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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94화 (894/1,064)

894화

실비아는 마차 안에 머물라는 간언들을 물리치고 직접 말 위에 올랐다. 여느 귀족 영애들이 챙이 넓은 모자나 베일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달리, 그녀는 간편하게 무장한 채 얼굴을 훤히 드러냈다. 매끄러운 피부를 제외하고 겉모습만 보면 그녀의 외관은 귀족영애보다는 용병에 더 가까웠다.

"아가씨."

"마차에는 타지 않는다. 바람이 차면 너라도 들어가 있거라."

"놀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그래? 잘 모르겠구나."

솔롬을 나서고 이틀째 되던 날까지, 실비아의 기분은 상쾌하기만 했다. 감옥 같은 도시를 나와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띠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그 기분이 이어진 것은 단 이틀뿐이었다.

"……."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크고,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작은 소도시. 연통한 적도 없건만 정중히 마중 나온 무리의 환대를 받는 동안에도, 실비아의 시선은 삭막한 거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용하군요."

실비아의 마음을 읽은 듯, 산드라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녀의 말처럼, 도시는 조용했다. 아니, 그보다는 적막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해가 하늘 가운데 걸린 낮이건만, 이 도시는 한밤중인 것처럼 조용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고, 걸음걸이조차 조심스러웠다.

그 이상한 적막의 한가운데에서, 실비아는 또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아이들이 없어.'

마을을 가든 도시를 가든 가장 먼저 들려오는 소리는 상인들의 호객하는 목소리, 혹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그 둘이 모두 없었다.

실비아가 한적한 거리를 훑어보고 있자, 카인이 입을 열었다.

"전란이 길어지면 늘어나는 것이 노인과 과부라고 하지요."

"아이들은?"

"아이들은 힘은 약하더라도 활기가 넘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전장에서도 써먹을 구석이 있지요."

"……."

감옥에서 나왔지만, 감옥 밖은 또 다른 의미로 잔혹하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에게 충고, 혹은 경고했던 이들이 말하던 현실일 것이다. 감옥 밖의 세상은 아름답지도, 안전하지도 않다는 것. 그게 그들이 말하려던 것이었을 테고,

"그래도 아직 판니른의 상황은 괜찮은 편입니다. 일전에 이 땅이 황자께 복속되기 전에 큰 싸움이 있었지요. 그때 입은 상처 덕에 오히려 이번에는 부담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대부분 집에 있을 겁니다. 어미의 손에 붙들려서 말입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징병이라도 될까 싶어서요?"

카인은 가벼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실비아는 그를 일별하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이 도시의 귀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조촐하나마 연회를 준비했다고 알렸다. 실비아는 그 조촐한 연회에는 관심도, 기대도 없었으나 먼저 다가온 이들을 밀어낼 마음은 더더욱 없었기에 그들의 초대에 얌전히 응하기로 했다.

***

"하하하하."

"크렘보르의 명성이 근래에 제국 전역에 널리 퍼지고 있다지요. 크렘보르 장군께서 가업을 일으켜 크게 세우셨고, 자제분들이 이토록 헌앙하고 재지가 넘치 시니 크렘보르의 명성은 앞으로도 더욱 빛을 발하겠습니다."

누군가 책이라도 쓴 것일까? 뻔하고 지루한 아첨' 내지는 '상대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아부법' 같은 책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판에 박힌 듯 비슷한 말들을 주절댈 수 있을까. 실비아는 이제 거의 완숙해진 표정 연기를 선보이며 의미 없는 단어의 향연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조촐하다는 말과는 달리, 준비된 식사는 제법 훌륭했다. 그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다. 오면서 보았던 삭막한 거리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세상에 나온 후로,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보이는 것이 달라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종종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마다 실비아는 거북함을 느꼈다.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는,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 혹은 실상.

'아가씨. 현명하게 행동하십시오.'

이곳에 오기 전, 카인이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지금 그녀의 앞에서 웃고 있는 이들은 그녀가 어찌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속마음이야 어떻든 웃어야 한다. 그들의 저열한 아부에 흡족해하고, 그들이 바라는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 그들의 흠을 못 본 척 지나치고, 거짓으로 치켜세워줘야 한다.

그래. 그래야만 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부친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지요."

