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05화 (905/1,064)

905화

‘너무 대단한 분을 모시는 것도 고단한 일이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야 괜한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아무리 의욕적으로 나선들, 그 방향이 윗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방향을 잘못 잡은 노력이 헛수고에서 그치는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고, 윗사람의 신뢰를 잃는 것도 최악은 아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으니.’

시어문드는 아드리안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가 내려오는 명령만 따르는, 그런 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항상 생각했고, 움직이기 전에는 거기서 한 번 더 생각했다. 그의 행동은 늘 몇 번을 거듭한 고민의 결실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은 과장 조금 보태서 고문과 같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끔찍이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전장에 나온 이후로도 그는 줄곧 일을 해왔다. 일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했다. 아드리안은 물론이고, 살라스마저도 간혹 그를 보고 조금 여유를 가지라고 진지하게 충고할 정도였다. 그때마다 시어문드는 충분히 쉬어가며 하고 있다 답하곤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여유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같은 일을 하고도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휴식도 부족하게 느껴지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좀 조용해졌나?”

“예. 많이 나아졌습니다.”

본래 군대의 뒤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하는 군상들은 사전에 정해진다. 그런데 이전 전투 때 골고스가 반쯤 무너지면서 성내에 머물던 상인들이 상당수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물자도 불길에 휩쓸리거나 난리통에 소실된 것이 적지 않았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노리고 보부상들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피 냄새보다도 진한 것이 돈 냄새라고 하지 않던가. 뜨내기 장사치들도 그런 냄새는 놓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뜨내기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든 만큼, 검문부터 시작해서 한동안 온갖 자잘하고 시끄러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상인들끼리 시비가 붙거나, 몇몇 군기가 빠진 병사들이 상인들을 갈취하거나 그들로부터 뒷돈을 받고 편의를 봐주는 등. 눈에 불을 켠 감찰대의 활약이 이어질수록 성내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갔다.

“잘 단속해라. 괜한 위화감을 조성하는 일이 없도록.”

“예.”

시어문드는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를 용인했다. 아니,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시끄러워지더라도 한 번쯤은 이 지저분한 성을 싹 정리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럼 이제 다음은…….’

머리가 복잡할 때는 일거리에 파묻히는 것이 최선이다. 할 일을 찾고, 거기에 신경을 쏟다 보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자리는 자연히 줄어들기 마련이다.

늘 그래왔듯, 시어문드는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 * *

군터의 침소를 비롯해 집무실, 그리고 그가 자주 찾는 연무장까지. 수만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골고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친위대 병사들이 밤낮으로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는 것은 물론, 적잖은 법구들이 허가를 받지 않은 자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군터는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수하들이 절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적막한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무실에 앉아 상념에 잠기거나 연무장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 보고를 받을 때를 제외하면 그의 시간은 대부분 이 두 곳에서 쓰였다.

쿵!

발이 연무장 바닥을 짚을 때마다 둔중한 충격이 연무장을 휩쓸었다. 물리적인 충격은 아니었기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기감이 발달한 이라면 가슴이 철렁이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으리라.

한 번씩 발이 움직일 때마다 창이 허공을 여러 갈래로 찢었다.

베고, 찌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동작.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살기도, 투기도 없이 폭풍처럼 허공을 채우는 검은 선의 향연. 그것이 이어질수록 어지간한 일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군터조차 조금씩 숨이 거칠어졌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또렷했으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호소했다.

그 호소가 거의 절정에 다다를 즈음. 군터는 움직임을 멈추고 창을 아래로 내렸다.

떨리는 팔과 다리 때문이 아니었다. 들릴 리 없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

그의 시선이 연무장 구석을 향했다. 연무장 곳곳에 놓인 횃불은 어둠을 몰아냈지만, 그 빛이 미치지 않는 곳도 있었다. 군터의 시선은 유독 어두워 보이는 한 곳을 향했다.

“누구냐.”

기척을 느끼지는 못했다. 단지 희미한 이질감을 감지했을 뿐.

만약 다른 이가 이런 느낌을 받았다면 착각이겠거니 하며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군터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착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초월적인 감각은 아예 감지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착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어둠 속에는 무언가 있다. 그의 감각마저 온전히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무언가가.

그런 그의 확신을 증명하듯,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가기 무섭게 어둠이 꿈틀거렸다. 정확히 그의 시선이 닿아 있던 곳이었다.

[틀림없군.]

머릿속.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어딘가에서 울리는 소리. 군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솔직한 감정의 요동. 군터는 이런 자연스러운 반응이 언제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들은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며 일어난 무언가는 빠르게 형체를 갖췄다. 그 기이한 광경에서는 아무런 부자연스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환영이나 눈속임 따위가 아니라는 뜻.

[그런가.]

