라스님을 만나야겠다.”
“그것도 좋지만, 그 전에 의중부터 확실하게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건 명백히 아가씨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입니다. 후계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렇게 보란 듯이 면박을 주고 있지요.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살라스 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군.”
머리가 좋고 생각이 많은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은 가볍게 입을 여는 일이 없다는 거다. 로우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꺼냈으리라.
“감찰대로 추정되는 것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렸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아가씨 쪽만 그렇습니다. 다른 쪽은 문제가 없지요. 말하자면, 움직임이 수비적이라는 건데, 이를 통해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지요.”
“실비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나를 압박할 생각은 없다는 건가.”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볼 경우, 그나마 긍정적입니다. 제 짐작입니다만, 살라스 공은 아가씨께 숨 쉴 구멍을 열어주려 하는 듯합니다.”
“음.”
“물론 어디까지나 다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공자께서 직접 만나시어 한 번 속을 떠보시지요. 정중한 항의도 곁들여서 말입니다.”
* * *
보리스는 자신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듯 가만히 차만 홀짝이는 살라스를 일별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있는 곳. 솔롬 중심 시가지의 고급스러운 식당. 보리스와 살라스는 그중에서도 귀빈들만이 오를 수 있는 3층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허영심과 재물이 많은 이들로 항상 북적이는 이곳이 오늘은 한창 식사시간대였음에도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보리스가 살라스와의 약속을 위해 미리 이곳을 통째로 빌려놓은 덕이었다.
“이 도시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도시. 솔롬은 이제는 그런 표현을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규모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솔롬은 이제 어엿한 도시다. 최근에는 그 이름이 판니른에서 손꼽히는 도시로 불리고 있었다. 물론 그건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에 크게 영향을 받은 탓이지만, 어쨌거나 솔롬의 성세는 현재 시점에서 판니른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기억하지요. 얼마나 오래됐다고 그걸 잊겠습니까.”
“이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는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겁니다.”
“모두 다 장군의 힘이지.”
당연하다는 듯 즉답하는 살라스. 보리스는 흐릿하게 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부친에 대한 이 맹목적인 충성심은 언제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인이라지만, 모든 사람이 이 정도로 헌신적으로 굴지는 않는다.
“살라스 공은, 제가 많이 못마땅하시겠지요. 아버지는 전장에 나가 수만의 적과 싸우는데, 자식이고 후계자라는 놈은 집안에서 소란이나 일으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인하지는 않겠소.”
보리스는 창을 통해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을 내려보았다. 발걸음은 바쁘지만, 전체적으로 표정들이 밝다. 언젠가부터 가끔 이렇게 조용히 나와 시민들의 얼굴을 보곤 했다. 그들의 활기가 감도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던 가슴에 바람이 통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입니까?”
보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살라스는 여전히 김이 피어나는 차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감찰대까지 움직여서 실비를 도우시는 것은?”
“솔직히 말하겠소이다. 공자와 공녀의 갈등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소. 누구 하나를 편들어서 다른 하나를 억누르고 싶지도 않고 말이오. 다만, 이런 쓸데없는 다툼 때문에 장군께서 신경 쓰시도록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소.”
“그래서…이게 공의 답입니까?”
“공자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아오. 솔직히 공감도, 이해도 안 되지만.”
이제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눈먼 충성심과 고지식한 군인의 전형인 그에게 정치적인 이해를 바랐던 것이 실수였다는 걸, 이제는 안다.
“공녀는 자신의 사업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러니 길을 내어줄 생각이외다. 대신, 그녀가 공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어질 거요. 그러니 공자도 그 정도로 만족하시오.”
“사업이라. 그 장사 말입니까.”
장사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기는 했지만, 실비아가 벌이고 있는 일은 이제 그렇게 간단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존의 덩치 큰 상인들에게 밀려 밥벌이나 근근이 이어가던 자들이 실비아의 아래에 집결했고, 그녀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국경 밖 도시 국가들이 비록 대단한 거래처는 아닐지라도,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실비아는 그녀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배경으로 그 새로운 시장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로우렌은 이 새로운 시장이 지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게 보여도 잠재적인 가치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되도록 그 시장을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보리스는 미래의 잠재적인 가치니 뭐니 하는 것은 제쳐두더라도, 새로운 벌이가 생긴다면 나쁠 이유가 없으니 로우렌의 조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굳이 실비아를 압박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따르는 거상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니까. 안 그래도 은근히 청탁을 넣어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 중 몇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실비아의 발칙한 일탈이 점점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기에, 보리스는 조만간 그녀의 자랑거리를 지그시 뭉개줄 생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살라스는 실비아의 자랑거리를 그녀의 사업으로 인정해주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공녀는 여느 귀족 영애들과 다르지. 그건 공자도 잘 알 거요. 그녀의 활달한 기질은 무도회장이나 다과회 같은 곳에서는 해소될 수 없는 것. 그녀가 지금처럼 돌출행동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르오. 물론 공자의 몫도 일정 부분 있을 테지만.”
“…….”
“억누른다고 해서 억눌러지는 것이 아니오. 그러니 공녀에게 숨 쉴 틈을 주자는 거지. 무리한 요구는 아니잖소. 불만이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시오. 이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중재안이니.”
중재? 언성만 높이지 않았다뿐이지, 이게 강요와 뭐가 다른가.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역시 가신(家臣)이 가문의 후계자에게 할 말은 아니다.
‘아니. 아니지.’
살라스는 가신이 아니다. 부친의 수하일 뿐. 그러니 가문의 후계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살라스 외에도 이런 이들은 많다. 주로 군부 쪽의 인사들이지만, 그 외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크렘보르가 아닌 군터 크렘보르를 따른다.
‘안에서부터 존중받지 않는데, 어찌 밖에서 존중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근래에 들어, 교류하고 있는 몇몇 가문의 태도가 묘해졌다. 가문 안 자신의 입지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하기야, 하나뿐인 친동생이 대놓고 대들고 있으니 주변 시선이 묘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맛있는 먹잇감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 사실 그런 자들의 입방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넘어갈 수 없는 쪽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치 크렘보르 가문이 후계 싸움에 돌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스운 일이다. 그런 것을 정말 진지하게 떠들어대는 자들이나, 이런 꼴이 된 자신이나. 모두 우습기만 했다.
“뜻대로 하시지요. 어차피 제 의사 따위는 중요치 않은 것 같으니. 제가 뭐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자들. 군터 크렘보르만 알고, 크렘보르는 모르며 관심도 없는 자들. 지금의 이 우스운 꼴에는 이들의 지분이 적지 않다. 그들의 세상은 오직 군터 크렘보르라는 초인에게 맞춰져 있기에, 그 기준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주 대리니 뭐니 하는 자리에 앉는 대신, 차라리 전장에 나가 싸울 걸 그랬다고요. 그랬다면 이런 골치 아픈 일도 겪지 않고, 이런 꼴을 보지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실제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가문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후계자로서 부친의 빈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건만 돌아온 것은 의심 섞인 눈초리와 질책뿐.
“아무도 나를 모릅니다. 짐작도 하지 못하지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속 편하게 따르기만 하면 되는 자들이, 대신하고 뒤를 이어야 하는 이의 고충을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그럴 리 없지요.”
보리스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마치 부친처럼,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살라스에게 쏘아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