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01화 (901/1,064)

901화

실비아는 내심 조소했다.

자신에게 다가와 은밀한 제안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이들이 호의를 품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다 각자의 계산대로 움직일 뿐. 그러니 이들 역시 자신을 통해 무언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접근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니 그것을 탓하거나 불쾌해할 이유는 없다. 다만, 속에 품은 생각이 그 이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네.’

이들이 자신에게 줄을 대는 이유가 뭘까. 크렘보르의 직계라고는 해도 이미 후계자인 오라비와 대립한다는 이야기가 퍼진 상황이다. 위험부담을 지고서라도 큰 기회를 노린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순진한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를 봤을까?

십중팔구, 이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크렘보르의 분열일 것이다. 단둘뿐인 직계가 서로 물고 뜯으면서 상처 입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크렘보르의 아성에 균열을 내기를 바라는 것일 터.

그 가증스러운 속내를 짐작하기에 실비아는 겉으로만 만족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고 가문에 대한 애정이 왜 없겠는가. 오라비와 사이가 나쁜 것을 떠나, 부친이 일군 가업이다.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지닌 장본인으로서 소속감 역시 느꼈다. 가문을 노리는 승냥이 같은 것들을 보면 적의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생각을 할 자격도 없어.’

알고 있다. 다 알면서도 이 승냥이들을 끌어들였다.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시뻘건 고깃덩이를 흔들어 대면서 말이다.

“후우.”

승냥이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돌아간 후. 실비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십니까?”

“후회?”

카인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긍정했다.

“그런 것 같군요. 네.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좋군요.”

“음?”

실비아가 카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후회하시겠지만, 잠시 후에는 마음이 달라지시겠지요. 또 내일 즈음에는 후회하실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아마도 계속 흔들리시겠지요.”

“그게 좋은 건가요?”

“괴물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실비아가 피식 웃었다.

“그럼, 공이 보기에 내 오라버니는 괴물인가요?”

“글쎄요. 보리스 공자의 속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위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을 테지만, 카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설령 그 위로라는 것이 같잖은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라도.

“자잘한 자들은 이제 다 끝난 거겠죠.”

“곧 알게 되겠지요.”

거물들은 대체로 엉덩이가 무겁다. 거물이기에 엉덩이가 무거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신중하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총독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분명 관심을 보일 겁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 이미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묻고 답했지만, 실비아는 이번에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인의 뒤에 숨어 야심 없는 척하지만, 모두 위장에 불과합니다. 정말 야심이 없는 자였다면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신중한 자일뿐, 결코 욕심이 없거나 겁만 많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십시오. 그는 조용히, 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왔습니다. 주인의 뜻을 대리하는 것처럼 행세해왔지만…이제 알만한 이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카인이 힘 있는 목소리로 장담했다.

그러나 생일 당일이 되기까지, 총독 운바소르 아실이 실비아를 찾는 일은 없었다. 사람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카인이나 실비아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신중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 * *

총독의 생일.

관저에서부터 야외에 마련한 연회장까지, 무장한 병사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격조했구려.”

참석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 면면이 화려했다. 대부분 귀족이었으며, 판니른에서 한 번 정도는 이름을 들어봤을 가문의 일원들이었다. 얼마 안 되는 상인들은 자신이 후원하는 귀족의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회장을 거닐었다.

실비아는 카인과 롬바드만을 대동한 채 움직였다. 그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이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을 끌었다. 여인이면서도 누구를 뒤따르지 않고 앞서 걷는 모습 자체가 눈에 띄었고, 그녀의 신분을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롬바드, 할렌의 시선이 조용히 회장을 훑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몇몇 이들이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도 그의 가면은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그가 실비아 크렘보르의 호위처럼 보였기에 아무도 그에게 얼굴을 드러내라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오늘의 주인공인 총독까지도.

“오셨군. 크렘보르의 딸이 자리를 빛내주어 기쁘오.”

운바소르 아실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이는 부관 한 명뿐이었다. 뜻밖에도, 운바소르 아실은 자신이 주인공인 자리이건만 그것을 과시하려 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도 이 자리에 참석한 손님 중 한 명인 것처럼 단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뒤따르는 자들을 십수 명씩 거느리지 않더라도 그는 자연스럽게 회장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오히려 과시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특별하게 보였다.

“각하.”

실비아가 정중히 인사하자 운바소르 아실의 눈가에 걸린 웃음이 조금 더 진해졌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눈 후, 그는 실비아의 뒤편에 서 있던 카인에 대해서도 지나가듯 물었다. 황도 출신 귀족이라 소개하자 조금 관심을 보이는 듯했지만, 가문의 이름이 들어본 적 없는 것임을 확인하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잠시 후에 봅시다.”

