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화
레온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하시는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맞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이런 것으로 농을 하겠나."
암살자들에게 공격받던 카인을 레온이 구해주었던 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를 떠올린 듯, 레온이 흐릿하게 웃었다.
"형님도 참 힘들게 사시는군요."
"편하게 살면 아무것도 쥐지 못해."
"글쎄요. 저는 편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조금 적게 쥐더라도 말이지요."
"그럴지도.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
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포기하고 타협하는 자와 그러지 않는 자로 나뉠 뿐이다.
레온은 카인이 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죽음과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사내였다.
필요하다면.
"그러고 보면, 저쪽에서는 형님을 배신자라고 생각하겠군요."
"그렇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저도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그거 고맙군, 사실, 달리 답했다면 서운했을 걸세."
피식 웃은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잔을 들었다.
"상황이 얄궂게 되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처음 자신을 발탁한 이는 보리스다. 그러나 제대로 중용해준 이는 실비아다. 만약 보리스가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 중용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실비아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을 막기라도 했을 것이다.
배신인가? 카인은 그리 생각지 않았다. 배신이란 믿음을 저버리는 것.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에게 믿음을 준 적이 없다. 그러니 어찌 배신이라 하겠는가.
"난 내게 주어진 기회를 잡았을 뿐이야."
"음. 형님의 목표는 출세입니까?"
출세라.
카인은 답을 미루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계획은 명확하다. 마음 역시 분명하고, 다만, 이 사람 좋은 의동생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것일 뿐.
"일단은 그렇게 볼 수 있겠군."
"그 뒤에 뭔가 더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출세를 바라지만, 출세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닐세."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났다면 뭔가 남기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라는 사람이 살다 갔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지."
"거창하군요."
"하하. 꿈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전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카인은 금세말라버린 목을 다시 축였다.
"그럼 형님은 아가씨와 동행하셔야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카인의 물음에 레온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래야 안전할 테니까요. 아가씨가 움직인다면 그 역시 함께할 것 아닙니까. 따라가는 편이 더 안전하겠지요. 이곳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말입니다."
'그'라. 역시 이 용감한 의동생도 그에 대해서는 꽤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인가. 카인은 레온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따라가기는 할 테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네."
"그러면?"
"이번 하잘 행은 아가씨에게도 그렇지만, 나에게도 좋은 기회니까."
"기회……."
"솔롬이 근래에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근래에 판니른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도시인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판니른의 주도는 하잘이지. 판니른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도 여전히 하잘이야. 권력과 재물, 모든 것이 모여드는 판니른의 심장.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엄밀히 따지자면 솔롬은 하잘과 비할 수조차 없다.
솔롬이 화제가 되는 것은 자그마한 성에 불과했던 곳이 빠르게 규모를 키우기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기 때문이다. 즉,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돈이 풀렸기 때문에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이 몰려들면서 잠깐 반짝인 것일 뿐이지 솔롬 자체가 갑자기 거대 도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솔롬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것이다.
크렘보르 가문의 성세가 꺾이지 않는 한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을 거듭하여 번듯한 대도시가 된다 한들, 하잘에 버금갈 정도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하잘에는 오랫동안 판니른의 중심에 서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솔롬은 보리스 공자의 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미 자리 잡은 상대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아. 하지만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외부의 동맹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조력자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과연 그게 쉽게 될까요? 제 말은 그러니까, 보리스 공자가 후계자인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아가씨가 공자와 다퉜다는 이야기도 곧 퍼질 테고, 그러면 아가씨에게 도움을 주려는 이들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타당한 의문이야. 분명 조심스러워하는 이들이 있을 테지. 크렘보르의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괜한 미움을 사고 싶지 않은 이들은 자네 말대로 아가씨와 거리를 두려고 할 걸세. 하지만 그런 이들이 전부가 아니거든."
크렘보르의 위상이 판니른 전역에 드리웠으나, 모두가 크렘보르를 두려워하고 눈치 보는 것은 아니다.
"크렘보르의 분열을 바라는 자들. 그중에서도 후계 자의 눈치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 생각이 다르겠지."
"몰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몰던도 그렇겠지만, 그 외에도 적지 않을 걸세."
