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화
“아가씨께서는 입에 발린 말 따위에 휘둘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휘둘리지는 않는다 해도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 썩은 사과가 주변의 다른 사과를 천천히 물들이듯이. 그렇기에 간신은 초기에 뿌리 뽑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옳은 말씀입니다.”
거칠고 모욕적인 언사. 거기에 날카로운 시선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면 저절로 표정이 굳어지기 마련. 그러나 카인은 처음 표정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담담한 모습이 살라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미 선입견을 품고, 반쯤 마음을 정한 상태에서 왔기 때문일까.
‘이런.’
카인은 살라스의 냉담한 반응을 보며 내심 초조해졌다. 설마하니 실비아 크렘보르의 신임을 받는 자신을 어쩌기라고 할까 싶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 살라스다. 성주 대리로 있는 동안에는 잠잠했다고 하지만, 그 역시 초기부터 성주를 따라 숱한 전장을 누볐던 무장인 것이다. 그 피로 쌓은 무게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가리를 벌려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맹수는 맹수인 것이다.
악감정을 품은 것이 분명한 그가 당장 허리춤의 저 검을 뽑아 든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카인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말을 골랐다. 아무렇게나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설득할 수 있는 몇 마디만 추리는 것이 나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를 추궁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확인하고 싶었네.”
“제가 썩은 사과인지 아닌지 말입니까?”
“그래.”
“한 말씀 드리자면, 썩은 사과가 제 발로 멀쩡한 사과들 틈바구니에 끼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썩은 사과임은 부정하지 않는가?”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자평이라니. 낯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살라스는 짧은 시간 카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 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애송이. 가진 것이라고는 빛바랜 이름 하나뿐이라고 여겼던 녀석은 제법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였다.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니, 자신의 앞에서 저리 당당하게 농담까지 지껄일 수 있는 것은 분명.
“공께서 장군을 섬기시듯, 저는 아가씨를 섬깁니다.”
“처음 자네를 발탁한 건 보리스 공자가 아니었나?”
“그랬지요. 하지만 저를 진정으로 알아 봐주시고 중용해주신 건 아가씨입니다.”
“그렇다 치고. 그래서?”
“제가 아가씨를 위해 하는 일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경 쓰여서 아가씨를 위해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변명인가?”
“제가 썩은 사과인지 아닌지, 살라스님께서 판단해주십시오.”
“…….”
제법이 않은가.
빠질 때 빠지고, 들이댈 때 들이댈 줄 안다는 것. 젊은 나이치고는 꽤 능숙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과감하다. 승부를 걸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처음 품었던 적대감이 조금씩 옅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이 애송이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왜 알아보지 못했지?’
조사를 안 해본 것이 아니다. 한동안 사람까지 붙여서 지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리 인상적인 면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아니.’
알고 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하군.’
가문이 몰락하고 정적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이 머나먼 땅까지 홀로 도망쳐왔다. 자신을 숨기고, 지키는 데 능숙한 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전날 그걸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크렘보르의 평안을 위해서는 소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
“그 소란이란, 아가씨의 사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능청은 그쯤 하지.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것 아닌가.”
“예.”
무겁게 답한 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살라스는 그 한숨이 의도적으로, 억지로 짜낸 한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평안이란 것이 뭡니까. 그 평안이라는 것이,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크렘보르의 후계자는 보리스 공자다. 처음부터 그랬지. 장군께서 그리 정하셨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후계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후계자의 권위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있지. 중요한 건 아가씨의 속마음이 아니라 행동이고, 그로 인한 영향과 결과다.”
잠시 침묵하던 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아가씨에게 자유를 약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라는 것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요. 진정한 자유는 홀로 설 수 있을 때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유에는 자유롭기 위한 힘이 필요한 것이지요. 힘을 주지 않고 자유롭게 살라 하는 것은 무책임한 방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인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살라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들 것 같았다. 카인은 자신의 목이 위태로워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가씨께서는 발버둥 치고 계신 것뿐입니다. 그 발버둥마저도 허용치 않으려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반항으로 보이겠지요.”
“…….”
“이해해달라고 부탁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장군께 방금 제가 했던 한 마디만 전해주십시오. 그런 연후에도 장군께서 같은 마음이시라면 체념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허리춤 가까이에서 멈춰 있던 살라스의 손이 잠시 후 도로 내려갔다.
*
“전하. 배치가 끝났습니다.”
자콥 트라소프는 어둠에 잠긴 구릉을 응시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준비해둔 부대만 움직이도록. 놈들이 눈치채게 둬서는 안 된다.”
