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9화
토어릭의 은밀한 수작질에 불쾌함을 느꼈지만, 살라스는 그의 말을 아주 귓등으로 듣지는 않았다.
할렌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카인이라는 놈이 은근히 실비아를 부추기는 것 같다고 말이다.
‘어떻게 할까.’
할렌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전한 것은 의외였다. 아무래도 실비아의 곁에 머물러야 하는 만큼, 함부로 나서기 어려웠던 것이겠지. 살라스가 놀랐던 것은, 할렌이 그 정도까지 생각하고 인내할 정도로 침착해졌다는 점이었다. 예전. 그러니까 롬바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할렌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보다는 몸이 앞서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자잘하게 사고 아닌 사고도 꽤 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변하지 않았나.
‘카인이라.’
아는 놈이다. 녀석이 처음 솔롬으로 흘러들어왔을 때부터 눈여겨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녀석 때문에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나. 비록 녀석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보리스의 밑에서 관료로 성장할 줄 알았더니, 뜬금없이 실비아에게로 줄을 바꿔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영악한 놈이라는 인상은 받았으나, 딱히 관심을 둘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니 아무래도 그게 착각이고 실수였던 듯했다.
‘보리스 공자는 손을 쓰기가 힘들다.’
전권을 받았다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보리스가 이미 솔롬의 관계(官界)를 장악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정말 독하게 마음먹는다면 뿌리부터 다 뜯어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뒷감당이 힘들 것이다.
보리스 쪽을 건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실비아 쪽은 어떨까. 보리스가 이미 관계에 뿌리를 내렸다면, 실비아 쪽은 상계에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 봐야 할 것이다. 진짜배기 거상들이야 일부는 보리스 쪽에 이미 선을 대고 있을 테지만,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은 나머지나 중소규모의 상인들은 실비아가 구축한 신상로(新商路)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저번 상행에 함께했던 이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양쪽을 모두 누를 수 없다면 한쪽을 눌러 나머지 한쪽이 우세를 점하게 해주는 것도 방법이다. 그 또한 안정화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실비아의 곁에서 입을 놀려댄다는 그 카인이라는 놈을 적절히 제어한다면 이 볼썽사나운 다툼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번 시도해볼 만한 일임은 분명하다.
생각을 정리한 살라스는 곧바로 은밀히 사람을 시켜 카인을 감시하게 했다.
* * *
“음.”
퇴청 후 집으로 돌아가던 카인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 전부터 느껴진 기묘한 긴장감. 처음에는 과민한 것이라, 착각한 것이라 생각하고 넘겼지만 그런 감각이 며칠째 꾸준히 느껴지니 더는 그렇게 치부하고 넘길 수 없게 됐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누구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황도의 암살자들. 그러나 그 추측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접었다. 만약 황도의 암살자들이었다면 보다 은밀했을 것이며, 이렇게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그들의 시선이었다면 지금처럼 긴장감만 느끼는 선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보리스 쪽인가?’
아무래도 이쪽일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쪽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후우.”
뭐가 됐든, 감시자가 생겼다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호위라고 따라붙은 자들이 감시자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실비아 크렘보르가 나름 엄선해서 붙여준 호위들은 영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아무래도 실비아의 세력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상계에 일부 접한 것이 다인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롬바드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롬바드 본인과 그가 거느린 친위대 병사들은 실비아의 곁에만 머물고 있다. 그녀의 호위가 그들의 임무인 만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임무 그 자체에만 전념했다. 그들에게 있어 실비아 크렘보르는 호위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말인즉,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 부분에 대해 실비아 크렘보르는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지만, 롬바드와 친위대 병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했으나, 롬바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앞으로도 이변이 없다면 쭉 그럴 듯했다.
‘어떻게 한다.’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기고, 카인은 다시 감시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감시자들을 잡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잡아도 의미가 없다. 뒷배 없는 놈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놈들이 보리스 쪽이라면, 놈들을 붙잡는다 해도 보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풀어주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얌전히 풀어줘야겠지. 그를 통해 보리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복잡해진 카인은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감시당하는 것이 좋을 리 없지만,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저 감시자들이 누가 보낸 자들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
집으로 돌아온 카인은 품에서 자그마한 나무 조각을 꺼냈다. 사람의 입을 형상화한 조각이었는데, 기이한 분위기와 기운이 감돌았다.
이것은 카인이 사비를 들여 구한 법구였다. 두 개가 한 쌍으로, 두 개가 모두 멀지 않은 거리 내에 있다면 양방이 신호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 신호가 아주 짧은소리 정도에 그치는 데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하급 법구 이상은 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레온.”