“예.”

운바소르 아실은 오늘의 주인공. 그와 짤막하게나마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오늘의, 이 자리의 주인공으로서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실비아와 나눈 알맹이 없는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마주 보며 몇 마디라도 주고받음으로써 그는 크렘보르 가문에 대한 성의를 보인 것이다.

“…쉽지 않군요.”

실비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카인과 할렌에게만 들릴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였다.

“판니른 모든 관리의 머리 위에 선 자입니다. 그런 자리에까지 오른 자가 호락호락할 리 없지요. 하지만 결국 인내심이 더 강한 쪽이 웃게 될 겁니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말소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것은 멀리서, 어느 것은 코앞에서.

“크렘보르 영애. 처음 뵙겠소.”

“본인은…….”

“판니른의…….”

혼란스러운 속삭임들이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순간, 실비아는 자신이 미로에 갇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캄캄한 미로 속에서, 달콤함을 묻힌 유혹들이 온갖 흉험한 함정 속으로 자신을 이끄는 듯했다.

“그렇군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세상 경험이라고는 말씀하신 상행 한번이 전부나 마찬가지인지라,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 불안한 흔들림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든 중심을 잡았다. 크게 호흡하고, 차분하게 바라보며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보이고 들리는 온갖 거짓 웃음 뒤에 숨은 진실과 현실을 희미하게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

“연회가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가시지요.”

의심과 욕심,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모든 시선을 무시했다. 그리고 당당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신감이 차오르고 걸음에 힘이 실렸다.

“크렘보르 영애. 이쪽으로.”

안내를 맡은 시종의 허리가 깊이 내려갔다. 실비아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서 그녀에게 배정된 자리로 향했다.

* * *

“장군. 베이호버 쪽 전선이 밀렸다고 합니다.”

전장에서의 승패는 누구라도 예측하기 어렵다. 우열이 명백해 보이는 전투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뒤집히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니 아군이 승리했든, 패배했든 그리 놀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보고하는 시어문드의 표정에서 색다른 그림자를 엿보았고, 그래서 굳이 물었다.

“왜지?”

“일선 장교들이…대거 암살당했다고 하는군요.”

“…….”

장교들이 대거 암살? 일반적이지 않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상대 지휘관을 암살할 수 있다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음을 어찌 모를까. 알면서도 그럴 수 없는 건, 그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암살자가 군영 내로 침입하기도 어렵고, 호위병에 둘러싸인 지휘관을 암살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일선 장교라고 해도 대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암살당했다? 군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지 않은 이상, 목을 암살자의 앞에 들이밀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못된 보고일 리는 없습니다.”

시어문드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더군요.”

이곳, 골고스에서는 농성하던 최고 지휘관이 암살자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적이 암살자 부대라도 거느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입니다. 실제로 이전 시대, 대전쟁이 벌어지던 때는 전장에서 암살자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

군터가 탁자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방비해야겠군.”

“예. 검문을 철저히 하고, 호위도 더 늘리겠습니다.”

“그러도록.”

눈에 보이는 칼 백 자루는 두렵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칼 한 자루는 주의해야 한다. 군터는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다니는 암살자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독 묻은 칼 한 자루에 쓰러질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과 인간을 구분 짓고 있지 않은가. 마치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뭐라고 합니까?”

의미 없는 잡생각은 접고 다시 자이드라 멕시스의 서신을 읽었다. 평소 정치적인 것과는 담을 쌓았던 아드리안이 예외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중앙 조정과 군비 관련해서도 마찰을 빚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나, 그 역시 남의 피만을 강요하는 중앙 조정에게 불만이 적잖이 쌓여 있었다.

“황자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것을 요구했다는군.”

“더는 참을 수가 없었나 보군요.”

“그런 것 같다.”

이 전쟁은 황자의 가장 큰, 아니 유일한 관심사다. 본인이 친정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런, 잡스러워 보이는 이유로 전쟁의 고삐가 느슨해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얽힌 여러 귀족의 체면을 보아 잠자코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보이는 듯했다.

“그럼 이제 마무리가 될까요?”

“글쎄.”

자이드라 멕시스도, 중앙의 귀족들도 일단 황자의 의중을 중요하게 살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무조건 납작 엎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황자를 거슬러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황자의 분노를 사는 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전쟁이 이렇게 오래 끌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바라눔 트라소프가 죽었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말입니다.”

아드리안만일까. 많은 이들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머리를 잃고, 후계자들이 저들끼리 물고 뜯을 때만 해도 자콥 트라소프가 손쉽게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될 거라 예견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예상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지부진하게 여기까지 끌렸다. 자콥 트라소프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글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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