실비아는 여유롭게 나이 지긋한 귀족과 대화를 이 어갔다. 귀족의 옆에 앉은 중년의 부인이나, 그 옆에 앉은 젊은 귀족 여인들이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실비아에게는 특유의 존재감이 있었다. 그것은 가문의 후광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실비아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은 그녀가 여인이라는 사실도 어느 순간 잊어버렸다. 실비아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갔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은 그것을 다연하게 받아 들였다.

'대단하지.'

카인은 그 흐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실비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흐름을 보다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명백하게, 자질은 보리스 이상이다.'

윗사람으로서의 자질, 그것은 한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매력, 위엄, 용인술등등. 온갖 요소가 다 섞여 있다. 무엇하나 빠져서는 곤란하고, 무엇하나가 특출하다고 해서 빼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카인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보리스도 겪어보았고, 실비아도 겪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실비아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보리스가 후계자 자리에 앉는 일은 없었으리라는 것이었다.

실비아가 여인으로 태어난 것은 보리스에게는 행운이고, 실비아에게는 불운이다. 차라리 반대였다면 크렘보르 가문이 지금처럼 시끄러워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저 늙은 귀족의 말처럼 크렘보르의 명성은 대를 이어 더욱 커져만 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무엇보다 크렘보르의 불운이로군.'

보리스 크렘보르를 아는 이들은 그가 뛰어난 군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전장에서 어찌 싸우는지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틀리지 않은 평이라 생각했다.

호위병에 둘러싸인 채 싸웠더라도, 어쨌거나 가진 것 많은 젊은이가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은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말이다. 곁에서 지켜본 보리스는 재지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나 사람의 무게감만은 확실했다. 문제는 단지 그뿐이라는 것.

보리스 크렘보르를 따르는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군인 보리스 크렘보르를 따르는 이들. 위대한 군인인 크렘보르 장군의 독자가 부친 못지않은 훌륭한 군인이 되리라 믿으며, 혹은 보리스 크렘보르가 어린 시절부터 보인 군재에 반해 따르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크렘보르의 독자이며 후계자이기 때문에 따르는 이들이다. 별 것 없어 보이지만 실상 가장 중요한 이유. 보리스 크렘보르를 따르는 이들의 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레온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응?"

"눈이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 착각이었습니까?"

카인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의동생은 사람의 속을 읽는 재주가 상당히 뛰어났다.

"아니. 제대로 보았어."

"그럼?"

"안타깝다고 생각했지."

능력과 상관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물려받은 것을 제 능력인 양 여기고 으스대는 자들. 엄밀히 따지자면 보리스 크렘보르는 그런 자들과는 구분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자리에 앉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모으고 이끄는 능력. 위에 서는 자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재능. 실비아 크렘보르는 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인이라는점. 그리고 후계자인 오라비가 있다는 한계 때문에 그 재능을 올바른 곳에 쓰지 못하고 있다.

저 재기 넘치는 여인은 누구를 원망할까. 자유는 주었으나 기회는 주지 않은 부친을? 아니면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 봐주지 않는 세상을? 그것도 아니면, 이제껏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하고 눌려 있던 자신을?

***

연회가 끝나고, 배정받은 숙소에 가서 몸을 누인 카인은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낯선 잠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아직도 떠돌이 시절을 잊지 않은 그는 낯선 침대가 아니라 맨바닥에 눕더라도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러니 다소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는 해도, 푹신한 침상에서 잠을 청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왜 이러지.';

스스로도 영문을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카인은 결국 바람이나 좀 씰 작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창에 손을 얹은 그때. 카인은 섬뜩한 한기를 느끼고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러자 창을 가린 얇은 나무판자를 무언가가 뚫고 들어왔다.

'칼?'

얼핏 보면 가느다란 꼬챙이로 오인하기 쉬운 그것은 아주 자그마한 단도였다. 그것을 본 순간. 카인은 우려했던,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다렸던 순간이 닥쳤음을 직감했다.

'허! 정말 대담하군.'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며 몸을 낮춘 카인이 침상 옆으로 빠르게 달렸다. 머리맡 쪽에 둔 검을 쥐고, 그 위에 걸어둔 가죽 갑옷을 힘껏 당겼다.

"레온!"

옆방에 있는 의동생이 부디 아직 잠들지 않았기를 바라며, 카인은 목청껏 외치고 몸을 날렸다. 동시에 나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판자 조각들이 방 안을 뒤덮었다.

'셋!'

크지 않은 창문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들어선 검은 그림자 셋. 카인은 미처 입지 못한 가죽 갑옷을 그들에게 집어던지며 칼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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