호리호리한 듯한 체형의 사내. ‘듯한’이라는 표현을 덧붙인 것은 어둠에 휩싸인 그의 체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어느 부분은 뚜렷했고, 어느 부분은 흐릿했으며, 또 어느 부분은 투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투명한 부분은 짙은 어둠이 자리를 대신했는데, 흡사 신체 일부를 어둠에 물어뜯긴 것처럼 보였다.

[넌 누구지?]

“질문이 잘못된 것 아닌가?”

흥미. 호기심.

들려오는 소리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군터는 그 점이 더 짜증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흥미로운 구경거리 바라보듯 쳐다보는 시선이.

저자의 정체는 짐작이 갔다. 줄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음침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자.

[그럼 어떤 질문을 해야 하지?]

말수가 적다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그 또한 불청객이 할 말은 아니지.”

[우리는 구애받지 않으며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너 역시 그렇지 않은가?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건가?]

쿠엘단과 줄카를 봤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 지금 다시 들었다. 이들은 꽤나 제멋대로다. 상식, 격식 등,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이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군터 자신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존중의 결여. 그리고 경시였다. 오만함과는 다르다. 개미들에게도 개미 나름의 규율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그런 것을 신경 쓰겠는가.

[그렇군. 얼마 되지 않은 건가.]

독백이라고 해야 할까. 앞에 누가 있든 말든,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문제는 이쪽으로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그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점이다.

“혼자 주절거리는 건 그쯤 하는 것이 어떤가. 환야. 제국의 군주께서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지?”

아는 것은 이름. 그리고 줄카가 무심하게 흘렸던 몇 마디 이야기뿐.

제국에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는 존재를 앞에 두고서도 군터는 약간의 경계심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확인하고 싶었다.]

흥미. 처음보다 조금 옅어졌다. 상대는 이미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불쾌한 시선이 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바깥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어떻게 했지?”

군터는 상대가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을 상기했다. 밖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경계를 게을리했을 리는 없다.

[병사들을 걱정하는 건가? 목소리로는 확인할 수 없지. 불편하군. 어째서 목소리를 쓰는 거지?]

“묻는 말에나 답하지.”

병사들에 관한 소리가 들려왔을 때, 거기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병사들을 죽이고 왔는지, 아니면 그들 모르게 숨어들어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호출하거나, 직접 가서 확인하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을 신경 쓰는 건가? 정말 그런 모양이군.]

환야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군터가 고쳐 쥔 창을 본 것이다. 금방이라도 내지를 것처럼 늘어뜨려 쥔 창을.

[아직 완전하지 않군. 그래서 자콥을 따르는 건가?]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군터는 또 한 번 의미 없는 독백이 머리를 파고든 순간 망설임 없이 달려나갔다. 한걸음에 거리를 좁혔고, 다음 순간 창을 내질렀다. 발끝에서부터 창끝까지, 창을 쥔 그는 한 대의 화살 같았다.

챙!

막혔다. 그런데 충격이 생각보다 약했다. 창의 방향도 거의 틀어지지 않았다. 상대는 어느새 검은 안개처럼 변해 흩어지고 있었다. 그 흐릿한 어둠에서 상대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군터가 재차 창을 휘둘렀다. 긴 선을 그리는 창날에 섬뜩한 기운이 어렸다. 그 농밀한 죽음의 기운을 느꼈는지, 환야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그의 몸 일부는 어둠에 묻힌 듯 흐릿했다.

[거칠군.]

먼저 공격한 것은 군터였다. 그러나 위기감에 먼저 몸을 튼 것도 그였다. 환야의 손에 들린 검 한 자루가 움직임과 동시였다.

먼저 움직인 창과 뒤늦게 움직인 검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금속성은 울리지 않았다. 둘은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부딪친 채 그대로 멈췄다. 동시에 기이한 파장이 맞닿은 창과 검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심령을 곤두서게 하는 서늘한 감각. 한기가 피부를 뚫고 피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아찔함.

군터는 더욱 힘을 끌어올리며 상대를 밀어붙였다. 조용한 대치 속에서 양측의 힘이 팽팽하게 맞섰으나, 군터가 전력으로 밀어붙이자 그 기묘한 균형은 금세 일방적으로 기울었다.

[아쉽군.]

검이 햇살을 맞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군터의 창끝이 환야의 목을 그었을 때. 환야는 그의 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성의 무엇도 건드리지 않았다. 다음에 직접 보게 되면 그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환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은밀하면서도 무거운 존재감 역시도.

‘술법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뭐가 됐든, 방금까지 이곳에 있었던 것이 환야의 본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쿠엘단이 그랬던 것처럼, 인형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인형이라고 하기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 확실하긴 했지만.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줄카를 통해 알았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줄카는 키리스트와 아간투스베록이라는 자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냈으나 환야를 비롯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별 감정을 보이지 않았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했지.’

뭘 확인한다는 것일까.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볼일이 있다면 다시 찾아오겠지.’

병사들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일단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던 환야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군터는 아직까지도 영육에 남은 서늘함을 털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