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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03화 (903/1,064)

903화

“정말 그렇습니까?”

“말도 마쇼. 내가 아는 놈은 외상 한번 잘못 달았다가 아주 박살이 났다니까.”

불만 어린 투로 말하는 병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졌음을 알아차리고는 찔끔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병사는 처음보다도 더 목소리를 줄였다.

“절대 민간에 피해 비슷한 것도 입히면 안 된다는 거지.”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군요.”

“뭐…맞아. 훌륭하신 분이지.”

병사의 대꾸는 조금 떨떠름했다.

“그런데 너무 엄하신 면이 없지 않아 있지. 그대들 같은 장사치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우리는 가끔씩 숨이 막힌다고.”

“아아.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인상 좋은 상인이 눈치껏 잔을 채웠다. 그러자 병사가 입맛을 다시며 잔에 손을 뻗었다.

‘감찰대는 아닌 것 같은데…….’

요즈음 감찰대 녀석들이 성내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먼젓번 전투 때 암살자 놈들이 크게 설쳐댔던 만큼, 아직도 성내에서 위장하고 있을지 모를 첩자와 암살자 놈들을 색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감찰대 녀석들이 잡는 게 간첩이나 암살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시장 상인들에게 수고비 몇 푼 챙기던 녀석 몇몇이 닷새간 철창신세를 졌다는 소문이 조용히 퍼져서 벌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만큼, 붙임성 좋게 다가와 굽실거리는 이 상인 녀석도 처음에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는 것 하며, 기껏 물어본다는 것이 별 대수롭지 않은 성내 사정들 같은 것뿐이라 처음의 경계심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나저나 대단한 결심을 하셨소? 아무리 혹했다고 해도 고향을 떠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인데.”

“하아. 말씀하신 것처럼 쉽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고향에 남는다고 해도 암담할 뿐이지 않습니까.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전시 징발이니 뭐니 하면서 싹 쓸어가면…아이고! 제가 무슨 말을. 무지렁이 놈이 말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쇼.”

상인이 기겁하며 사과하자 병사는 겸연쩍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심술궂은 녀석들은 이럴 때 목소리를 내리깔면서 몇 푼이라도 뜯어내려 할 테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이야 그럴듯하게 무장하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한때는 그도 농사꾼의 아들로서 농사를 지었었다. 세월이 제법 흐르고, 그때의 기억도 다소 흐릿해졌지만 그래도 먹고 살아보겠다고 고향까지 떠나온 전직 농부이자 초짜 상인에게 양아치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아니 뭐, 그렇게 죽을죄를 진 것처럼 떨 것 없소.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음. 그래도 입조심은 하시오. 성내에는 듣는 귀가 많거든. 당신 같은 뜨내기 장사치들은 특히 독해. 시장바닥에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밀고를 한다니까?”

“어이구. 예.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나리. 조심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별 것 없는 주제로 이야기가 오갔다. 병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불그스름해질 즈음, 상인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나섰다.

허름한 주점을 나선 그는 대로변으로 향했다. 민간인들 가운데 무장한 병사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는 병사들과 가까워질 때마다 몸을 움츠렸다. 다소 과한 반응이었지만 누구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런 반응은 외지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것이었다. 돈 좀 만져보겠다고 흘러들어온 떠돌이, 뜨내기들이 흉흉한 병사들을 보고 지레 겁을 집어먹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후우.”

그는 모닥불의 온기가 감돌던 주점을 나와서인지, 유난히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몸을 웅크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툭!

“아이고. 죄송…….”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급하게 걷다 보니 앞을 잘 못 살폈던가. 그는 어깨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에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다 이어지기도 전에, 어깨에 느껴졌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격통이 복부에서 느껴졌다.

“죄송할 것 없다. 쥐새끼.”

음산하고 잔혹한 목소리.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 * *

“엉?”

“여기저기 기웃대던 쥐새끼를 잡았습니다.”

아드리안은 수하의 자신감에 찬 보고에도 인상부터 썼다.

“확실한 거냐? 또 엉뚱한 놈을 잡아다가 호들갑 떠는 건 아니냔 말이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성에 들어오고 열흘이 넘도록 발품만 팔아댄 놈입니다. 아닌 척하긴 했으나 은근슬쩍 캐고 다닌 정황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조된 신분임을 확인까지 했습니다.”

“위조된 신분이라고?”

순간 의심했던 아드리안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메티 공의 유산이 또 한 건 했군.’

야스메티가 생전에 강하게 밀어붙였던 정보조직의 창설 및 정보원 육성. 관심이 없어 대강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은 것은 살라스의 부재로 인해 그의 업무를 대신 떠맡은 후였다.

야스메티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이제 저마다 싹을 틔워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그 쥐새끼의 조사에도 그들이 활약했으리라.

“예. 보고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의아해하는 수하를 보며, 아드리안은 이마를 짚었다.

그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 아마 그 보고라는 것도 여기 어딘가에 잠들어 있으리라.

