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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00화 (900/1,064)

900화

카이우스 로 트라소프.

그는 황제의 자식이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황실의 핏줄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 가운데 있는 로는 그가 황제의 피를 받았으되 황자로서 인정받지는 못함을 의미한다. 그는 하렘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사생아. 굳이 따지자면 사생아가 맞긴 했으나, 카이 우스 로 트라소프는 자신을 황제의 사생아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을 황궁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갇혀 있다보면, 자존감은 자연스레 바닥을 치기 마련이다. 그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자유를 누린 적이 없기에 억압된 삶속에서도 답답함을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일까.

"그렇다면 형님을 쫓았던 추적자들은……."

"그림자 검사단이라고 하지. 황실의 그늘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네. 요인 호위, 암살, 조용한 칼이 필요한 일이라면 그들은 늘 최고의 답이지."

"그런 자들이 형님을 노렸던 건, 형님이 황제의 피를 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말씀대로라면 형님은 후계 다 툼과는 상관없는 몸이잖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했겠지."

"예?"

"이건 내 추측이네. 하지만 난 확신하고 있어."

카이우스 로 트라소프, 카인이 잠시 말을 끊자 레온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날 황제는 죽었지. 그런데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 아는가?"

"아니요. 그것까지는."

"하렘이다. 황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하렘에서 보냈고, 그날도 마찬가지였어."

눈을 감은 카인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지. 비명은 매캐한 냄새가 밀려온 뒤에 들리기 시작했어. 사방이 불길에 뒤덮였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다. 고함은 들리지 않았어. 오직 비명뿐이었지."

타고난 감각 때문이었을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죽음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도와 교단에서는 황제가 원신의 부름을 받아 승천했다고 하지. 우습지 않나? 신의 부름을 받고 승천한 거라면, 하렘에 불길이 치솟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그 많은 궁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나."

"형님의 말씀은 그럼."

"황제는 암살당했다. 그리고 황제를 암살한 자들은 황제의 핏줄도 없애려 했어. 그래. 나 같은 자들조차 말이지."

"잔혹하군요."

"잔혹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차피 그들도 황제의 핏줄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실제로 지금도 황자들이 황제의 뒤를 잇기 위해 싸우고 있고요."

"그래. 그들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황제의 핏줄을 하나라도 더 끊어놓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궁에 불을 지르고, 암살자들까지 대거 풀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다분히 감정적인 행동이었다.

분노. 혹은 두려움.

"황제가 신의 사도라는 이야기, 들어보았는가?"

"제국민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황제가 영원불멸하리라 생각했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상상치도 못했던 위업을 계속해서 쌓아나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가 신의사도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을 거야."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 카인이 피식 웃었다.

"자네가 가진 신에 대한 견해가 나 같은, 제국민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할 거야. 황제의 피에는 초월적인 힘이 흐르네. 그것이 신의 힘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아. 실제로 그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어."

교단에서는 그것을 축복받은 혈통이 지니는 힘이라고 말했다. 황제의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

수명이 길거나, 아니면 다른 특별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그 힘은 대를 이어갈수록 흐려져, 황손들은 대부분 황자들보다 수명이 짧았다.

"형님도 그렇습니까?"

"대부분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지. 나는…황제의 피를 이은 것치고는 별 볼일 없었네. 어쩌면 그렇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카인은 생각에 잠긴듯한 레온을 보았다. 생각보다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가 스승과 함께 은둔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가 어떤 존재인지, 그의 피를 이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인은 레온의 그런 무지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을 카이우스 로 트라소프가 아니라 카인으로 봐주기 때문이다.

"그럼, 형님은 황제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야…형님은 황제의 핏줄을 이으셨으니까요. 황자는 아니었다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카인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무지에서 나오는 상상력은 대부분 우습지만, 때로는 놀랍기도 하다. 황제라니.