"어렵군요. 솔직히,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잔만 몇 번 들었다 놨다 했을 뿐인데 레온의 얼굴은 처음보다 상당히 지쳐 보였다. 카인은 피식 웃으며 사과했다.
"기껏 불러놓고 재미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아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뭐, 알아서 나쁠 것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래. 알아놓아서 나쁠 것은 없는 이야기지. 아무튼,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네. 아직은 머릿속에 그린 그림 중 하나일 뿐이야. 생각한 대로 되었으면 하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
항상 그렇다. 중대한 일일수록 예상대로,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 드물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카인은 생각했다.
***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들은 것보다 더 심하군요."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오래된 폐허가 아니라 최근에 버려진 마을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에 보았던 멀쩡한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바탕 싹 쓸고 간 모양입니다."
"도적들의 소행은 아니야."
"예? 그걸 어찌 아십니까?"
"혈흔이 없지 않나."
"아……."
살라스는 멍하니 두리번거리는 부관을 지나쳐 허물어진 집들을 눈으로 훑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음산한 거미줄과 한기만이 남은. 그러고 보면 폐허라는 표현도 틀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징발의 수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그럼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백성들의 부담도 늘어가고 있었다. 사람을 데려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형편이 안되는 가구에서는 집에 있는 온갖 물건들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심지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식기까지 거둬들인다고 하니, 야반도주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영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다 망가지고 나면, 전쟁에서 승리한들 뭐가 남을까요."
실언이었다. 군인으로서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말. 그러나 살라스는 부관을 책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은 이 전쟁에 별로 열성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심드렁한 쪽에 가까웠고, 살라스 역시 그 영향을 받은 탓에 황자들의 전쟁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이대로 계속 간다면."
"높으신 분들은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실까요?"
조소 섞인 목소리. 살라스는 시선을 거두고 말에 다시 올랐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묻는군."
"송구합니다. 그보다…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래서는 오히려 야영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본래는 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나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음산한 곳에서 잠을 청했다.
가는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더 쌓일 판이 아닌가.
"떠난다. 운이 좋다면 적당한 동굴이라도 찾을 수 있겠지."
"옛. 그럼 바로."
인적이 끊긴 마을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살라스의 말처럼 적당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짐승이 살던 굴인지 누린내가 조금 나기는 했으나 하룻밤 잠을 청하고 가기에는 충분했다.
"……."
자그마한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살라 스는 가장 안쪽, 조금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붉은빛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 시국에도 서로 으르렁대다니. 한심하군요."
"음?"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들어 부쩍 높으신 분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습니다."
"뭐……."
살라스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가 솔롬으로 가는 이유가 크렘보르 남매의 집안싸움을 중재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함께 하는 병사들은 물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부관마저 알지 못했다. 군터가 특별히 비밀로 하라 한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집안일이 바깥에 흘러나가면 모양새가 좋지 않지 않다. 때문에 살라스는 되도록 이번 일을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는 걸까요? 제국의 주인을 가리는 싸움 아닙니까. 대의가 무엇인지, 귀족 나리들은 분명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러는 자네는 아나? 대의가 무엇인지?"
"그거야… 더 큰 것이지요. 성 하나, 도시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나라를 두고 싸우는……."
"그래 봐야 싸움이고 전쟁이지. 그렇다면 단순히 규모의 차이 아닌가?"
"그 규모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싸움이 빨리 끝나야 고통받는 백성들도……."
살라스가 냉소하며 말했다.
"순진한 말을 하는군."
"……."
"귀족들이라고 특별할 것 같은가?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빵 한 덩이에 욕심을 내는 대신 반짝이는 것들과 권세에 욕심을 내지. 큰 것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그것도 대의라면 대의겠군."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는 살라스의 모습에 부관은 당황했는지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저 선대의 유산을 이어받았을 뿐, 스스로 이룩한 것은 없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의니 뭐니 하는 것들은 모두 말장난일 뿐이지. 언젠가 장군께서 말씀하시더군. 별 볼 일 없는, 자격 없는 놈들이 뭐라도 되는 양 설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이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네."
살라스의 손이 팔뚝까지 가린 건틀릿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