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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11화 (911/1,064)

911화

“그럼.”

명령서. 거창하게 칙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서신의 내용을 낭독하는 내내 사자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자의 앞에 선 군터가 자세를 낮추지도 않은 채로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풀려나지는 않았으나 억제되지도 않은 기세를 정면에서 맞이한 사자는 칙명의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이미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장군. 괜찮겠습니까?”

사자를 맞이하는 자리에는 시어문드도 함께 있었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황자의 사자인데 너무했던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안 괜찮을 것은 무엇이냐.”

“자칫 트집을 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럴 배짱은 있을지 궁금하군.”

자식들의 일을 제외하면 오랜만에 감정이 치밀었고, 군터는 굳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설령 시어문드의 말처럼 이번 일로 문제 생기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문드는 심각하게 여기는 그 문제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정도는 깔끔하게 무시할 만큼 짜증이 치밀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야 할 만큼은 했다. 멍청한 놈이 날려 먹을 뻔했던 골고스까지 탈환했다. 해야 할 일 이상을 한 셈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이상을 요구하는가.

“장군. 지금으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어문드의 간절함 섞인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군터는 과거 황자, 자콥 트라소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제법 인상적이었던 첫만남 때부터, 군터는 줄곧 황자와 자신의 관계가 대등한 거래 관계라고 생각해왔다. 황자 또한 직접 자신의 입으로 답하지는 않았으나 행동으로써 긍정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일방적인 명령을 받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인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이것은 명백히, 대등한 거래 상대가 아닌 신하를 대하는 태도였다. 자콥 트라소프가 하찮은 얼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섬겨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 군터는 이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신감을 느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시어문드의 말처럼 지금으로서는 일단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솔롬에 남겨두고 온 보리스와 실비아의 얼굴이 한순간 머릿속을 스쳤을 때. 군터는 이 감정을 지금 당장은 묻어두어야 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잠시 묻어둘 뿐이다. 결코 잊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군터는 한동안 보지 않았던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 * *

살라스와 할렌, 그리고 니클라스가 한자리에 모였다. 누구도 그들의 회동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극도로 은밀하게 움직인 그들은 성주부가 아닌 내성의 주인 없는 집에서 마주했다. 엄밀히 말하면 명목상의 소유자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감찰대가 소유한 안가였다. 솔롬에는 이런 안가가 이곳 말고도 여러 채 더 있었고, 그 존재는 오직 군터와 감찰대의 몇몇 고위 간부들만이 알고 있었다.

“어떻더이까.”

니클라스가 물었다. 두서없는 물음이었으나 살라스는 자연스럽게 알아들었다.

“영악한 놈이더군. 능력은 모르겠지만 눈치와 입 놀리는 솜씨 하나만큼은 상당했어.”

“직접 녀석을 찾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처리하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지는 않았네.”

“설득당하셨습니까?”

“글쎄.”

살라스가 쓰게 웃었다. 반쯤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음이 조금만 흔들린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가 그 영악한 놈의 목을 벨 수도 있다.

“그나저나…뜻밖이로군요.”

니클라스의 시선이 할렌 쪽으로 향했다. 그는 할렌, 아니 롬바드가 왜 이 자리에 함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실비아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군터의 신임을 받는 친위대 장교라는 것도. 하지만 과연 그가 이 자리에 함께할 정도인가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눈빛으로 드러내는 의문. 살라스는 다시 한번 쓴웃음을 머금었다.

할렌을 이 자리에 오게 한 것은 그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이번에 솔롬으로 돌아오기 전, 군터는 필요하다면 니클라스에게만은 할렌의 정체를 밝혀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니클라스가 감찰대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실비아의 조력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일개 장교를 끌어들였는지 궁금한가?”

“…….”

니클라스는 무언으로 긍정했고, 살라스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니클라스는 믿을만하다.’

감찰대의 대장 자리를 니클라스가 맡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그만큼 충성스러우면서도 신중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지금까지 그가 할렌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위험한 비밀이기는 하지만.

“그가 할렌이다.”

“…예?”

드물게, 니클라스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의문,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담긴 눈이 좌우로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두어 번 왔다 갔다 한 순간, 할렌이 가면을 벗었다.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할렌이라고 했네.”

“…….”

잠시 살라스를 바라보던 시선이 할렌에게 향했다. 니클라스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얼굴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혼란스럽군요.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만.”

