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02화 (902/1,064)

902화

시온 포트락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휘관 막사로 향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된 전투는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됐다. 필승을 장담했으나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명예로운 싸움은 아니었지만.’

철없던 예전이었다면 이런 식의 승리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승리든, 승리는 승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승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왔군.”

“송구합니다. 소장이 늦었군요.”

“아니. 늦은 건 아니네. 내가 너무 빨리 왔을 뿐이지.”

4군단의 대장, 보로겐 콘실리에가 그를 맞았다. 늘 부지런한 사내다. 직접 칼을 들고 싸운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전투의 피로가 상당히 버거웠을 텐데도 가장 먼저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근면함은 배워야 한다.

“적은 강을 건넜다. 자리를 지켜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크게 물러날 줄은 예상했지만, 강까지 건넜나. 보로겐 콘실리에의 말마따나, 더 버텨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병력의 반 이상을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전장은 고집과 미련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었으니, 남아서 버텨 본들 남은 병력마저 갈릴 뿐이다.

“동진하시겠습니까?”

“글쎄.”

보로겐 콘실리에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자, 아니 황손은 각 군단장에게 어느 정도 자율적인 지휘권을 부여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에서 늘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군단장들이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조치는 장수들이 황손에 대해 품었던,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을 다소 해소해주었다.

“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여력은 충분합니다.”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강을 건너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네.”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겁쟁이가 아니다. 그는 여기서 동진을 할 경우, 어쩔 수 없이 길어지는 보급선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지금은 적이 물러갔다지만, 아직 주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보급선이 위협받을 수 있다. 강까지 건너간 상태에서 보급선이 위협받거나, 아예 끊겨버린다면…그때는 곤란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심각한 상황이 펼쳐질 터.

두 가지 중 하나다.

고삐를 조이느냐, 아니면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나아가느냐.

“남쪽의 상황은 썩 좋지 않은 것 같더군.”

“골고스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보조를 맞춰 움직여야 할 아군이 끝내 골고스를 넘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 과정에서 루벤 카드모스가 전사하기까지 했다. 경험 많은 노장이 전투 중에 목이 날아간 것이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곧 착오가 아니었음을, 아군이 정말로 골고스를 넘지 못하고 패퇴했음을 알게 됐다.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절대라는 것은 없지만, 설마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군터 크렘보르. 예전에도 몇 번 그 이름을 듣긴 했었지. 만만치 않은 놈이야. 지금은 잠잠하게 있는 모양이지만, 놈이 북상한다면 상황은 또 변하게 될 테지.”

일군을 이끄는 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걱정이다. 그러나 시온 포트락은 그의 우려를 이해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골고스의 중요성을 잘 아는 만큼, 그쪽도 신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음.”

“우리가 차라리 기세를 몰아 빠르게 치고 들어간다면 오히려 적을 압박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날뛰는 만큼 후방의 아군에게는 여력이 생기겠지요. 그들이 뒤를 받쳐준다면 설령 보급이 다소 위태로워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여차하면 현지조달을 해도 되겠지요.”

“승부를 걸어보자는 말인가.”

“기세야말로 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 배웠습니다.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대승으로 기세가 오른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보로겐 콘실리에가 시온 포트락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와 함께 한 수개월 간 쭉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이 젊은이가 포트락의 이름을 잇기에 부족함 없는 사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단호한 모습은 그 후한 평가를 또 한 번 수정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평범과 비범을 나누는 벽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중요한 순간에 번뜩이는 기지. 혹은 이런 과감함. 이런 특별함이야말로 특별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확실히, 현재 아군의 기세는 상당하다.’

무슨 일이든 다소 신중하게 보고 판단하는 그의 기준에서 상당한 것이지, 사실 현재 군의 사기는 최고 수준이었다. 승리는 지휘관뿐 아니라 병사들의 가슴 속에도 불을 지피는 최고의 장작이다.

한번 일어난 불길은 아직도 기세를 잃지 않고 크게 일렁이고 있다.

“한번 고려해보도록 하지.”

“예.”

