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9화
"후우."
한숨이 길게 이어진다. 실비아는 자신이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오늘 종일, 아니 어제부터 줄곧 답답했던 마음을 이제는 모른 척 외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예상 밖인데.'
크렘보르의 이름은 판니른 전역에 널리 퍼져있다.
적어도 판니른에서는 크렘보르의 문장기를 앞세우면 어디서든 존중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잘에서도 마찬가지. 총독이 다스리는 주도에서도 크렘보르의 이름은 충분히 유효했다. 일찍이 그녀의 부친이 행군하듯 하잘을 들렀다 갔을 때도 총독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하지 않던가. 총독은 부친을 존중, 아니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려 한 주의 총독씩이나 되는 자가 말이다.
그런 군터 크렘보르의 여식인 덕에, 실비아도 이곳에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 존중받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녀와 만나면 약식으로라도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크렘보르라는 이름의 힘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야.'
찾아와 인사를 하고 고개를 조아리기는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간단하고 형식적인 대화일 뿐, 제대로 된 내용은 없다. 크렘보르를 대우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는 거다. 그들은 크렘보르가문에 대한 존중심은 보이지만, 실비아 크렘보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지만, 실비아는 그들의 내심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인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참 잘도 빠져나가는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미리 손을 쓴 걸까요?"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카인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침묵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보리스 공자가 아무리 독하게 마음먹었다고 해도 이런 자잘한 부분까지 손을 쓰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렇게 집요하게 손을 쓰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반감을 사기 마련이지요."
"그렇다면……."
"저들이 알아서 눈치를 본다고 보는 쪽이 맞을 겁니다. 보리스 공자가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좋지 않다. 차라리 보리스가 직접 손을 썼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음에도, 하잘의 인사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는 것이라면…암담하기만 할 뿐이다.
"보리스 공자가 크렘보르의 후계자로 이름을 알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성주 대리를 맡아 업무를 보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습니다."
"왜 저는 알지 못했을까요."
"안에서 볼 때와 밖에서 볼 때는 다른 법이지요. 보리스 공자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착실히 자신을 드러내 온 모양입니다."
아무리 신경을 쓴다고 해도, 솔롬 안에서만 머무르며 세상을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실비아는 자신이 안일했고, 무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 포기한 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지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실비아는 기대감을 숨기며 카인을 보았다.
이 귀족 청년은 그녀가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마다 몇 번이고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니 그라면, 이번에도…….
'이런. 한심하잖아.'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남에게 의존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바람직하지 않다.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실비아 크렘보르로서 인정받고자 하면서 이런 나약한 모습이나 보인다면 역시 꼴사납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곳에 쓰는 것도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야.'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자괴감을 그렇게 눌러 내리는데, 침묵하던 카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보리스 공자의 위세가 높다고 해도, 모든 귀족과 유력자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가씨와 접촉하려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조용한 이유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거겠군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카인의 말은 제법 그럴듯했다. 확실히, 판니른의 유력자들이 군터 크렘보르도 아닌 그의 후계자를 두려워하며 눈치만 보고 있을 리는 없다. 그들이 지금까지 잠잠하다면, 그건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라고 봐야 할 터.
"이럴 때일수록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행을 다닐 때를 떠올려보시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거래란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것. 그리고 좋은 거래란, 당연히 적게 주고 크게 받아 더 크게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상대에게 마음을 읽히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상대는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 할 것이고, 그러면 좋은 거래를 하기는 힘들어진다.
"자중하도록 하지요. 다만 갑작스레 두문불출하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수도 있으니,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까지처럼 계속 만나보겠습니다."
"현명하십니다."
***
운바소르 아실은 하잘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귀족들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크렘보르의 여식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방문객들을 만나며 자택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의외로군."
사실 그는 초조해진 실비아 크렘보르가 자신의 편이 되어줄 이들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팔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녀는 분명 하잘을 떠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우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다? 이것은 둘 중 하나다.
위기감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위기감과 초조함 속에서도 최선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하거나.
