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화
보리스와 짤막하게 담판을 짓고 난 후, 실비아는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전에도 오라비에게 대든 적이 없지 않지만, 이번처럼 진지하게 맞서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카인이 말했듯 대응 역시 가볍지 않으리라.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지만, 뒷일에 대해서는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이 통쾌함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었다.
"어떠셨습니까?"
"통쾌하기는 하더군요."
카인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제법 근사한 웃음이다.
실비아는 시선을 돌리며 잔을 들었다. 영롱한 빛을 띠는 적포도주는 그 빛깔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이전에도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마셨지만 이런 맛은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술맛을 결정짓는 건 마시는 이의 마음이라는 말이 정말 틀리지 않은 듯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시겠지요."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다른 건 잠시 미뤄두고 싶군요. 잠깐이나마 이 후련함을 즐기고 싶어요."
"이해합니다."
거침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히 남의 눈치를 보는 것 없이 살아온 실비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카인의 앞에서만은 다소 조심스러워졌다. 황도 귀족 출신이기 때문일까. 귀족이라고는 해도 그 역사가 한 세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인지,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의 귀족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위축되곤 했다. 물론 절대 그런 내색은 하지 않지만.
"발라히즈라는 자를 아시나요?"
"아니요. 제가 알아야 하는 이름입니까?"
"이름난 시인이라더군요. 황도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공연까지 하던 자라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저는 모르는 자입니다.
"일전에 공도 가객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혹 아는 자일까 하고."
귀족씩이나 되는 자가 시와 노래를 팔며 살아야 했던 과거를 짚음으로써 과거의, 그리고 지금의 곤궁한 처지를 꼬집는다. 유치하고 괜한 심술임을 알면서도, 실비아는 그렇게 했다. 이런 모습이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곤궁했던 시절, 살기 위해 변변찮은 재주를 팔았지요. 그저 배우고 익혔을 뿐, 그쪽 방면에 크게 관심을 둔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발라히즈라는 자가 제법 이름을 알린 시인이라고 해도, 제가 그 이름을 들은 적은 없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흐응. 그렇군요."
"실망시켜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군요."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니까요."
"아가씨께서는 시와 노래를 좋아하십니까?"
"그런 편입니다. 시인과 가객은 종종 내가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니까요."
카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벼운 행동에 실비아는 다시 살짝 불쾌해졌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그나저나 아가씨."
이제껏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빼빼 마른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하무로, 솔롬에 기반을 둔 상인으로, 그 자신까지 합치면 4대에 걸쳐 상업에 종사해 온 이였다. 이번에 실비아가 이끈상행에 직접 참여했던 이이기도 했고,
"주의하셔야 합니다. 보리스 공자가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상인으로서 잔뼈가 굵은 그가 당연한 말이나 하려고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본래 그는 이 자리에 자리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귀족도 관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소유한 가업이 그리 대단한 수준인 것도 아니었다. 이번 상행으로 기회를 거머쥐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감히 실비아 크렘보르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충언을 가장한 모험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가씨가 자신의 무례함을 책잡지 않으리라는 기대에 근거한.
"그래. 그럴 테지."
그런 그의 모험은 성공인 듯했다. 실비아 크렘보르는 불쾌해하는 대신 다시 잔을 입에 가져갔다.
"보리스 공자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그를 따르는 세력은 솔롬 곳곳에 퍼져 있고, 심지어 솔롬밖에까지 뻗어 있지요."
"짐작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나 보군."
하무로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이번만은, 충성심이 앞섰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하지만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해."
"명심하겠습니다. 아가씨."
하무로는 목덜미가 서늘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용기를 낸 자신을 칭찬했다.