마음이 동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수는 없다. 과감하게 나가더라도 일단 최소한의 고려는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평생 이렇게 해왔으니, 아무리 젊은이의 패기에 감화됐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다.

“이런. 제가 늦은 모양이군요.”

그때, 한 사내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가, 발걸음 소리가 들린 순간 시온 포트락의 표정이 굳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보로겐 콘실리에는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아직 젊군.’

타고난 기질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경험의 부족은 세월이 채워줄 수 있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이 전도유망한 젊은이의 미래를 상상하며 고개를 돌렸다.

음침한 인상의, 호리호리한 사내가 군례를 취했다.

“임모락 공. 늦지 않았소. 우리가 먼저 와 있었을 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호리호리하지만 절대 약해 보이지 않는다. 무술을 일정 수준 이상 수련한, 그래서 보는 눈이 있는 이들이 본다면 저 몸이 고도로 단련되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자는 군인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처음 봤더라도 한눈에 알았을 것이다. 감춘다고 감췄지만 그래도 은연중 피어오르는 이 음험함은, 평범한 군인은 가지기 힘든 것이다.

그림자 검사단.

군주 키리스트 휘하에 있는 어둠 속의 검이다. 혹자는 이들을 일컬어 제국의 그림자라고 하기도 했다.

이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저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그대들의 공이 컸소.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승리할 수는 없었겠지.”

겸양도, 자랑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

“짐작했겠지만,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야 할 것 같소. 포트락 장군은 동진을 주장했지. 아군의 기세가 올랐으니 이 흐름을 놓치지 말자는 거요.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고 생각하오만, 공의 생각은 어떻소?”

“저는 군인이 아닙니다. 전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지요. 두 분께서 논의하시고, 제게는 결과만 알려주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으음. 그렇소?”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래도 의견을 물은 것은 존중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아는 거라곤 임모락이라는 이름뿐이고, 귀족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대는 그림자 검사단의 백부장이었다. 사실 백부장이라는 지위가 그림자 검사단 내에서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곳에 파견된 그림자 검사들의 수장이니 존중해주는 것이 옳다. 게다가, 그와 그의 수하들은 먼젓번 전투에서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럼 그리 하리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대들의 지속적인 협력을 기대해도 되겠소?”

“제가 받은 명령은 장군께 최대한 협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든든하군.”

시온 포트락의 표정이 다시 한번 살짝 굳었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이번에도 모른 척 넘겼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그 간극을 좁히기는 쉽지 않다. 젊을수록 더 그렇지만, 결국 경험이 해결해줄 것이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카드모스 장군 쪽에도 그대들이 합류해 있었소?”

표정 없는 인형 같았던 임모락의 얼굴에 처음으로 반응이 일었다.

“다른 곳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짐작만이라도 좋소.”

“아마…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암살자들의 칼은 도시의 그늘 속에서나 유용하다. 일종의 상식, 혹은 편견. 보로겐 콘실리에도 그런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칼이 전장에서도 이토록 유용하리라고는, 며칠 전의 전투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암살자, 아니 그림자 검사단의 칼은 전장에서도 유용하다. 유용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카드모스 장군 쪽에도 있었지만, 실패했다는 뜻인가.’

어찌 보면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전장에서의 암살이 쉬운 것이었다면 예전부터 수백의 암살자들이 전장에서 날뛰지 않았겠나. 그러지 않았던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진인가.’

임모락과 그의 수하들에게 의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세가 잔뜩 오른 군대. 거기에 믿음직한 조력자들과 함께라면 위험한 모험도 충분히 할 만하지 않을까?

‘바보가 아니라면 대처는 하겠지만.’

이미 적도 소식을 접했을 터. 게다가 동쪽에는 그 자이드라 멕시스가 버티고 있다. 바로 그와 맞닥뜨리지는 않겠지만, 동진한다면 이제부터는 그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는 셈.

‘쉽지 않겠지.’

난관을 예상하면서도 조용히 가슴이 뛰는 까닭은, 그 역시 군인이며 무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 속에 다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혈기라는 것이, 그의 안에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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