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화
깊은 밤, 군터는 따라붙으려는 호위병들을 물린 채 홀로 골고스의 성벽을 거닐었다. 자리를 지키다 그를 마주친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곤 했지만, 군터는 몇몇 병사들의 입가에 침이 묻어있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주의 정도는 주었을 텐데, 이제는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것에서 마음이 사라진다. 감정은 식고, 사고는 경직된다.
"……."
군터는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머리를 쓸어넘기는 바람에 집중했다. 과거, 이 바람에서 상쾌함을 느꼈던 때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억지로 붙들고 집중한다. 기억, 감정. 줄카는 그런 노력도 결국 조금 늦출 뿐, 근본적인 해결법은 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 기괴한 거짓 웃음을 지으면서.
평범한 인간이 몇 세대나 태어나고 죽을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살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인형 같은 웃음을 보면서 그가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벤슨이 사색이 됐길래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벤슨이 오늘 밤 동벽 순시 당번 장교였던가. 군터는 웃으며 다가오는 아드리안을 힐끔 보고는 다시 성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로 이 야심한 시각에 성벽을 서성이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
"저도 그렇습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는 힘에 부친다는 느낌마저 받았는데, 막상 이렇게 가만히 쉬려니 몸이 근질거리는군요."
그 말에 군터가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하늘을 가린 어둠이지만 그의 눈은 대낮처럼 모든 것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아드리안의 푸석푸석한 얼굴. 그리고 그 얼굴에 진 주름들까지도.
"힘에 부치나?"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번에 알았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요."
"각인은?"
"몇 번 생각해봤습니다만,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강체술 같은 것을 각인한다고 해도 몸의 기력 자체를 높여주지는 못한다. 각인된 술법의 힘은 각인자의원기를 제물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불씨라도 태울 것이 있어야 불길을 피워올릴 수 있듯, 신체 자체가 노쇠하여 기력이 떨어지면 강력한 힘을 지닌 각인을 몸에 품었다 해도 대개는 제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뭐,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이렇게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가에 걸린 웃음은 다소 메말랐다. 이전에도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실비아의 곁을 지키고 있을 할렌이 그랬다.
"아쉬운가?"
"예?"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쉽냐는 말이다."
"아쉽다…… 그런 것 같군요. 예. 아쉽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받아들여야지요. 처음 군문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 한편으로는 늘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왔습니다."
"음?"
다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번엔 마르지 않은 웃음이다.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칼밥을 먹고 사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모르지요. 당장 내일이 삶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불안속에서 미래를 그린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 무탈하게 칼을 내려놓을 날이 왔으면 했습니다."
의외였다. 할렌과 기질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니 할렌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할렌이 그랬듯, 아쉬움과 분함에 사로잡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담담하게 끝을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의외군."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도 몸이 허락하는 순간까지는 죽을 힘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군터는 아드리안에게도 영혼의 종속을 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과연 그게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또, 권한다고 해도 아드리안이 거절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드리안은 분명, 끝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새삼, 장군께서 참으로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음?"
"그렇잖습니까. 저보다 전장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긴 분께서, 마치 갓 스무 살이 된 젊은이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이 넘치시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흉터 때문에 그렇지, 얼굴에서도 딱히 나이가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보았다. 변하기 시작한 후로, 그의 육체는 노화를 잊었다. 아니, 시간의 흐름에서 몇 발자국은 벗어났다.
이런 쪽으로는 상당히 둔한 편인 아드리안마저도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니, 얼마 후에는 신기함을 넘어 의혹을 품는 이들도 생기겠지. 그때가 되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았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달갑지 않은 시선이 쏠리기 시작할 거다. 그중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꽤 진지한 관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화를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지 않겠나.
관심과 의심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그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순식간일 터.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장군께서는 앞으로 최소 10년은 너끈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전장에서 머물 생각은 없다."
"예? 정말이십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아드리안. 평소 그가 자신을 어떻게 봐 왔는지 알 법한 반응이었다.
"그래."
