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화
환야. 정확히는 환야의 인형인지, 뭔지 모를 것이 다녀간 후로도 군터는 골고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성의 수용한계를 명백히 넘는 대군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보급은 그럭저럭 문제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놀고먹고 있어도 되는 건가?”
아드리안은 시어문드의 집무실에 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업무상 이런저런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실제로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우리라고 하지 말게.”
“이봐. 팍팍하게 굴지 말라고.”
“하아.”
시어문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이 앉아서 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드리안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다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시어문드도 잘 알았다. 그래도 아드리안은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어떻게든 꾸역꾸역해냈다. 문제는 그렇게 버티다가도 간혹 한계다 싶을 때면 지금처럼 도망쳐나온다는 것이고, 더 문제는 그렇게 도망쳐서 오는 곳이 자신의 집무실이라는 점이다.
“어쨌거나 괜찮은 거냐 이 말이야.”
“뭐가 말인가.”
“우리 말이네. 골고스에 틀어박혀서 손가락만 빤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지 않나.”
“손가락만 빨다니…무슨 말을 해도 그렇네 하나.”
“표현이야 어찌 됐든, 하여간 이대로 괜찮겠냐 이 말이네.”
“글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조치하겠지.”
황자가 직접 나서든, 아니면 군터 크렘보르가 편하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한 다른 자들이 나서든,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설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자네가 지금처럼 태평하게 있을 리가 없다고 보는데?”
“태평해 보이나?”
시어문드가 붙들고 있던 서류를 뭉텅이로 집어 아드리안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에 아드리안이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언제 봐도 시어문드의 업무량은 살인적이었다. 듣자 하니 별 사소한 것까지 다 직접 챙긴다던데, 그래서일까? 아드리안 자신이었다면 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못할 일이다.
“말장난하지 말고.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자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정치적인 것은 잘 몰라.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도 않고. 방금 한 말이 내 생각이네. 우리가, 자네 말처럼 놀고먹고 있는 것이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손을 쓰겠지. 그럼 그때 가서 대응하면 될 일이야. 장군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나.”
시어문드가 담담히 말하자 아드리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자네를 모른다고 생각하나?”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장군께서 말씀하신 것은 말씀하신 거고, 자네는 별개지. 일이 닥친 다음에 생각하겠다고? 내가 아는 시어문드는 절대 그럴 인사가 아니야. 겉으로는 그런 척해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열심히 머리 굴리면서 대비를 할 사람이지. 그렇지 않나?”
“후우.”
시어문드의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한동안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던 시선이 아드리안을 향했다.
“이럴 때 보면 자네도 머리가 제법 좋은 것 같아. 그런데 왜 그 머리를 이런 쪽에만 쓰는 건가?”
“내 머리는 일머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제대로 짚은 모양이지?”
시어문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맞아. 나름대로 대비는 하고 있지.”
“무슨 대비? 내가 알면 곤란한가?”
“그런 건 아니야. 그리 복잡할 것도, 비밀스러울 것도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말해주게. 뭘 준비하고 있나?”
“군심을 얻으려고 노력 중이지.”
“엥?”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말에,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눈만 끔뻑였다.
“군심이라고?”
“그래. 생각해보게. 어차피 정치적인 계산과 싸움이야 저 테리브란에서 이루어지고 있네. 골고스에 있는 우리가 손쓸 방도는 극히 제한적이지. 기껏해야 자이드라 멕시스나 전임총독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뿐이겠지.”
“확실히.”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야. 장군에게 군대가 있기에 저들은 장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 그러니 장군에게 있어, 우리에게 있어 군심을 잡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일 수밖에.”
“자네가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이유도 있긴 하지.”
군터는 뛰어난 군인이고, 훌륭한 상관이지만 덕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그가 군을 이끄는 방식은 가장 먼저 앞에서 용맹히 싸우고, 병사들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만 놓고 보면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은 상관이지만, 그에게는 인간적인 면모가 없었다.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많아도, 경애하는 이들은 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만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군터 크렘보르는 그런 위인이었다.
그에게 부족하다면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 그것이 시어문드가 하는 일이었다. 병사들이 겪는 사소한 문제들을 살피는 것.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서부터 충성심을 끌어올리는 것. 그리고, 혹 있을지 모를 쥐새끼들을 솎아내는 것.
“군대가 건재하고 군심이 장군에게 머무는 한. 장군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판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비지.”
“그래. 그렇겠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왜 자신은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아드리안은 순간 자문했다.
