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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97화 (897/1,064)

897화

로우렌은 여느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보리스의 기색을 살폈다.

살라스와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보리스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풀어져 있을 뿐, 감정적인 동요는 없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우렌은 어쩌면 살라스와의 대화가 들은 것보다는 괜찮게 끝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이어지는 보리스의 말로 알 수 있었다.

"전혀 통하지 않더군."

"……."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후계자니 뭐니 하기 전에, 장군께 충성하는 것부터 생각하라고 말이야."

"흐흐. 어떤 면에서는 그분답군요."

"우리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장군께 신뢰받는 것이겠지요.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로우렌은 그제야 보리스가 보이는 담담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저것은 체념이다. 분노나 슬픔을 넘어선 끄트머리의 감정.

"…그래서, 뭐라 답하셨습니까?"

"뭐라 답했겠느냐."

"포기하신 겁니까?"

"살라스 공은 권한을 받아왔다. 일단은 숙일 수밖에."

"후계자라고 말하지만, 후계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권한과 존중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화가 난 모양이군."

로우렌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화가 났느냐고? 그렇다. 그가 보기에, 이는 불합리한 처사였다. 그 어떤 가문도 후계자를 이리 다루지는 않는다.

후계자를 두지 않은 가문이라면 모를까, 일단 한번 후계자를 세우고 나면 그 순간부터 가문의 주인은 둘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주가 가문의 과거이자 현재라면, 후계자는 현재이면서 미래다.

가주는 후계자를 위해 안배하고, 후계자는 안배를 부족함 없이 이어받기 위해 노력한다. 가문의 대통이란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문에는 그런 것이 없다. 가주가 권력욕이 크기 때문인가?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이다.

'그저 무심할 뿐이야.'

이 가문은, 크렘보르는 미래를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않는 것을 넘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군다. 가문의 모든 것은 가주에게 집중되어있다.

군터 크렘보르가 곧 크렘보르 가문이며, 가문의 모든 것은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의 뜻에 따라 돌아간다.

흡사 전장에 나선 군대와 같다. 철저한 규율과 통제. 그 어떠한 타협도 용납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고루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보리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통해왔다고 앞으로도 그럴 리 없지 않은가.'

크렘보르의, 군터 크렘보르의 방식이 지금까지 통해왔던 것은 첫째로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전란과 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다면, 힘이 있다면 다소간 질서를 흔들어도 용납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지겠는가. 5년 10년? 그때가 되어도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이 지금 같은 힘을 낼 수 있을까? 저 귀족들이 지금 같은 파격을 이해하고 양보해줄까?

크렘보르는 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저 눈먼 어른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 눈이 멀었다. 과거와 현재의 성공에 눈이 멀어, 저 뒤에 닥쳐올 것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로우렌은 그치미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이나 조용히 숨을 골라야 했다. 자신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상심하고 있을 보리스를 위해서였다.

***

"어서 오시오. 귀한 몸이 먼 길을 와주셨구려."

"제 오라비가 와야 했으나, 맡은 일이 있어 그러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양해라니. 그 무슨 말을."

운바소르 아실은 깍듯이 예를 차리는 실비아 크렘보르를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자 실비아 크렘보르는 기다.

렸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계집이라도 크렘보르라는 건가.'

저 당당함이라고 해야 할지, 오만함이라고 해야 할지. 하여간 거침없는 행실은 부친을 제대로 닮은 듯했다. 총독이라고 해도 어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예를 보이기는 하지만, 딱 그뿐이다. 해야 할 만큼만 한다는 느낌.

'애송이는 아니라 이건가.'

근래 들어 크렘보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크렘보르의 후계자이자 독자인 보리스 크렘보르가 본격적으로 가문의 창구를 열고 다른 가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부친과는 다른 열린 태도를 보였다. 그에 여러 가문이 반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침없으며 도통 속내를 알기 어려운 군터 크렘보르 때문에 불안과 불편에 시달려온 가문이 한둘이 아닌 탓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지만, 운바소르 아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력자들 간의 관계는 주로 거래를 통해 형성된다.

서로에게 이득을 주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를 얻는 것이다. 서로에게 득을 주기 때문에 굳이 그 이득을 저버리면서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믿음을, 하지만 군터 크렘보르는 달랐다. 주고받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게 신뢰의 담보가 되지는 못했다. 언제든 돌변해서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제멋대로 굴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대는 두려운 법이다. 하물며 막대한 힘까지 쥐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후계자인 보리스 크렘보르의 전향적인 태도는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부친과는 달리, 그는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운바소르 아실은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짐이 어느 정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묘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리스 크렘보르가 제 누이와 으르렁댄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그저 철없는 아가씨의 투정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럭저럭 흔한 이야기다.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온 철부지 아가씨가 제 욕심을 부리면서 가문의 뜻에 반하게 되는.