그리고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그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굳이 젊은이들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을 때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시야가 좁아지면 아무래도 실수가 잦아지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일을 그르치기 쉽다.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과 침착함이 필요한데, 이는 아무래도 경험이 적은 젊은이가 갖추기 힘든 자질이다.
스스로 그런 자질을 갖췄거나, 혹은 그런 이를 곁에 두고 조언을 받았거나. 뭐가 됐든 실비아 크렘보르가 그 나이대의 평범한 귀족 젊은이는 아니라는 뜻 아니겠는가. 운바소르 아실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높였다.
"올 사람은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머릿속에는 저마다의 생각들이 있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판니른에서 나름대로 목소리 좀 낸다 하는 자들이 운바소르 아실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곳까지 모여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근사한 경치로군.'
창으로 시선을 돌리니 석양빛에 물들어가는 하잘의 도심이 보였다. 이 순간, 이 도시에서 가장 존귀한 이는 바로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지겹다고 생각했던 광경이 새삼 근사해 보였다.
바로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지금껏 달려온 것이다.
한때는 망상이었고, 한때는 꿈이었으며, 한때는 목표였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광경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
"근사하군요. 솔롬의 노을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곳은……."
레온이 말끝을 흐리자 카인이 웃으며 말했다.
"솔롬은 일개 성이지. 지금이야 증축을 거듭하며 그 럭저럭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곳과 비교할 수는 없어. 누가 뭐라 해도 하잘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판니른의 중심이었고, 그전에는 일국의 수도였으니까."
"수도…입니까."
"그래. 제국의 깃발이 꽂히기 전까지는, 이곳은 일국의 심장이었다네."
"음. 그리 생각하니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하군요."
"슬프다?"
"망국의 전경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전과는 달리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하하. 말했듯, 100년도 더 전의 이야기라네. 흘러간 과거에 의미를 두자면 끝도 없지. 그러니 볼 거라면 과거보다는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보게나."
"미래……."
중얼거리던 레온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돌려 카인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어떠십니까?"
"음?"
"아가씨를 모시면서 출세하는 것. 그것이 형님이 그리고 계신 미래입니까?"
"…….…"
카인은 답하지 않고 잔을 비웠다. 때마침 창을 넘어 불어온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고, 그는 창가 쪽으로 가반은 닫혀 있던 창을 활짝 열었다.
'어떻게 한다.'
단 한 번도 속에 감춰둔 것을 꺼낸 적이 없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이 믿음직한 의동생에게도.
못 믿어서가 아니다. 감춰둔 자신의 비밀이,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네."
"황도에서 도망쳐 나오셨을 때 말입니까?"
"그래. 그때는,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어.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
"암살자들이 뒤를 쫓고 있다면, 누구나 그럴 겁니다."
카인은 레온의 위로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루하루.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이 북쪽 땅까지 이르렀지. 운이 나쁘지 않아 좋은 기회를 잡고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암담하고 절망적이기만 했던 그 시절도 어느새 빛바랜 기억이 되어버렸군."
언제고 지금처럼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다시 한번 생각했을 때. 그는 운이 아닌 운명을 느꼈다.
"한 가지. 자네에게 고백하고 사과할 것이 있네."
"뭡니까?"
미안함 때문에, 카인은 몸을 다시 창가 쪽으로 돌렸다.
과연 지금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을까? 자신의 욕심 때문에 레온을 사지로 떠미는 것은 아닐까?
잠깐 갈등했지만, 카인은 결국 욕심에 기울었다.
'용서하게나.'
이성은 여기서 멈추라고 하나, 어느새 가슴에 자리 잡은 불구덩이는 참지 말라고 한다.
그래. 오래도 참지 않았는가. 언제까지 도망칠 텐가.
계속 도망친다 한들, 운명의 실타래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태어났을 때 받은 이름은 카인이 아니라네. 내게 내려진 이름은 카이우스, 카이우스 로 트라소프."
자꾸만 닫히려는 입을 어렵사리 뗀다.
"이름에서 알 수 있겠지만, 황제의 핏줄이지."
몸을 돌리고 있었기에, 의동생을 위험으로 끌어들인다는 죄책감 때문에, 카인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뒤편.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레온의 눈에 열기가 감돌고, 그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