‘빌어먹을. 역시 어떻게든 거절했어야 했는데.’

머리와 무거운 엉덩이가 필요한 이런 일에는 시어문드가 제격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장군과 함께 조금 더 정치적인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 일 대신 살라스의 업무를 대리하겠다고 자처한 것은 아드리안 자신이었다. 그러니 지금 와서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아. 그래서 뭐 나온 거라도 있나?”

“가볍게 건드려봤습니다만, 아직 입을 닫고 있습니다.”

“흐음. 확실한 거겠지?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이번에도 엉뚱한 녀석을 잡아들인 거라면 곤란해.”

“확실합니다.”

“그래. 며칠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이전의 전투에서 성의 사령관이 암살자의 칼에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연히 경계가 삼엄해질 수밖에 없다. 성내 백성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병사들이 거리에서 눈을 부라리고 다녀도 알아서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암살자, 첩자를 색출한다는 명목하에 감찰대원들이 여기저기를 찌르고 다니자 숨죽이던 백성들도 점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불만이었다. 오늘은 내 이웃, 혹은 얼굴 몇 번 본 남이 잡혀들어갔지만, 다음이 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결백은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감찰대, 나아가 군대의 검문 수색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때 입을 막는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믿어주십시오.”

“물론이지. 반드시 달라야 할 것이야.”

첩자가 확실하다며 잡아들였던 놈이 알고 보니 정말 가족과 함께 피난 온 피난민이었다. 사흘 뒤에 뒤늦게 도착한 가족들이 아니었다면 놈은 지하 감옥에서 그대로 소리소문없이 숨이 멎었을 것이다.

돈을 들여서 불안하게 처리하느니, 차라리 피 좀 흘리고 깔끔하게 입을 막자는 의견을 뭉개느라 몇 번이나 목 아프게 고함을 질러야 했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 나간 놈들 같으니.’

일부러 그런 놈들만 선별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감찰대 놈들은 제정신인 놈을 찾기가 힘들다. 사실 아직 한 놈도 제정신인 놈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에 확신을 미루고 있을 뿐.

이 의심 많고 사나운 놈들은 일단 물어뜯고 본다. 이빨 사이에 들어온 것이 제대로 된 고기인지, 퍽퍽한 나무껍질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틀 주지. 그 안에 끝내도록.”

“충분합니다.”

아드리안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그런데 하루하고 한나절 후.

“쥐새끼가 실토했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적의 첩자였습니다.”

“…그래?”

반신반의했었다. 솔직히 지금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4군단 소속이라더군요. 사령관 직속의 첩보부에…….”

“4군단?”

귀에 익었다. 아드리안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귀에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제법 큼지막한 소식. 그것도 최근에 들려온 소식에 이 4군단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 보로겐…콘실리에였던가?’

적의 4군단. 그 4군단의 군단장 보로겐 콘실리에. 그에 맞서던 아군이 크게 패하여 전선이 뒤로 밀렸다는 이야기를 바로 얼마 전에 들었다. 그런데 그 4군단에서 여기까지 첩자를 보냈다고?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군단 내부의 정보까지 불더군요. 놈이 분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던 몇몇 정보와 일치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건 더 이상 그의 선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즉시 군터에게 가 4군단의 첩자에 대해 보고했다. 마침 자리에 시어문드도 있었기에 바로 그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4군단이라.”

“무슨 뜻이겠나?”

군터는 침묵했고, 시어문드는 알 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4군단을 되뇌었다. 아드리안은 잠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넌지시 물었다.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두 가지 정도를 의심해볼 수 있겠지.”

“두 가지?”

“첫째는, 적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적어도 군단 단위는 그런 것으로 보이네. 저 북쪽에서 이곳까지 첩자를 파견했다는 건 이곳에 있는 아군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뜻 아니겠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둘째는?”

“저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고, 그 꿍꿍이에 우리가 걸림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지. 그러니 우리의 정보와 동향을 살피기 위해 첩자를 보낸 것이 아니겠나.”

“꿍꿍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네. 남진. 혹은 동진.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동진이겠지.”

군터가 입을 열었다. 시어문드가 군터 쪽을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기껏 전선을 밀어놓고 방향을 튼다는 건 아무래도 가능성이 떨어지지요.”

어디까지나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놈이 정말 4군단 소속일 것을 전제로 한 추측이다. 하지만 시어문드는 의심하지 않았다.

‘단순히 병력만 잃은 것이 아니라 일선장교들이 대거 암살당했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징집병을 긁어모으더라도 제대로 싸우지 못할 거라는 거고, 적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기세를 몰아 더 밀고 들어가려 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을 정리한 시어문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마음을 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응할지 대응하지 않을지 말인가?”

“예. 보로겐 콘실리에가 정말 동진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라면 곧 움직일 겁니다. 이미 한번 크게 패하고 지휘부까지 반파된 군대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 리 없지요. 다시 한번 크게 밀릴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개입하지 않겠다.”

즉답이었다. 시어문드는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숙였다.

“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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