“옛!”
황자의 지시가 떨어지고, 고작해야 수백이나 될까 싶은 인원이 야음을 틈타 조용히 움직였다. 여기저기 튀어나오고 파인 험준한 언덕길을 올라간 그들은 어느 순간 십여 무리로 나뉘어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땅에서 조용히 무언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 * *
살라스가 보낸 서신. 거기에는 카인이라는 놈이 했다는 발칙한 이야기가 빠짐없이 쓰여 있었다.
‘자유라.’
보리스의 과욕인가, 아니면…….
“장군.”
시어문드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무시하고 있었을 뿐. 발걸음 소리가 평소보다 큰 것에서 꽤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왔음을 짐작했다.
“황자가 이끄는 주 전선에서 온 소식입니다. 신병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모양입니다.”
“신병기?”
시어문드가 서신을 건네며 덧붙였다.
“모페이브 공의 역작 말입니다.”
군터가 자세를 바꿨다.
모페이브의 발명품. 고렘. 황자가 그에 대한 지식을 얻어간 후로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듯하여 황자 휘하 술사들의 능력에 의구심이 깊어가던 중이었다.
‘드디어 성공한 건가.’
시어문드가 건넨 서신에는 신병기에 대한 정확한 내용 같은 것은 쓰여 있지 않았다. 다만 신병기를 활용해 적을 크게 밀어냈다고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상세한 내용을 알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전국이 바뀌겠군.”
“예. 그간 주 전선의 상황이 지지부진했지요. 그러나 이번에 적을 크게 밀어냈으니 기세를 살려볼 만합니다.”
“몰아치리라 보나?”
“누구보다 강하게 전쟁을 주장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지요. 그간 황자의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체면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미 테리브란으로 사자가 향했을 겁니다. 조정 귀족들을 닦달하겠지요.”
서신의 내용이 너무 간략하여 정확히 전투가 어떻게 치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을 물리쳤다는 표현 대신 밀어냈다는 표현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제대로 된 전투가 일어났던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승리라고 하기는 힘든 것이지만, 어쨌거나 성과는 성과였다. 황자는 그의 작은, 혹은 크지 않은 성과를 최대한 부풀리려 할 터. 그러면 조정의 귀족들은 알면서도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자가 내세우는 부풀린 성과 때문만이 아니라, 그간 정쟁을 벌이느라 전쟁보조에 소홀했던 과오 때문이라도.
“아무튼, 좋지 않게 됐군요.”
“음?”
“황자가 밀고 들어가려 한다면, 장군께도 불똥이 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처럼 성과를 낸 황자가 기세를 이어가려 진군한다면 당연히 다른 전선에서도 호응해야 할 터. 그러면 골고스 쪽에도 지시가 내려올 확률이 높다. 누구보다 전쟁에 적극적인 황자가 능력을 입증한 장수와 강력한 군대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만무하니.
“밀고 들어간다?”
공격보다는 수비에 집중하며 시간을 끈다. 그것이 아군의 대전략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쪽이 유리해지니 굳이 다급한 상대에게 어울려줄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는 그런 대전략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와서 방침을 바꾼다는 것인가?
“기세의 문제도 있고, 적이 이미 무리해서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보로겐 콘실리에의 4군단을 이름이다. 티브리악의 새로운 가주가 합류하여 한숨 돌렸다지만 , 타라냐드와 리바스트라 인근은 이미 전화(戰火)에 휩쓸려 황폐해졌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점점 더 몸집을 키우고 있다.
“적의 4군단이 동진하기 전이었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버티기로 일관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균형은 깨졌습니다. 타라냐드와 리바스트라, 양주(兩州)의 피해는 단기간에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지요.”
이미 자이드라 멕시스는 조정의 지원이 미비함을 성토했다. 그런 상황에서 전황이 더 격렬해졌으니, 황자는 어떤 식으로든 그의 부담을 덜어줘야만 한다. 직접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성의를 보여야 할 터.
“또한, 군기를 통제하는 데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키기만 하는 싸움은 밀린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병사들도 바보가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소문은 돌기 마련이다. 병사들이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하면 군기가 꺾인다.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이 버텨왔지만, 글쎄.
“황자도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계속 해왔을 겁니다. 그러던 차에 호기를 맞이했으니,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지요.”
시어문드의 예견은 현실이 되었다.
엿새 후. 황자의 사자가 명령서를 들고 골고스에 들어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