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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95화 (895/1,064)

895화

"큭!"

암살자들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개활지를 달리듯 능숙하게 움직였다. 카인은 매 순간 두 방향 이상에서 공격해 오는 그들을 피해 점점 더 구석으로 몰렸다. 이는 그 스스로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무리할 필요 없어.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암살시도를 예상하기는 했어도 설마하니 도시 안.

그것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숙소까지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대담함을 넘어선 무모함이다. 뒷감당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쾅!

갑작스레 날아든 투척 도끼가 의자를 박살 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나무 파편에 피부가 쓸렸으나 카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스치는 것도 위험하다.'

암살자들의 칼은 단순한 칼이 아니다. 저 칼도, 방금 날아온 도끼도, 날에 사람 한 명 죽이기에는 충분한 독이 발려 있을 터. 갑옷이라도 걸쳤다면 어떻게든 해보련만, 지금 그가 걸친 것이라고는 얇은 옷 한 벌 뿐이었다.

카인이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마침내 방구석까지 몰린 순간. 닫혀 있던 방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레온이 뛰어 들어왔다.

"조심하게! 무기에 독을 발라놓았을 것이야!"

레온은 카인의 경고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옆에서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 내리치는 칼을 피하는 동시에 신속하게 암살자의 품을 파고들었다.

"컥!"

레온은 암살자의 목젖을 후려치고 그의 손에 들린 짧은 칼을 왼쪽 가슴 아래에 찔러넣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레온은 연달아 암살자들을 제압해갔다. 그가 손에 든 것은 단검 한 자루뿐이었으나, 암살자들은 레온의 몸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들의 무기가 레온을 향할 때마다 그들의 몸이 한순간 멈추거나 느려졌고, 그러면 레온은 쾌속하게 그들의 목을 찌르고 베었다.

푹!

순식간에 마지막 암살자까지 처리한 레온이 마지막 암살자의 목을 찌른 단검을 옆으로 그으며 숨을 골랐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자네는?"

"저야 뭐 보시다시피……."

레온이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짚었다. 이어 휘청거리기까지 하는 그를 카인이 부축했다.

"무리한 게로군."

"정신이 없었지요. 고함을 지르시지 않았다면 자칫 못 일어날뻔했습니다."

"그럴 것 같아서 최대한 크게 소리쳤지."

카인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자네가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위험할 뻔했어."

"그런 것 같군요. 도시 한복판에서 암살자라니. 그것도 귀빈 대접을 받는 와중에……."

카인은 암살자들의 품을 뒤지거나 하지 않았다. 고용되어 움직이는 놈들이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몸에 지니고 있을 리는 없다.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소란을 알아챈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순찰병들도 당도했다.

"암살자라니! 대체 누가!"

사색이 된 관리의 말을 무시한 채, 카인은 생각에 잠겼다.

너무 과격하다. 덕분에 의표를 찔리기는 했으나, 이 일이 퍼져나가게 되면 보리스 크렘보르는 의심 피할 수 없을…….

'아니. 그런 건가.'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암살자들이 성공하는 실패하든, 전혀 개의치 않을지도 모른다. 암살이 성공하면 물론 좋겠지만, 실패하더라도 경고로는 충분할 테니까.

'노려진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귀족이라고는 하나 성조차 떳떳하게 쓸 수 없는 몰락 귀족, 실비아 크렘보르의 사람이라고는 해도 인지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니 그가 암살당하더라도 그 사실이 크게 불거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저들은 이렇게 떠들썩하게 일을 벌인 것이 리라. 이번 일이 실비아 크렘보르와 그녀를 따르는 이들에게 진지한 경고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분 참…더럽군.'

진지하게 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경고의 제물로 삼았을 뿐.

대체 얼마나 얕보인 것인가. 카인은 분노를 느꼈고, 그보다 큰 허탈함에 사로잡혔다. 그는 암살자의 칼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보다, 상대에게 그렇게 가치 없게 여겨졌음에 제법 충격을 받았다.

리비암을 떠나온 이래, 줄곧 자신은 가진 것 하나 없는 도망자일 뿐이라 되뇌어왔다. 그렇기에 노래를 팔고 시를 팔며, 시궁창 같은 곳에서 하루를 묵을 때도 그럭저럭 견뎌올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랬던 마음이 어느 순간 무뎌진 것일까. 카인은 안일해진 자신을 자책하며 경각심을 일깨웠다.

"암살자……."

몰려들었던 병사들이 암살자들의 시체와 함께 물러간 후, 카인은 레온과 함께 실비아를 찾았다. 이미 보고를 들은 후였지만 실비아는 카인에게 직접 한 번 더 이야기를 들었고,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카인은 그녀가 이번 일이 그녀와 그녀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임을 눈치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떻게든 손을 쓸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이건 경고일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다니요."