니클라스는 살라스가 이런 것으로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저 낯설고 이질적인 얼굴의 사내가 할렌이라는 말은 진지하게 한 것일 터. 하지만 어떻게 저 낯선 사내가 할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니클라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가 알기로, 할렌은 죽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할렌은 죽었지. 하지만 다시 살아났네. 장군의 힘을 빌어서.”

“…….”

니클라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혼란과 불신이 감돌았다. 살라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어려운가 보군.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자리를 마련하고 물꼬까지 텄으니 나머지는 당사자가 해결해야 하리라.

“…자네와 나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

“그대는…정말 할렌인가?”

“자네가 생각하는 할렌은 내가 맞네.”

할렌은 전날 그와 니클라스가 주고받았던,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으나 기억에는 남을 법한 몇 가지 이야기를 읊었다.

“…….”

할렌의 말이 이어질수록, 니클라스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갔다.

“…믿기 힘들군.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어.”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당사자인 니클라스 자신조차도 지금 듣고서야 그런 대화를 나누었었다는 것을 상기할 정도였다. 그 말인즉, 저 낯선 사내가 정말로 할렌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사령술인가?”

니클라스는 군터가 사령술을 쓸 줄 알며, 그 수준이 어느 방면에서는 전문적인 사령술사들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죽었다 살아난 할렌을 보며 사령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런데, 그 모습은…….”

“원해서 이런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은 아니다.”

껍데기라.

롬바드, 아니 할렌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표현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니클라스는 그 사소한 부분에서도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일까?

“할렌에 대한 일을 자네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했던 이유를 짐작하는가?”

한동안 잠자코 있던 살라스가 물었다.

“예.”

죽은 자를 되살리다니. 신의 영역에 닿은, 말 그대로 기적 그 자체. 그렇기에 너무나 위험하다. 교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십중팔구 신성모독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지 않을까?

“이 위험한 비밀을 지금에 와서 자네에게 밝히는 이유 또한 짐작하는가?”

“예. 알 것 같군요. 하지만 확실하게 듣겠습니다.”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니클라스는 애써 머리를 식혔다. 살라스가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할렌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님을 계속 상기하면서.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든 힘들 것 같네. 억지로 하나를 누른다고 해도 결국 반발이 일어날 뿐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겠나.”

“아가씨께 기회를 주기로 하신 겁니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니클라스는 살라스의 속을 정확히 짚었고, 살라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녀가 연합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힘써주게.”

“그 말씀은.”

“내 공자에게 언질을 줄 것이지만, 내가 떠나고 나면 생각을 바꿀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자네가 적당한 선에서 힘을 써주게.”

지금까지처럼 소극적으로가 아니라,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보리스는 감찰대가 실비아를 은밀히 돕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살라스의 말처럼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가신, 어쩌면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살라스는 군터를 대리해 와 있다. 그의 뜻과 말이 곧 군터의 뜻이요 말이었으니,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인 셈이다. 그렇다면 따를 뿐.

“할렌과 협력하도록 하게.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지원을 해줄 테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전갈을 받으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느낌일 뿐이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아.”

살라스는 보다 상세한 논의는 두 사람이 하라며 자리를 떠났다. 그에게 쏠린 시선이 적지 않은 만큼, 살라스는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

두 사람만 남은 자리. 침묵하던 니클라스가 입을 뗐다.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네.”

“이해한다. 답할 수 있는 것은 답하도록 하지.”

“자네는, 진정 할렌인가?”

되풀이되는 질문. 그러나 그 의미는 전과 달랐다. 처음의 질문에서 돌아온 답에서, 니클라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할렌. 아니, 할렌을 자처하는 저 사내는 할렌이냐고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할렌은 자신이 맞다고.

“솔직히, 잘 모르겠군. 아직 내 기억은 온전하지 않아.”

“그런가…….”

불완전한 기억이라. 죽었다 살아난 부작용일까? 스스로 할렌이라 밝혔음에도 계속 느껴지는 이질감은 그 때문일까?

“솔직히 아직도 믿기 힘들군. 죽었다 살아나다니.”

“…….”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나? 장군과 살라스님 외에?”

“모페이브 공. 그리고 나짐이라는 술사.”

“술사라. 그렇군.”

할 말을 찾으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니클라스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만 괜찮다면,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가. 앞으로의 일들도 논해야 할 테고, 내 개인적으로도 그러고 싶네만.”

“필요하다면 그리 하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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