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06화 (906/1,064)

906화

환야. 그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연무장 쪽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쪽은 조금 문제가 있군.’

반면에, 법구들은 달랐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법구들 가운데 손상된 것이 몇 개 있었다. 겉보기에는 다른 점 없이 멀쩡한 듯했으나 그 안에 깃든 기운이 소실되어 있었다. 마치 예리하게 갈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

나무로 된 새 형태의 법구. 본래 그것은 은은한 푸른색 안광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 외인이 접근할 경우 안광이 더욱 짙어지면서 닫힌 입을 열어 뾰족한 소리를 질러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푸르스름한 안광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꾹 다물린 입 역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기능을 상실한 법구들이 몇 있었다. 아마도 환야가 이 방향으로 침입한 모양이었다. 이런 법구들의 가격은 대부분 꽤 비싼 만큼, 상당한 손실이라면 손실이었다.

“장군. 어인 일이십니까?”

군터는 아드리안과 시어문드를 호출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곧바로 달려왔다. 그들은 군터가 이런 식으로 호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기에 군터가 자신들을 불렀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무슨 일일까.

시어문드와 아드리안은 군터의 집무실로 들어서기 전에 마주쳤고, 서로 짐작이 가는 바를 나누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창가 쪽을 보고 선 군터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올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

한편, 군터는 고민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좀처럼 고민을 하지 않게 됐다.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하게 변하니 어지간한 일로는 심사가 흔들리는 일이 없었고, 자연히 고민이라는 것도 대부분 사라졌다. 간혹 마음이 일면 그대로 행동해버리니,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제국의 군주가 자신을 은밀히 찾아온 것을 이들에게 말할지 말지를 두고 말이다.

아드리안. 그리고 시어문드.

유능한 수하들이다. 충성스럽기도 하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인재들인 만큼, 군터는 어지간하면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은밀한 이야기를 이들과 공유하고 나면, 그들을 잃을 위험이 더 커진다.

‘아니. 정말 그런가?’

문득 든 의문에, 군터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위험한 비밀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험으로 몰고 간다. 그의 생각에, 제국의 군주들이 관련된 비밀스러운 일들은 그 위험한 비밀에 속했다. 수백, 수천을 거느리는 장수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조금 전의 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수천의 병사가 상시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성벽을 넘고, 친위대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내성의 연무장까지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지 않았나. 환야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오늘 밤 아드리안과 시어문드는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자는 내게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아드리안과 시어문드에게 이번 일에 대해 알려준다고 해도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일반적인 제국민과는 다르니 군주라는 이름값에 지레 주눅이 들거나 겁을 집어먹지도 않을 테고.

‘설령 나중에 틀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그때 알게 되나 지금 알게 되나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라도 빨리 아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군터는 두 사람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본체가 아닌 인형 비슷한 것일지라도, 제국의 군주가 다녀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던 두 사람 중, 그나마 빨리 말문이 트인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에…그러니까, 그래서 그자가 왔다 간 이유가 뭡니까?”

“모른다.”

이미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도 다시 묻는 것을 보니, 아드리안도 꽤나 충격을 받긴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하겠지. 일반적인 제국민들이 갖는 신앙이나 숭배의 감정은 아니더라도, 역시 군주의 이름이 갖는 무게감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일 테니.

“…일전에, 장군께서 헤이모라에 가셨던 일이 있었지요. 그때 줄카와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그럴지도.”

시어문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뗐다.

“확인한다. 그건, 장군께서 초월자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요.”

“초월자?”

아드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시선이 아드리안과 군터를 몇 번이나 오가다가 종국에는 군터에게 머물렀다.

“초월자라.”

군터는 시어문드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을 수하의 입으로 들으니 새롭게 들렸다. 한편으로는 시어문드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만족스러웠다. 눈치가 빠른 것이 눈치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굳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줄카도 그렇고, 자콥 트라소프도 그렇고, 그들은 초월자라는 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듯했다. 자콥 트라소프의 경우에는 초월자라는 고상한 표현 대신 괴물이라 부르며 경계와 혐오를 드러내긴 했지만.

