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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96화 (896/1,064)

896화

암살자들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졌지만, 실비아는 일정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시장 및 유력 가문의 수장들에게 면밀한 조사를 부탁한 뒤 다음날 떠나겠노라 통보했다. 그리고 조용히 롬바드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가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음성. 종종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는 귀에 익어서 아무렇지 않게 들리다가도, 또 어느 때는 처음 저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비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저 목소리가 거슬리고 거슬리지 않고는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마음이 평온하고 여유가 있으면 저 불쾌한 목소리도 너그럽게 넘어가지는 반면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흠이 나 있으면 곧장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카인 공의 호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공이 직접 나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 호위로 붙어있는 병력 중 일부만이라도 돌려달라는 겁니다."

"말씀하셨듯, 그들의 임무는 아가씨의 호위입니다. 카인 공을 호위하는 건 그들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고 있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면 되겠습니까?"

"저를 비롯한 병사들은 모두 장군의 명을 따릅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당신의 명령은 따를 수 없다는 말이다. 실비아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눌러 참았다. 이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벽에다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정말 벽이라면 벽에다 화를 낸다고 해도 우습기만 할 뿐이다.

"암살자들은 저를 노리지 않을 겁니다."

"어찌 확신하십니까.

"오라버니는 제게 손대지 못할 테니까요."

"보리스 공자가 암살자들을 보냈다는 것은 어찌 확신하십니까."

"그야………!"

실비아는 발칵 화를 내려다가 다시 한번 감정을 추슬렀다. 자신이 언성을 높이고, 심지어 몸까지 몇 번이고 들썩일 동안 이 사내는 처음 앉은 자세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사람이야 적잖이 봐왔지만, 이렇게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자는 처음이었다.

"롬바드 공은 제 보호자 역할로 따라붙으셨지요."

"그렇습니다."

"보호라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위해를 막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관은 명 받은 대로 따를 뿐입니다."

"아버지가 공을 보면 답답해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그러실 거에요."

"그렇다면 그때 벌을 받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세요."

"예. 그럼."

롬바드가 떠나고, 홀로 남은 실비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늘 저자의 목소리가 그토록 귀에 거슬렸던 이유.

그건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것을 처음부터 어렴풋이나마 짐작했기 때문이다. 저 고지식하고, 사람 같지 않은 자에게는 인정도 융통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으로서는 저자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후우."

경험한 적 없는 압박감이 심력을 좀먹는다.

카인에 대한 암살시도는 단순히 그녀의 손발을 끊어놓기 위함만이 아니다. 만약 카인을 잃었다면, 잃는다면 그건 카인 한 사람만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곧 실비아 크렘보르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측근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여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꼴이 된다. 수하 하나 지키지 못하는 윗사람을 그 누가 따르겠는가.

'이렇게까지 하다니.'

비록 아랫사람을 목표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암살시도라니? 귀족 가문들에서 종종 형제끼리 피를 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집이 야기라고만 생각했다.

'후환이 두렵지 않은 거야?'

부친이 이 일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아무리 간접적인 경고 정도였다지만, 암살자를 부린 것을 알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리라.

실비아는 오라비가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이렇게 날뛰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살라스 공."

"공자님."

보리스는 성주 관저에서 살라스를 맞이했다. 근사한 환영의 자리 같은 것은 없었다. 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살라스가 그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잡스러운 것 대신 스스로 성의를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몸을 낮춰 그를 맞이한 것이다.

"성주 대리를 맡고 계시는 분께서 어찌 몸을 숙이십니까."

"이번만은 이해해주시지요.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전임에 대한 후임의 대우라고 생각하시고요."

"전임이라…그렇군요."

말장난이 제법 재미가 있었는지, 살라스의 마른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떠오른 것보다 빠르게 사라지긴 했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여독부터 푸셔야겠지요. 먼 길을 오셨고, 분명 쉴 틈도 없이 바삐 달려 오셨을 테니까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부터 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처럼 먼 길을 부지런히 달려왔으니까요."

"그러시다면……."