한때는 전장을 누비며 가슴 속 무언가를 태우곤 했다. 출세를 향한 갈망, 증명에 대한 욕구. 그때는 분명 그랬건만, 이제는 그때의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렇다면 저도 장군께서 은퇴하실 때까지 힘껏 버텨보겠습니다. 전장을 떠나더라도 곁에서 모실 사람이 최소 두엇은 있어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좋을 대로 해라."
은퇴. 은퇴 이후, 장군이니 성주니 하는 짐을 다 벗어 던진 이후, 군터는 그때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분명히 닥쳐올 미래건만, 그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허무한 건가.'
성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떼서 허공을 쥐었다. 군터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이 꼭 현재의 자신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득, 벨리사가 떠올랐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짐 비슷한 것을 했었다. 어미를 보내고 남겨진 아이들, 녀석들을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도록 번듯하게 길러내겠다고.
그때. 눈물을 흘렸던가? 격정에 휩싸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너무나 흐릿하다. 그래도 그 흐릿함 속에 손을 뻗는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듯, 비루하게.
***
"데리브란의 분위기가 제법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음.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가?"
"예. 자이드라 멕시스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아예 타협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강경하게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다들 쉬쉬하고는 있습니다만, 이미 자잘하게 충돌도 몇 번 일어난 것 같더군요."
"허허. 충돌이라."
운바소르 아실은 테리브란에서 달려온 수하의 보고에 너털웃음을 흘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얼추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흥미로운 소식을 듣게 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이드라 멕시스를 위시한 지방 귀족들이 중앙 귀족 세력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차별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것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전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 없노라고 입장표명까지 했다. 덕분에 중앙, 그러니까 테리브란 조정으로서는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상황이 되어버렸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하지만 과감하군.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예?"
"아무것도 아닐세."
가만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영리한 자다. 그라면, 처음부터 지금 같은 상황을 예견했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처음부터 황자를 섬겼던 중앙의 귀족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지방 귀족들, 누구나 자기 밥그릇을 남과 나누기는 싫어하는 법이니, 두 세력 간에 마찰이 생기는 것은 필연이다.
'그래. 예견하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이런 격렬한 반응은…최소 얼마 정도는 그가 의도하고 주도했다고 봐도 되겠군.'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특히나 많은 것이 걸려있는 판이라면, 얼마나 자연스러워 보이든 간에 그 속에는 틀림없이 누군가의 의도와 계획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시기가 절묘하지 않은가.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이런 불만 제기라니. 황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렇게 용감하게 나섰다고? 단지 불만이 쌓였기 때문에? 설마 그럴 리가.
"그나저나 충돌이라니. 하긴, 분위기가 올라왔다 싶으면 필요 이상으로 날뛰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귀족 정도가 되면 상대와 마찰이 생겼을 때 거리낌없이 힘을 쓸 것 같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은밀하게 손을 쓴다고 해도 결국은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뒷감당을 염려할 필요가 없거나, 감수하더라도 손을 써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 그들이 직접 손을 쓰는 경우는 그 두 가지 경우뿐이다. 아아, 그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긴 하다.
'얼간이 같은 자들.'
분위기에 취했거나, 위에 있는 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공명심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자들. 어디에나 그런 자들은 꼭 있기 마련이니, 벌써 그런 자들이 나타났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흥미롭군."
"멀리서 지켜보기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가주께서는 일단 관망하실 요량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야지. 대신해서 싸워주는 자가 있는데 굳이 앞으로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 뒤에는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고 보니, 크렘보르의 여식이 와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들었는가? 빠르군."
"아무래도 화제가 될 수박에 없지 않습니까."
크렘보르 가문은 판니른을 넘어 테리브란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가문이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그간 이름만 알음알음 알려졌던 크렘보르의 여식이 직접 행차했다는 소식은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와 다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사실입니까?"
"글쎄. 그런 것 같기는 하더군."
"그렇다면…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것은, 아군을 물색하기 위해서라고 봐도 되겠군요."
"뭐, 그렇겠지."
"말씀을 들어보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운바소르 아실은 피식 웃으며 즉답을 피했다.
그 말대로, 실비아 크렘보르의 친구 찾기는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 먼 하잘까지 이런 저런 곤란을 겪고 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제 오라비의 그림자가 얼마나 거대하고 짙은지 실감하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