"그럴 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물론. 난 미치광이가 아니네. 황제? 하하. 꿀 수도 없고, 꿔서도 안 되는 꿈이야. 난 그저…내게 주어진 기회를 가능한 만큼 누리고 싶을 뿐이네."

"기회요?"

"그래. 기회."

평생 하렘의 그늘 속에서 살다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아 그 운명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또한 운명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은 그 어두컴컴한 하렘 속에 갇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크렘보르 가문의 모든 것은 보리스 공자가 이어받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형님께서는……."

레온은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었다. 비록 그가 세상 물정을 잘 몰랐고, 지금도 솔직히 잘 아는 편은 아니라고 하나 적어도 크렘보르 가문의 대소사가 어찌 흘러가는지 정도는 이제 파악하고 있었다.

실비아 크렘보르가 아무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발악한다 해도, 결국 큰 흐름을 뒤틀 수는 없다. 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는 그녀의 오라비이며, 가문은 그에게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주와 적대했던 그녀는 유폐되거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다른 가문에 팔려가듯 시집가게 될 터.

"좋게 끝나지는 않겠지."

"암살자들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끝이 어찌 될지 짐작하고 있으면서, 왜 지금도 실비아 크렘보르의 곁에 머무는가. 설마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보아서일까?

"아니면 혹, 아가씨와……."

"일단은 거기까지만 하세."

카인이 레온의 말을 끊었다. 그는 낯빛을 굳히기는 했지만, 레온의 추측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지금 나를 가장 크게 써주는 이는 아가씨지.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지금은, 말이지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 없네. 아직은 시간이 있어. 크렘보르 장군은 아직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아. 현역이기도 하지. 보리스 공자가 후계자이고, 언젠가 가문을 잇겠지만 그게 내일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야."

아직은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내 몸속에 흐르는 피. 이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으니 나도 한번 내 운명을 시험해볼 참이네."

처음부터 가진 것은 없었다. 그러니 무엇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카인은 허황된 꿈을 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꿈꾸지 않으며 겁쟁이처럼 움츠러들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

"이상하군요."

"음?"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제가 이상한 것일까요?"

그 말에 카인이 크게 웃었다.

"하하. 아니. 그거야말로 내가 자네에게 기대한 반응이네. 기대에 부응해줘서 고맙군."

기분이 좋아진 카인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술을 들이켰다. 그는 인사불성이 되어 걸음걸이마저 휘청거릴 지경이 되어서야 침실로 향했다.

***

"정말 놀랐습니다."

"그렇습니까?"

"선입견이 있었음을 고백하겠습니다.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여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지요."

다소 무례한 말에도 실비아는 옅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말과 달리,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를 시종일관유지하는 상대에게 너그러움을 보인 것이다.

또, 그녀는 약간의 무례에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옳았어.'

카인은 침착하게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 조용한 줄다리기는 먼저 인내심을 잃은 쪽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고.

실비아는 그 말대로 인내심을 가졌다. 그리고 지금, 그 보답을 받고 있었다.

"공께서는 직접 상행단을 이끌고 국경을 넘으셨다.

지요.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실행력도 대단하지만, 안목도 감탄스럽습니다. 전란이 시작된 이후로 국외로 가는 길은 대부분 막혔고, 이국의 물산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지요. 공께서는 황금으로 된 길을 걸으실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저 또한 그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바람대로 흘러가는 일은 드물지요."

"그렇습니다. 특히 보물과 관련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보물이 값질수록, 노리는 이가 많아지고 지켜내기는 힘들어지는 법이니까요."

"……."

"하지만 혼자라면 쉽지 않은 일이라도, 여럿이 함께 한다면 어렵지 않게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 생각지 않으십니까?"

"옳은 말씀입니다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 자와 함께했다가 자칫 등을 찔리는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을 주어야지요.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그렇지요?"

낮아진 목소리와 물음에, 실비아가 조금 더 짙어진 웃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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