실비아가 싱거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카인은 보리스 크렘보르의 경고가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늘 뒤에서 가만히 턱짓만 하던 사람이 직접 손을 썼습니다. 이제야 나를 진지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겠죠. 드디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는데, 설마 내가 뒷걸음질이라도 칠 것 같았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계속 가겠습니다. 다만 이런 경고가 한 번으로 끝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경계를 철저히 해야겠지요."

실비아의 시선이 잠시 롬바드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롬바드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처음 앉은 자세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실비아는 그의 가면 뒤에 가린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것을 또 한 번 아쉬워했다.

***

"실패했습니다."

"…그렇군."

로우렌은 수하의 보고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한나절 내내 업무를 보고 있으려니 머리도 머리지만 허리부터 시작해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적당히 하고 넘겨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당장 보리스 공자부터 눈밑에 검게 물들 때까지 업무에 파묻혀 사는데, 그 밑에서 구르는 자신이 어떻게 요령을 피울 수 있겠는가.

"유감스럽군. 돈을 너무 적게 썼나?"

"아닙니다. 접촉할 수 있는 놈들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고작……."

몰락한 귀족 나부랭이 하나 처리하지 못했느냐. 로우렌은 그 말을 도로 삼켰다. 명령한 대로 움직인 수하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받은 만큼 하지 못한 얼간이 놈들에게 있겠지.

"한 번 정도는 다시 시도할 것 같습니다만."

"자존심이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미 실패한 놈들이 한 번 더 달려든다 해도 뭐가 다르겠는가."

"그럼."

"당분간은 놔둬. 시간은 많다. 그리고… 어차피 경고가 목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로우렌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보고를 마친 수하가 그때까지도 어정쩡하게 서서 물러가지 않고 있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더 할 말이라도 있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독하게 나가지 않고 어중간하게 하는지, 그게 궁금한가?"

"예."

카인은 평범한 몰락 귀족과 다르다. 리비암에서부터 홀로 도망쳐 나와 이 먼 곳까지 이르렀지 않은가.

만약 그가 세상 물정 모르는 평범한 귀족 도련님이었다면 도중에 객사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암살자 놈들이 실패한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정하고 죽이려 한다면 못할 것은 없다. 아니, 사실 꽤 손쉬운 일이다. 남의 칼을 사서 쓸 필요 없이, 직접 병력을 위장시켜 보내면 그만이니까.

그러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보리스 때문이었다.

"공자께서 아직 마음이 서지 않으셨기 때문이지."

"역시 그렇군요."

"아무리 속을 썩여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동생이다.

독해지기가 쉽지 않지."

"저는 이번 일로 공자께서 마음을 굳히신 줄만 알았습니다."

"그나마도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결과다. 그런데도 부족해. 핏줄이라는 것이 이토록 질기다네."

수하는 그제야 납득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깃펜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돌리던 로우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낫지.'

방금 그가 한 말은 적당히 둘러대기 위한 핑계였다.

보리스는 대외적으로 뛰어난 군인이자 안정된 후계자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언젠가는 비정함이라든지, 잔혹함 같은 것이 추가될 수도 있겠지만…지금은 아니다.

'살라스님이 오고 계신단 말이지.'

저 먼 서부 전선에 가 있는 성주가 이쪽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가 살라스를 대리인으로 보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살라스가 당도하고, 돌아가기 전까지 구실은 최대한 주지 않는 편이 낫다.

증명할 수 없는, 몰락 귀족 출신의 관리 하나에 대한 암살시도 정도야 대충 뭉개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찌 될지 모른다. 로우렌은 굳이 위태롭게 선 주변에서 알짱거릴 필요는 없다고 보았고, 보리스 역시 그에 동의했다.

'적과 아군이 분명해지겠지.'

이번 경고는 단순히 실비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잘에서, 그리고 그 외 다른 곳에서 그녀와 마주칠 인사들에게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분명하게 뜻을 드러냈으니, 그것을 알고도 실비아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경고를 무시한 이들이라 봐도 좋을 터. 그런 괘씸한 것들은 적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살라스님이라면.'

성주는 모른다. 부친의 생전에도 먼발치에서 조심스럽게 본 것이 전부였고, 그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다. 사실, 그에 대해서는 알기를 포기했다. 어떤 상식도, 추측도 통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인정한 이후로 쭉 그랬다.

그러나 살라스는 다르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고, 맹목적인 성주의 추종자이지만 동시에 제법 괜찮은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가 성주 대리를 맡아 솔롬을 다스리던 시절, 그는 나쁘지 않은 정무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분이라면 이해하시겠지.'

로우렌은 살라스가 크렘보르의 미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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