카인은 그것을 하나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하나는 레온에게 주었다. 그리고 신호에 대해서 미리 약속해두었다. 신호는 오직 서로를 은밀하게 호출해야 할 때만 보내자고.
신호를 보낸 후. 카인은 가만히 앉아 레온을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서쪽에 난 작은 창문에서 작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카인이 다가가 창문을 열자 레온이 순식간에 실내로 들어왔다. 카인은 인사도 하지 않고 즉시 창문을 닫았다.
“무슨 일입니까?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합니다만.”
“느꼈나?”
“감시하는 놈들 말이지요? 예. 넷이더군요.”
역시.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레온의 감각은 그보다 더 뛰어났다. 단순히 무공이 더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처리해야 하는 놈들입니까?”
“아니. 누가 보낸 것인지도 몰라. 손부터 쓸 수는 없지.”
“그럼 어쩌시려고요? 설마 놈들이 알아서 물러날 때까지 기다리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말했지 않은가. 누가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것부터 알아내야겠지. 그래야 처리를 하든, 말로 해서 물러나게 하든 할 수 있을 테니.”
“아하. 그렇다면…놈들의 뒤를 캐라는 말이군요. 맞습니까?”
“그래.”
당연하지만 레온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카인은 레온에게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늦어도 좋아. 은밀하게 진행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전부 써버려도 되는 겁니까?”
“모자라면 말하게.”
카인을 아는 이들은 그가 크렘보르 영애의 총애를 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너무 소박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인은 여전히 작은 집 한 채 머물고 있었으며 하인도 두 명밖에 쓰지 않았다. 마차도 사지 않았고, 그 외에 다른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카인의 성품 자체가 검소한 것이라 떠들어댔다.
착각이었다. 카인은 오히려 재물을 물 쓰듯 썼다. 다만 그 용처가 일반적이지 않고, 은밀할 뿐.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 * *
레온은 왔던 길로 카인의 집을 빠져 나왔다. 다람쥐처럼 잽싸게 움직이는 그는 순식간에 골목 사이로 스며들었다. 날랜 몸도 몸이지만, 이 근방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는 그였기에 감시자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쉽군.
레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기척을 파악한 넷 외에, 다른 한 명이 멀찍이서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알아차렸군.’
살라스는 저 집 안에 있을 카인이 감시를 알아차렸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저 잽싼 놈을 은밀히 불러들였으리라.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상관없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감이 좋고, 신중하게 머리를 쓸 줄도 아는군. 눈치만 빠른 쥐새끼는 아니라는 건가.’
살라스는 카인에 대한 그의 평가를 살짝 더 높였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
카인을 감시하고 있는 넷. 니클라스가 붙여준 녀석들이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했는데, 한심하게 꼬리나 흘리고 다니다니. 평화에 녹슨 건가, 아니면 원래 한심한 것들이었나. 혀를 찬 살라스가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저 위에서 느껴지는 네 명의 시선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카인의 집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멈춰 선 그는 그대로 문을 두들겼다. 곧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하인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비켜라. 그리고 가서 네 주인을 불러와라.”
“예? 누, 누구신지…….”
“알 것 없다.”
살라스는 하인을 밀치거나 위압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를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을 뿐. 그것만으로도 하인은 제풀에 놀라 황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짤막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살라스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그가 거실로 들어설 즈음, 집주인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공께서는…….”
“날 아는군.”
“어찌 모르겠습니까. 살라스님 아니신지요.”
서늘함이 감도는 시선을 마주한 순간. 카인은 저 밖의 감시자들을 누가 붙인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째서? 아니. 그렇군.’
처음엔 의문을 가졌고 그다음은 납득했다. 살라스가 왜 솔롬에 돌아와 있는지를 떠올린 직후였다.
“보아하니 내가 왜 찾아온 것인지 짐작한 듯한데.”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다. 이자의 앞에서는 숨소리마저도 조심해야 하리라. 카인은 마음을 다잡으며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곁에서 참언과 아첨을 일삼고 있다지.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도 자네를 왜 즉시 벌하지 않았는지 아나?”
분명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목에 칼을 들이민 것 같은 살벌함이 느껴진다. 카인은 감히 그에게 앉으라 자리를 권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입을 잘못 놀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예.”
“어째서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남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다?”
“살라스님께서 직접 확인하시면 곧 알게 될 일입니다.”
“아가씨의 총애가 널 지켜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라면 오산이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살라스님이 공정하신 분임을 믿을 뿐입니다.”
서늘한 시선이 카인의 두 눈에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