보리스가 성주를 위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 지었던 웃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상석에 앉은 자연스러운 태도, 지금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에게 대리라는 말을 떠올리지는 못할 듯했다.

"말씀하십시오."

오만함? 아니. 그보다는 담담함. 그리고 자신감이다.

"장군께서는 두 분이 다투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본래 형제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종종 사소한 일로 싸우고, 삐치고, 외면하지요. 그러다가도 시간이 조금 흐르거나 오해가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해하고 돈독해지고 말입니다."

"그런 가벼운 다툼이라면 제가 전쟁 중에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공자님. 아시겠지만, 말장난이나 하자고 온 것이 아닙니다."

"……."

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 솔롬의 성주 대리.

무엇 하나 가볍지 않은 이름이 없다. 적어도 판니른 내에서라면, 누구라도 말을 입 밖에 내기 전에 한 번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듯이 행동한다. 단순히 크렘보르의 가업을 처음부터 함께 한 공신이라서? 아니면 자신을 어렸을 적부터 봐온 어른이라서?

보리스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살라스라는 사내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부친과 닮은 사내다.

거침없고, 평범한 이들의 상식과 통념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의 세상은 크렘보르가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이며, 그의 명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한다. 설령 제국의 황제가 비교 대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라스 공."

"예."

"말했듯, 한 배에서 나온 형제라고 해도 종종 다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다툼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는 다소 진지해 보였나 봅니다. 맞습니까?"

"소관이 어찌 장군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지금 소관은 그저 그분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 전해주십시오. 이 부족한 아들은 당신의 후계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

"감히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하셨지요? 그렇다면 제가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전하십시오."

살라스가 굳은 표정을 살짝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장난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살라스는 자신이 보리스의 의도대로 놀아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나니, 불퉁했던 마음도 조금은 풀어졌다. 적어도 세상 모르는 애송이들의 치기 어린 다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좋습니다. 말장난은 여기까지입니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바라던 바입니다."

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살라스는 그 웃음이 이전에 보았던 귀족들의 웃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

"고백하자면, 크렘보르의 후계자라는 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지요.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그 자리는 제 것이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요."

마치 제 팔다리를 보며 왜 이것이 내 팔이며, 내 뜻대로 움직이지? 하고 궁금해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하물며 그런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가 세상에 있겠는가? 어쩌면 세상 어딘가에는 한 명쯤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보리스는 아니었다.

"그런데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이런저런 경험들을 겪다 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달라 보이셨습니까?"

"아뇨. 그렇다기보다는…책임감이라고 해야 할지, 부담감이라고 해야 할지, 뭐 그런 것들에 눈을 뜨게 됐지요."

크렘보르라는 가업은 오롯이 군터 크렘보르가 일으킨 것. 심지어 그는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그 위명은 한 주를 뒤덮을 만큼 거대했다.

"새싹의 머리 위에 드리운 그늘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고마운 보호자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비바람만이 아니라 햇빛까지 막아서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든 따라가고자 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지요.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아버지처럼 될 수는 없다는 걸 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깨달았을 때.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세 가지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막다른 벽에 몸을 던지거나, 좌절하고 무너지거나, 아니면 시선을 돌리거나.

"내 나름의 방식으로,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당당해지기로 했지요."

"그 방식이라는 것이 동생과 다투는 겁니까?"

"나는 군터 크렘보르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매사에 당당하고, 그 어떤 어려움도 아무렇지 않은 듯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야말로 이야기책에나 등장할 법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한 모습에 환호하고, 그러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 있기에 영웅이 아니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다수는 영웅이 아니다.

"먼저 가문을 장악할 겁니다. 유능한 자들을 중용할 것이고, 그들의 재주를 이용해 가문을 이끌 겁니다. 크렘보르 가문을 저 대귀족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부흥시킬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보리스는 살라스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살라스가 자신의 말을 잘라냈을 때. 보리 스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공자가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건, 그런 미래의 계획 같은 것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두 눈은, 단 한 번도 네 말에 설득된 적이 없다 말하는 듯했다.

"공자가 후계자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그분의 말씀과 뜻입니다. 왜냐하면, 크렘보르의 주인은 장군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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