보통 그런 이야기의 결말은, 철없는 아가씨가 현실을 알게 되면서 좌절하는 식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살아오는 내내 모든 것에 가문의 덕을 본 아가씨가 어찌 가문을 등질 수 있겠는가. 새장속의 새는 자신을 가둔 새장이 감옥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그 감옥이 바깥세상의 삭풍을 막아주는 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걸 알게 되면, 그 자그마한 날개를 꺾어버리는 흉포한 바람을 겪고 나면 결국 알아서 새장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운바소르 아실은 크렘보르의 철부지 아가씨도 결국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약소합니다만……."

작지만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를 올려놓는 실비아 크렘보르, 국경을 넘는 상행을 직접 이끌었다더니, 아무래도 이 상자와 내용물 역시 제국 밖에서 온 것인 듯했다.

"직접 와준 것만 해도 충분한데, 무슨 선물까지 준비하셨소."

"공께서는 판니른을 다스리는 총독이십니다. 판니 른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입장으로서, 마땅히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의 화법은 아니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상인들이 쓰는 말투와 닮았으나, 그것과도 차이점이 있었다.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 역시 부친을 닮은 것일까.

"머무시는 동안 가문의 저택에서 지낼 요량이오?"

"예. 그래야지요. 관리인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하. 입구를 지키는 솔롬의 군졸들이 무서워서라도 그러지는 못했을 거요. 그럼, 사흘 뒤에 봅시다. 그 전에 봐도 괜찮고."

"예. 다시 뵙지요. 그럼."

실비아 크렘보르,

크렘보르 가문의 독녀이자, 보리스 크렘보르의 하나뿐인 형제.

군터 크렘보르의 단 둘뿐인 자식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녀의 이름은 진즉 유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녀 자신이 사교계 활동을 거의 안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여느 평범한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성품과 취미를 가졌다던가. 때문인지 그녀의 이름은 위상에 비해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아는 이들만 아는 이름이었달까.

그런데 그랬던 이름이, 근래 들어 유명해졌다. 대부 분의 귀족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직접 상행을 이끌고, 후계자인 오라비와 대립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행적만 보면 후계 다툼에 뛰어들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허무맹랑한 꿈을 꿀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여인이 가문을 잇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였다. 설령 직계 혈족 중 사내의 씨가 마른다고 해도 방계 중 하나를 입적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결하지, 여인에게까지 순서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여인이 가문의 대통을 잇는다면, 그건 정말 가문의 핏줄이 끊길 위험에 처했을 때뿐이다.

그에 아니면, 외부의 요인이 작용하는 경우거나,

'모르겠군.'

지금 실비아 크렘보르는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후계자인 오라비의 입지는 탄탄하며, 가주인 부친의 위세는 감히 외부에서 손을 뻗는 것을 허락지 않을 만큼 강력하다.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그녀의 행동은 오라비와 가문에 대한 철없는 반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철없는 반항치고는 꽤나 대단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보리스 크렘보르에게서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크렘보르의 후계자이자 솔롬의 성주 대리로서, 보리스 크렘보르와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운바소르 아실은 그의 지위를 인정했기에, 드러내놓고 하기 힘든 이야기까지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리스크렘보르는 누이를 보내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콧대를 눌러달라든지, 어떻게 해달라든지 하는 이야기는 조금도 없었다. 가문과 자신의 치부를 외부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가 누이와 다투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퍼질 만큼 퍼졌고,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게 됐다. 거기에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하잘까지 직접 행차했으니, 그와 가문의 치부는 이미 세상에 드러난 셈이다.

'막고 싶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도 않았단 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다. 보리스 크렘보르는 가문의 후계자이자 솔롬의 성주 대리이며, 그는 자신의 위세와 권한으로 누이의 하잘행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두고 보면 알겠지.'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결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누이를 풀어주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그 진의는 요 며칠 안에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

[……atvia…araka……]

바람 소리와 비슷한 속삭임.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너무 희미해서, 환청이 들리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희미했던 소리는 점점 커졌고, 매일 이어졌다.

이제는 안다. 이 속삭임은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사라져라.'

연기처럼 뭉쳐 있던 흐릿한 형체는 그가 의지를 드러내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군터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남아있던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꾸욱!

주먹을 쥐니 건틀릿의 절편이 맞물려 끼릭 거리는 소리를 냈다. 군터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랫동안 전투가 없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 같았지만 그는 침상에서 나오면 한시도 무장을 풀지 않았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한다거나, 뭐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평복을 입고 있기보다는 무장하고 있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수하들은 그런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고 비장한 얼굴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군터는 굳이 그들의 착각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멈출 수는 없는 거로군.'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군터는 이런 변화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최대한 피해왔지만, 아무래도 큰 소용은 없었던 듯했다.

[늦든 빠르든, 결국 맞이하게 될 거다.]

지금 이 순간. 줄카가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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