환야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시어문드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초월자라. 거창한 명칭이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단순히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고위 술사도 초월자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군터가 짤막하게 답하고 입을 다물자, 아드리안과 시어문드는 그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확히는, 아드리안이 시어문드를 쳐다보며 눈짓으로 다그쳤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이.

시어문드는 아드리안의 억지 아닌 억지에 응해주었다. 사실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장군. 장군께서 저희를 불러 지금처럼 말씀을 해주신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먼저 여쭙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진정 초월자이십니까?”

“줄카는 그렇게 말하더군. 황자도 비슷한 말을 했고.”

군터는 초월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다른 이들이 자신을 두고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며 그렇지 않을까 짐작했을 뿐.

시어문드는 그 정도로도 만족한 듯했다. 약간의 긴장이 감돌던 눈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렇군요. 사실 소관은 장군께서 여러 이권이라든지, 가문 내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군요. 장군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하찮게 보이셨던 겁니다. 그렇지요?”

처음이었다.

살라스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맹목적인 충성이란 말은 살라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믿음직스러웠지만, 거기까지였다. 살라스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문을 갖고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반면, 시어문드는 달랐다.

“초월자는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시선, 사고방식, 모든 것이 사람의 관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장군을 뵐 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들은 이야기가 틀렸거나, 장군께서 아직 완전한 초월자로 거듭나지 않으셨거나, 혹은…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속을 읽혔다기보다는,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간 해왔던, 아무도 알지 못한 그만의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받은 느낌.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이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머리로는 기뻐하려 하는데, 마음이 어째서 기뻐해야 하느냐 되묻는 것 같았다.

“모든 초월자가 군주와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군주들은 모두가 초월자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신 겁니다. 장군께서 초월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황자들은 물론이고, 제국 내 모든 유력자의 눈과 귀가 장군께 향할 겁니다.”

“그런 귀찮은 일은 원치 않는다.”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알려주십시오. 장군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지위, 권력, 이 모든 상황. 하나같이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 그리고 두 아이에게 힘을 마련해주고 떠나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그 외에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소 두루뭉술한 답에도 시어문드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군터는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말을 이해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 * *

‘흥미롭군.’

생각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환야는 꽤 오랫동안 그런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감출 필요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 그의 동지, 아니 동업자는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지금 그의 심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이 즐거운 비밀을 동업자와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떻게 됐나?]

[불을 지폈지. 무샤라트도 바보는 아니다. 녀석은 충분히 조급해져 있어. 다만 머리가 굳지 않았기에 확신을 가지려 했을 뿐.]

키리스트는 오늘도 미동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천진한 아이들이 그의 곁에서 웃고 떠들었다. 아무리 세상모르는 어린아이들일지라도 군주 둘과 같은 공간에서 태연할 수는 없다. 아이들의 얼굴에 티 없는 웃음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은 키리스트의 힘이 아이들의 정신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최면과도 같았다. 물론 평범한 최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차원의 힘이지만.

[조급해지는군. 세실도 더 기다리기 힘들다고 칭얼대고 있어.]

이번에는 세실인가. 어차피 의미도 없는 이름이지만, 참 다양하게도 나온다 싶었다. 물론 비웃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머지않았다.]

[그래야지. 아바시스 녀석들도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어.]

[조심성이 많은 녀석들이었으니까.]

제국이 흔들리고 있음을 아바시스가 모를 리 없다. 아직까지 녀석들이 잠잠한 것은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일 터.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야말로 제국이 가장 크게 흔들리는 순간일 것이다.

[덩치 녀석이 벼르고 있다. 지금까지는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 튀어나가겠지.]

[그쯤 되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그래. 그렇지.]

해맑게 웃던 아이들이 돌연 눈물을 흘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데, 그러면서도 환히 웃었다.

[더는 무리로군.]

안타까움. 슬픔.

[이제 그만 돌려보내야겠어. 내 욕심으로 아이들을 망가지게 둘 수는 없으니.]

키리스트가 유독 많은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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