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화
판니른 총독. 운바소르 아실의 생일이 보름 뒤로 다가왔다.
어떤 이들에게는 한참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야 할 큰 행사일 테지만, 크렘보르 가문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판니른 총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완전히 얕잡아보는 것은 아니라서 그들도 나름대로 성의를 표할 준비는 하고 있었다.
"물건은 다 준비가 됐습니다만…인선에 대해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상석에 앉은 보리스가 생각에 잠긴 듯 대꾸 없이 침묵했다. 그러다 마찬가지로 말없이 있던 실비아를 보며 물었다.
"네가 가겠느냐?"
"제가…말입니까?"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실비아의 말투는 딱딱하고 정중했다. 그녀는 자신을 지목한 오라비에게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표정을 되돌렸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캄브라이의 하수인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총독이다. 우리가 성의를 보이면 그쪽도 좋아하겠지. 내가 직접 갈까 생각도 했다만, 아무래도 맡고 있는 일이 있으니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다."
실비아는 보리스의 말을 곱씹으며 그 속에 숨은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바로 얼마 전에 대차게 충돌한 오라비가 자신에게 순수한 호의를 베풀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것은 분명 함정이거나 음모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거절하는 것이 맞다. 상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하다거나, 아니면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하는 거다.
하지만, 숨은 의도를 제하고 본다면 이것은 좋은 기회다. 누가 뭐라 해도 하잘은 판니른의 주도이고, 총독의 생일을 맞아 각지에서 온갖 유력자들이 모여들 터.
그들과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적잖은 이득이다. 인지도에 목마른 실비아로서는 특히 놓치기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좋은 기회를 단순히 의심스럽다는 이유 만으로 거절한다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어찌 생각할까. 역시 여인이라서 겁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너무 많이 나간 것일 수도 있지만, 실비아로서는 그런 부분에까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제가 가지요."
결국, 그녀는 오라비가 던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위험합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산드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색하며 반대했다.
"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어."
"하아. 아가씨. 위험한 함정의 앞일수록 더 맛있는 미끼가 놓이는 법이라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혹 공자가 암살자들이라도 보낸다면 저희가 어찌 대응하겠습니까."
"사절단의 호위병력은 내가 꾸리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보리스를 비롯한 몇몇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대놓고 너희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흐른다고 해도 오라버니가 내 목숨을 노리지는 않을 거야. 아니, 그러지 못해."
"어째서요?"
산드라는 실비아의 자신만만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력 앞에 한도 끝도 없이 비정해지는 이들이 귀족이라지 않은가. 아니, 비단 귀족만 그런 게 아니다. 티끌만 한 이익 앞에서도 얼마든지 잔혹하게 변하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을 테니까."
실비아가 간단히 답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오라비와의 우애라던가, 인정 같은 것을 믿는 게 아니다. 그녀 자신도 가지고 있는, 부친에 대한 두려움을 믿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남매간의 유치한 다툼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순간, 모른 척 눈 감고 있던 부친이 개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볍게 혼이 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지금 오라비가 가진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이며, 그가 꿈꾸는 미래 역시 전부 어그러질 것이 분명하다.
오라비는 그것을 두려워 할 것이기에, 절대 자신에게 직접 손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아가씨."
"니클라스 공."
그날 저녁. 실비아는 그녀의 은밀한 조력자와 만났다.
니클라스.
그 이름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를 존중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녀가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본래 니클라스는 부친의 명을 받아 드러나지 않게 그녀를 도왔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비록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곁에 남아 은밀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예."
"무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예."
언제나, 배려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단호한 태도. 마치 부친을 보는 것 같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에 실비아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나도 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
"믿을 만한 병력이 필요합니다. 용병이라도 상관없어요. 다른 이의 입김이 닿지 않는,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 병력이면 됩니다."
"암습을 우려하십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보리스 공자는 아가씨를 해하지 못합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예. 물론 그렇겠죠."
생각하고 있었던 바이기는 하나, 니클라스의 입으로 다시 한번 확인받으니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실이 바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구할 수 있나요?"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니클라스의 능력을 확인한 실비아였지만, 이번만큼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인가요? 공을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라버니의 입김이 솔롬 전체에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압니다만, 입김이 미치는 것과 뜻대로 다루는 것은 다릅니다. 군부는 특히 더 그렇지요. 군부 인사의 대부분은 장군에게 충성하고, 그 밑은 더욱 그렇습니다.
군부가 부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머리로는 말이다.
군부와 엮인 적이 이번 상행에서밖에 없는 실비아로서는 막연하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니클라스의 단호한 대답이 그 불안을 걷어주었다.
'믿을 수밖에.'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지금으로서는 조력자들의 힘힘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문득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져, 실비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니클라스는 돌아간 후였다.
***
"그래서…그 사절단에 함께하시게 되었다고요?"
"그래."
레온과의 술자리는 이제 카인에게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이제는 정말 취미가 되었다. 즐겁고 마음이 놓이니, 이런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흐음. 사절단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건간에, 좋은 기회가 아닌가. 총독은 물론이고, 총독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몰려온 이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중요하지."
카인이 잔을 비우며 말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산에서 보냈기 때문인지, 레온은 권력의 생리에 대해 무지했다. 그나마 이번 상행에 함께하면서 어느 정도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는 파악한 듯했으나, 카인이 보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지금까지 아가씨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저 크렘보르의 여식 정도에 불과했네. 거기에 조금 더 추가하자면 과년한, 성미가 걸걸한 정도겠지. 별로 좋은 쪽은 아니지만, 그거야 사실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실비아 크렘 라는 이름은 항상 다른 이름에 뒤따르는 이름이었다는 거네. 홀로 불리는 이름이 아니었어."
"알 것도 같습니다만, 모호하군요."
"간단하게 생각해서, 별로 가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는 거네. 언제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크렘보르라는 이름과는 별 상관도 없게 될 거다. 사람들은다 그리 생각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보리스 공자에게 반기를 들었잖나. 지금이야 솔롬안에서만 돌고 있지만, 곧 바깥으로 퍼져나갈 테지. 아마 보름 후면 하잘에도 모르는 이가 없게 될 테고, 그러면 자연히 실비아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다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겠나?"
"으음. 그렇겠군요."
완전히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형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느낌. 그런 생각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이 순진한 의동생의 모습에 웃음이 날뻔했으나, 카인은 애써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보리스 공자가 스스로 치부를 드러낸 것이네. 당연히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암살이지. 솔롬 안에서 혈육에게 손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바깥으로 나가게 한 다음 조용히 처리하는 거야. 그러는 편이 보다 깔끔하지."
"암살…입니까."
반응이 영 떨떠름하다. 이해했다. 이전에는 구도자였고, 지금은 군인이지 않은가. 그런 레온에게 암살자들은 영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긴, 암살자를 좋게 생각하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런데, 내 생각이지만 아마 보리스 공자가 아가씨를 암살하려 할 것 같지는 않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크렘보르 가문은 상당히 기형적인 가문이라네. 가주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야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다 그렇지만, 크렘보르 가문은 그 정도를 뛰어넘었어. 가주의 말 한마디면,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일이라도 곧바로 정리되곤 하지."
"그러니까 형님의 말씀은, 보리스 공자가 가주가 두려워서 동생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겁니까?"
"정확하네."
"그럼 아가씨를 솔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아가씨에게는 손을 쓰지 못하더라도, 그 주변에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그래. 이를테면 나 같은 자들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