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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04화 (904/1,064)

904화

‘흐음.’

짧은 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시어문드는 생각에 잠겼다.

군터의 반응은 짐작했대로였다. 그가 이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겠군.’

애초에 골고스를 지키기 위해 온 군대다. 공격해온 적을 물리쳤고, 약간의 사고가 일어나긴 했어도 어쨌거나 지금도 잘 지키고 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충분한 전공을, 아니 대공을 세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전황이 녹록치 않다는 거다. 국지적인 부분이 아니라 전국(戰局)을 말함이다.

매일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식들이 들어온다. 하나같이 전쟁이 격화되어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들뿐이었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형제들을 베어 지위를 공고히 한 지금이 가장 강하게 행동할 수 있는 때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미래는 숙부를 멸하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판세를 바꿔놓을 수 있을 만큼 크게 피해를 입혀야만 보장된다.

‘이 공세는 적어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야.’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보면 아군이 우세하다. 본래 공격하는 쪽과 지키는 쪽은 지키는 쪽이 유리한 것이 상식이고, 시간에 쫓기는 적은 여러모로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군은 분열되어 있는 반면, 적은 단결되어 있다. 비록 그 단결이 일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차이는 매우 크다. 당장 전선에 나와 있는, 자이드라 멕시스를 위시한 귀족들은 중앙 조정의 지원에 불만을 토로하며 여차하면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자콥 트라소프가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상황이 파국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 불편한 갈등이 잘 봉합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군터의 입지는 상당히 미묘했다. 어찌 보면 위태롭다고 할 수도 있다. 큰 공을 세웠고, 군대의 손실도 그리 크지 않다. 이미 몫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그에게 다시 출혈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값이 만만치 않은 것도 당연히 한 몫 할 것이고.

문제는 바로 그점이다. 지금 황제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 황자, 황손들은 황제가 아니다. 그들은 황제처럼 손쉽게 휘하 귀족들을 휘어잡지 못한다. 처해있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누군가 황위에 오르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위에 오르고 황제로 불리게 된다 해도, 그들은 전대 황제처럼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자콥 트라소프는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이곳저곳에 자신의 눈을 깔아둔 것일 터.

이곳 골고스에도, 판니른의 군대에도 황자의 눈이 존재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숨죽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존재하리라 확신하고 찾을 때까지 살폈기에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군주가 군대를 거느린 수하에게 감시의 눈을 붙여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느 순간 적을 향하던 창끝이 돌아설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겉으로는 대범한 척, 신뢰하는 척해도 뒤로는 끝없이 감시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복잡하겠지.’

제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전투가 한창이던 와중에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제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시어문드도 그러기를 조언했다. 감시자를 제거한다면 황자가 더 의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감시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마음껏 감시하게 하는 것이 황자를 안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실제로도 그 방법은 지금까지 유효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장군께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은 사람의 본성 중 하나다. 대개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두려움과 의심도 커지는 법이고, 시어문드는 황자도 예외가 아니리라 생각했다.

‘참. 이런 고민을 해야 하다니.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대공을 세운 것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손실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군의 사기는 치솟았고, 사령관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도 하늘을 찔렀다. 판니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병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솔롬의 병사들은 크렘보르의 이름 아래 굳게 단결했지만, 나머지는 소속에 따라 저들끼리 뭉쳐 있었다.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 역시 편차가 컸다.

하지만 전투를 거듭하고, 승리를 거듭할수록 병사들 사이의 벽은 얇아졌다.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 역시 돌처럼 단단해졌다. 매 전투마다 가장 앞에 서서 싸우며 승리를 이끄는 지휘관을 싫어할 병사는 없었다. 거기에 군터 크렘보르는 휘하 장졸들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매우 후한 편이었다. 대장인 본인이 욕심을 부리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휘하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살라스와 시어문드 등도 욕심이 많은 이들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능력이 있으며 수하들을 잘 챙기는 장군. 그런 상관에게 충성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크렘보르의 깃발을 든 판니른의 군대는 이제 군터 크렘보르에게 충성을 바쳤다. 따라야 하기에 따르는 것과 따르고 싶어 따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는 따라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으나,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처럼 쉽게 방향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튼튼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명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적에 대해 알기 전에 아군을 알려고 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장군께서 장담하시는 이유는 모르지만, 황자 역시 사람이다.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겠지.’

어떤 이유로든 황자가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이다. 그리고 시어문드는 지금이 아니라도 머지않아 황자가 의심을 품으리라 확신했다. 휘하에 수만 대군을, 그것도 지휘관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거느린 장수를 의심하지 않을 군주는 드물다. 하물며 의심을 부추길 자들이 적지 않은 마당에야 더욱 그럴 것이다.

뿐만 아니다. 시기도 좋지 않다. 바로 얼마 전에, 그리고 지금도 자이드라 멕시스가 조정에 한바탕 폭풍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그것이 황자와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전쟁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황자로서는 분명 적잖이 거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장군은 자이드라 멕시스와 상황이 달라.’

군터 크렘보르는 황자의 총신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다. 황자의 믿음과 지원이 아니었다면 크렘보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빠르게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황자는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면 지원은 끊길 것이고, 도리어 이런저런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하겠지.

‘역시 좋지 않다. 황자의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움직여주는 것이 좋을 것인데…….’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일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자에게 보고하고, 그면서 한편 군을 움직이는 시늉만 해줘도 황자는 어느 정도 괜찮은 인상을 받을 터였다.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의 상관은 그런 시늉마저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으려 했다.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는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무관심하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렇다. 무심하다.

‘거 참. 받들어모시기 힘든 주인이로군.’

언젠가부터 시작된 변화. 그것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간혹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두렵기만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살라스, 모페이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직접적인 답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단서는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시어문드는 그의 상관이 왜 점점 더 변해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초월.

그것 밖에 없다.

‘초월. 초월이라.’

제국 내에서 황제는 물론이고, 군주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신성시된다. 그들은 숭배의 대상이지 연구나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런 시도를 하는 이들은 교단에 의해 모두 신성모독으로 처벌받는다. 그렇기에 제국 내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초월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제국 내에서는 말이다.

시어문드가 초월자라는 명칭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국외의 상인들과 접촉하면서였다. 제국 내에서는 초월자에 대한 정보가 금기로 정해져 있지만, 제국 밖에서는 달랐다. 물론 국외라 해도 쉽게 접하기 힘든 비밀스러운 지식이기는 했지만, 시어문드는 어떻게든 그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시어문드는 줄곧 신이라 불리며 숭배받는 황제와 군주들에 대해 적잖은 의문을 품어왔다. 그건 그가 상대적으로 황실과 교단의 영향력이 적게 미치는 벽지에서 나고 자랐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초월자가 신의 축복 없이도 탄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니.’

교단의 성서에는 원신의 사도로서 세상에 내려온 황제가 직접 군주들에게 축복을 내려 힘을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교단의 성서를 맹신하지 못한다면 국외의 지식 역시 마냥 믿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시어문드는 의심을 남겨두는 정도로만 넘어갔었다. 그의 상관이 점점 낯설게 변해간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살라스와 모페이브에게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찌 됐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이런 변화가 언제까지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고 끝이 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카라누르에 새로운 군주가 탄생하는 것인가.’

기대? 흥분? 두려움?

무슨 말로도 이 묘한 기분을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으리라.

‘세상사에 무심해진다. 초월자가 되면서 겪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

시어문드는 문득, 일전에 토어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던 것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리스 공자에게 힘을 쏟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토어릭은 어떠한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때는 그런 반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토어릭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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