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8화
보로겐 콘실리에가 이끄는 4군단이 동진을 개시하면서 리바스트라와 타라냐드의 전선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쉽지 않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사기가 오른 또 다른 적이 합류한다면 녹록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새롭게 티브리악의 가주가 된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팽배했던 불안감이 다소 해소되었다. 그러자 자이드라 멕시스를 위시한 지방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황자에게 프란시스 티브리악을 바크렌의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연명서를 보냈다. 황자는 그 요청을 즉시 수락했다. 어차피 바크렌은 티브리악에게 주어진 땅이었고, 티브리악의 가주가 된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바크렌의 총독 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임명 과정에서 자리를 두고 자잘하게나마 정치적인 거래를 시도할 수 있었을 테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스스로 먼저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먼저 성의를 보인 것이다. 그러니 황자로서도 응당 그에 맞는 보상을 해줘야 했다.
‘총독이라고?’
당연한 거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솔롬에서 부친을 대리하고 있던 보리스 크렘보르는 자신과 함께 전장에서 싸웠던 티브리악의 젊은 후계자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이제 서른이 조금 넘지 않았던가?’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얼추 서른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많을 것이다. 한 주의 꼭대기에 오른 사람치고는 너무나 젊다. 아니, 어리다.
‘빨라도 너무 빠르군. 그에 비하면 나는…….’
머리로는 알고 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을 의식하는 것이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는 그저 예정되어있던 미래를 맞은 것뿐이다. 티브리악의 후계자로서 작고한 부친의 뒤를 이었고, 간단한 거래를 통해 빠르게 총독 위에 올랐다.
‘그와 나는 다르다.’
알고 있다. 머리로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답답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후우.”
그날. 보리스는 오랜만에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 * *
살라스가 보낸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군터가 미세하게 표정을 구겼다. 그를 아는 이들이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놀랐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군터는 좀처럼 감정 변화를 겪지 않았고, 겪는다 해도 그것이 표정에 드러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근래에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크게 감정이 요동친 것은 첫째로 자식들의 문제고, 둘째로 살라스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살라스에 대한 그의 신뢰는 다른 수하들을 향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살라스가 그의 믿음을 저버렸다. 전권까지 주었건만, 자식 녀석들의 다툼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살라스는 보리스와 실비아 사이에 있는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으며, 무엇보다 양쪽 모두 한 발자국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탓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했다. 강압적으로 나가보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흐음.’
실망감을 접어두고서 서신의 내용을 곱씹다 보니 이해가 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살라스에게 전권을 주었으나, 녀석이 할 수 있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보리스와 실비아 모두 자신의 자식이 아닌가. 살라스가 아무리 강하게 나간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녀석들의 목을 칠 수도, 지위와 신분을 박탈하고 연금해버릴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이냐.’
살라스가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두 자식 녀석들에게 짜증이 일었다. 보리스도 그렇고, 실비아도 그렇고, 대체 뭐가 문제기에 저들끼리 다툰단 말인가. 설마하니 보잘것없는 한 줌 권력이 아깝다고 으르렁대는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실망스러운 것을 넘어 우습기까지 하다.
‘골치 아프군.’
짜증이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금이 갈 정도로 메말라버린 땅에 자그마한 새싹이 피었다고 할까. 비록 그것이 잡초의 새싹일지라도, 어쨌거나 색다른 재미다. 아직은 인간성이 남아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도 하고.
‘어찌한다.’
두 녀석의 문제다. 자신이 강제한다고 해도 이미 마음속에 싹튼 악감정까지는 어찌할 수는 없을 테니.
“…….”
군터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살라스의 것을 제외하고도 서신은 두 개가 더 있었다. 하나는 보리스에게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비아에게서 온 것이다. 무슨 내용이 쓰여있을지는 짐작이 갔다.
뻔한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읽지 않을 수는 없으니 하나씩 천천히 읽었다.
보리스의 것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실비아가 욕심을 부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후계자인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인정하고 있다면 힘을 실어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보리스답지 않은 화법이었지만, 그만큼 몰려있다고 한다면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보리스의 것이 이렇듯 뻔한 내용이었던 반면, 실비아의 것은 예상과 달랐다. 실비아는 우는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연합국과의 교역을 확대해 나가려 하니 그에 대해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보리스와의 갈등에 관한 내용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할까,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잠깐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군터는 보리스의 서신보다는 실비아의 서신이 더 마음에 들었다. 제 몫을 알아서 찾아 먹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서다.
‘연합국이라.’
제국의 밖. 동쪽 땅에 난립한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연합체. 실비아는 이미 상단을 이끌고 그곳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어쩌면 녀석은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녀석을 지원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좁아터진 솔롬과 판니른에서 남매끼리 물고 뜯고 하는 것보다는 한 놈을 밖으로 보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상의할 녀석이 없군.’
살라스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딱히 믿고 의논할 만한 녀석이 없다. 그나마 토어릭이 이런 쪽으로는 쓸만한데, 녀석은 이미 아들 녀석 쪽에 붙은 모양새다.