머리 하나 달고 있는 건 똑같은데, 그 안에서 나오는 내용은 왜 이렇게나 다른 것일까. 타고난 재주가 다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머리를 쥐어짤 노력이 부족했나?
‘뭐. 아무려면 어떨까.’
시어문드를 보며 종종 하던 생각이 있다. 10년 뒤에도, 어쩌면 20년 뒤에도 저 녀석은 장군을 위해 일하고 있겠구나…하는.
군사를 부리는 재주만 탁월한 게 아니다. 시어문드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면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넌 나와는 달라.’
처음에는 조금 씁쓸했는데, 깔끔하게 인정을 하고 나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꽤 힘들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드리안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나는 하던대로 훈련이나 잘 시키면 되는 건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훈련 강도를 좀 낮추는 것이 어떤가? 자네가 한번 직접 훈련을 진행한 날에는 병사들이 반 죽어나간다고 이야기가 많아.”
“그거야 당연하지. 훈련 때 흘리는 땀이 전장에서 흘릴 피 한 방울이니까. 반만 죽는 쪽이 완전히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적당히 하라는 말이네. 적당히. 원망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야.”
“난 적당히라는 건 몰라. 원망을 사도 좋아. 원망은 내가 살 테니, 달래는 건 자네가 하게.”
아드리안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익숙한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오며가며 몇 번 얼굴을 봤던 시어문드의 부관.
“급보입니다!”
급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호흡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거칠게 튀어나온 목소리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
“적의 4군단이 동진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선발대를 보낸 정도가 아니라, 보로겐 콘실리에가 직접 군단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고 하니…….”
“보여주기는 아니라는 건가.”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시어문드는 그리 답하며 군터의 기색을 살폈다.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반응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그래도 이건 너무 빠릅니다.”
“문제가 되나?”
“놈들이 계속해서 동진한다면, 결국은 타라냐드에 닿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쪽 전선은 총독인 자이드라 멕시스가 직접 지휘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자이드라 멕시스는 몸은 전선에 있지만 신경은 테리브란에 반쯤, 아니 그 이상 가 있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보로겐 콘실리에가 이끄는 군대가 더해진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시어문드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현시점, 군터의 정치적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였으니까 말이다. 못해도 열흘에 한번은 그의 서신이 군터의 손에 쥐어지고 있으니, 그의 동향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적의 움직임이 너무 빠릅니다. 만약 자이드라 멕시스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면…….”
물론 보로겐 콘실리에의 군대가 정말 타라냐드까지 진군한다면 자이드라 멕시스도 원군을 부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타라냐드 근방의 군대는 모두 그의 지휘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원군은 다른 곳에서 불러야 한다는 말인데, 중앙조정의 실세들과 척을 지고 있는 그가 짧은 시간 내에 불러모을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될까.
“물론 조정에서도 타라냐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 원군을 보내긴 해야겠지만, 그 시기는 그들이 정할 테지요. 자이드라 멕시스가 낭패를 보거나, 어쩌면 아예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뭐, 정말 그렇게 한다면 감수해야 할 것이 많겠지만…그들은 감내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감내하겠지요. 그만큼 지금 테리브란에 있는 이들의 눈에 자이드라 멕시스는…….”
“눈엣가시겠지.”
군터는 생각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흔들리거나,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치적 동맹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잡은 손일 뿐이다. 없으면 귀찮아질지라도 거기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다.
“장군. 아무래도.”
“신경쓸 필요 없다.”
“예?”
시어문드가 당황한 기색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드문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눈에 보이게 당황하는 것도, 군터가 칼 같이 그의 조언을 잘라내는 것도.
“티브리악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이야기. 들었겠지?”
“예? 아, 예.”
바크렌으로 가문의 터를 옮긴 후로 줄곧 왕성하게 활동해오던 티브리악의 가주가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얼마전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는 제법 화제였다. 새롭게 가주가 된 이가 집안단속에 여념이 없다는 이야기가 뒤이어 들려오기도 했지만, 곧 전쟁 소식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티브리악의 새로운 가주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내려온다고 하더군. 때를 맞춘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타라냐드 쪽에도 힘이 되겠지.”
군터가 봉인을 뜯은지 얼마 되지 않은 서신을 시어문드에게 던졌다. 서신을 보기 전에, 시어문드는 그 봉인의 문장이 티브리악 가문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티브리악이라.’
집안 단속을 끝내자마자 다시 전장으로 향하는가. 젊은이의 패기라고 볼 수도, 무모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시어문드는 전자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티브리악의 젊은 가주는 전장에서 명성을 쌓은 군부 귀족이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무대로 전장을 택한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