“흐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군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들의 문제는 그의 유일한 고민거리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고민이 영 쉽게 풀리지를 않는다.
사실, 이 끈질긴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하다. 살라스가 서신에 쓴 이름들. 보리스와 실비아의 곁에서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것들을 모두 쓸어버리면 된다. 손발은 물론이요, 눈과 귀까지 다 잘라버리면 녀석들이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을 테니 자연히 얌전해지지 않겠는가.
실제로 아주 잠깐. 그런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군터는 곧 그럴 마음을 접었다. 그건 보리스의 곁에 붙어있는 놈들 가운데 할렌의 아들 두 놈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식놈들을 인형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놈을 자신 없이도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시키는 것이 목표인데, 그런 식으로 팔다리를 다 잘라놓으면 녀석들이 어찌 자립하겠는가. 비뚤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복잡하게 갈 수밖에 없다. 군터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였다.
* * *
살라스는 고민했다.
그는 일단 받은 명령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든 어떻게든 완수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종종 그 최선이 도를 넘을 때도 있을 정도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 그것이 살라스였다. 그렇기에 군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전권까지 부여받고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다른 이가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살라스 본인에게는 제법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빌어먹을.’
마음속에는 불덩이를 품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그였다. 그런 그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다. 속에 품은 불이 속으로만 삭이기에는 너무 뜨거워진 탓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크렘보르 남매에 대한 실망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품고 있었지만, 그 실망감은 그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나눈 후 훨씬 더 커졌다. 이제는 실망이 아니라 분노가 일 정도로.
그들이 두고 다투는 가문의 모든 것은 군터 크렘보르가 이룬 것이다. 실비아는 물론이고, 보리스 역시 그 기반 위에서 뛰노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부친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저들끼리 철없이 싸워대다니.
“그리고 자네는 그걸 방조했지. 아니, 부추겼나?”
“장군께는 물론이고, 살라스님께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않는 살라스의 앞에서, 토어릭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살라스의 분노를 이해한다는 듯.
그러나 토어릭의 그런 순종적인 태도는 살라스의 불편한 심기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은 토어릭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자네가 보리스 공자에게 섰을 때, 조금 실망스럽긴 했어도 별말 하지 않았지. 자네의 생각과 판단을 존중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보리스 공자는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초조해한다?”
“자신의 위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초조함이지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보리스 크렘보르는 보장된, 아니 보장될 수밖에 없는 자리와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는 군터 크렘보르의 하나뿐인 아들이며 크렘보르의 후계자다. 큰 변수가 없는 한, 장차 그가 부친의 뒤를 이으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위치와 미래를 불안해한다고?
“보리스 공자는 얌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존재감 없는 후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지요. 그런 그에게 있어 장군은 너무나 큰 그늘입니다. 빠져나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그늘 말입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보리스 공자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뿐인 동생이 이를 드러낸 겁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먼저 시작한 쪽은 보리스 공자가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살라스가 눈매를 좁혔다. 은연중 보리스의 편을 들려는 토어릭이 못마땅했으나 그 부분을 제외하면 토어릭이 한 말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보리스가 하는 고민이나, 압박감 같은 것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감안 할 만한 부분이기는 했다. 적어도 단순한 권력욕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리스가 한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한심한 사태의 일차적인 원인은 분명 보리스 공자에게 있습니다.”
일차적인 원인. 살라스는 그 미묘한 표현 뒤에 숨겨진 의도를 곧장 읽었다.
“보리스 공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가.”
“아가씨의 곁에서 충동질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요? 아니,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그래.”
살라스는 이미 여러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는 니클라스도 있었고, 지금은 롬바드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할렌도 있었다. 그렇기에, 살라스는 토어릭이 이야기는 충동질하는 자들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놈을 어찌 처리할지 물으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충동질하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살라스는 그놈이라고 답했다. 이 차이는 크다. 살라스가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토어릭의 눈빛이 달라지기에는 충분했다.
충동질하는 자들, 혹은 놈은 실비아뿐 아니라 보리스의 곁에도 있다. 하지만 토어릭은 살라스가 그쪽에는 손을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라모트와 로우렌은 죽은 할렌의 자식이고, 자신은 오랫동안 봐온 사이였으니까. 그 외 다른 인사에게 손을 쓸 수도 있겠지만, 핵심 인물을 제쳐두고 잔가지에 손을 뻗는 것은 심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즉, 별 의미가 없다는 뜻.
반면, 실비아의 곁에 있는 놈은 다르다. 살라스에게 있어 놈은 실비아에게 총애를 받는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전혀 없다.
“경고하지.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옛정에 기댄 온정은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살라스는 냉철했다. 그는 토어릭이 자신을 부추기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음을 단언했다. 그리고 살벌한 경고까지 남겼다.
“선을 넘지 말게. 자네든, 할렌의 아들들이든 마찬가지야. 선을 넘는 순간, 난 망설이지 않을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