비록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으나, 어떻게든 눈도장은 찍지 않았나. 실수를 과잉 충성의 발로로 용서받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기억되기만 한다면, 앞으로 충성을 증명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롬바드 공은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실비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불린 순간. 다소 경직되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온기가 감돌던 분위기가 한겨울의 들판처럼 차갑게 변했다. 실비아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쪽으로는 눈길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실비아가 그를 불렀으니, 모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봐야 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가면을 쓰고 있는 사내. 그에게서 자연스레 불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허리춤에 있는 칼 한 자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음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도 역시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고.
"예. 딱히."
성의 없게까지 들리는 짤막한 답. 실비아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나직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불길함과 두려움을 느끼던 이들은 속으로 제발 아가씨가 저 사내를 괜스레 자극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롬바드 공은 본래 친위대 출신이지 않습니까. 오라 버니의 손이 곳곳에 닿아 있음을 아는데, 혹 친위대 쪽도 그런가 해서 여줬습니다."
"저희는 오직 장군께 충성합니다."
"…그렇군요. 불쾌하게 들렸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자리는 가라앉은 분위기로 끝이 났다.
자리가 파한 후, 산드라가 조심스럽게 실비아에게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왜 롬바드 공을 자극하겠느냐고?"
조심스러워하는 산드라에 비해, 실비아는 태연했다. 그녀는 산드라가 의아해하리라 짐작했다. 산드라 뿐만이 아니라, 조금 전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예. 롬바드 공은 아가씨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글쎄. 왜일까."
약간은 감정적이었음을 실비아 본인도 인정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산드라의 말처럼 그 힘겨웠던 여정 내내, 롬바드는 그녀를 위해 헌신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가며, 수백이나 되는 적의 목을 베었다. 그런 그에게 크게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좋은 자리에서 괜히 자극이나 한 것은 분명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사람이야."
"아가씨께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건가요?"
"그래. 그는 내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없다."
그가 그녀를 위해 해준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힘이 필요해서이기도 하다. 상행은 끝났지만, 여전히 위험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나는 내심, 조금 전 그가 확실히 답해주기를 바랐다."
정확히 말하면 확실히 답을 하기는 했다. 다만 그 답이 그녀가 원치 않는 답이었을 뿐.
'하지만…그래. 경솔하기는 했어.'
따로 사과해야겠지. 사과 같은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한다.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피 흘리며 자신을 지켜주었던 이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
"음음."
바오룸의 고개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겉으로만 보면 공연에 아주 심취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카인은 그가 저 아래서 목청을 키우고 있는 시인의 말 중 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가 아는 바오룸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설마하니 몇 달 사이에 사람이 바뀌지는 않았을 테니, 저 까딱이는 고갯짓 역시 보여주기 일것이다.
"내가 듣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자네가 듣기엔 어떤가?"
"나쁘지 않군요. 다소 구식이라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구식?"
바오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전통을 이야기하고, 황제를 칭송합니다. 고전적이지요. 고전적인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조금 식상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지요."
흔히 고전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이 짓는 시와 노래는 표현만 달리할 뿐, 대부분이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런 이들마저도 사실은 소수다. 스스로 창작하지 못하고 선대가 남긴 시가를 달달 외우며 목소리만 다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자네는 고전주의에 부정적인 것 같은데?"
바오룸의 지적에 카인은 웃으며 답했다.
"예. 사실 그렇습니다. 새롭지 않은 것은 결국 진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야흐로 변혁의 시대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긋한 말을 늘어놔봤자 귀에 들리기나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 시큰둥했구만."
"기껏 표까지 구해주셨는데 송구할 뿐입니다.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좋군요."
"프흐흐. 뭐, 어차피 남아도는 표였네. 같이 올 사람도 마땅히 없던 차에, 자네가 생각나더군. 내 무식함을 알면서도 내 허영을 받아줄 만한 사람이 자네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가 않더란 말이지."
"……."
"그래도, 무안해지지 않아 다행이야. 기껏 초대했는데 거절당하면 얼마나 부끄러웠겠나."
"제가 어찌 감히 바오룸님의 초대를 거절하겠습니까."
"상황이 상황이지 않은가. 뭐, 나는 특별히 유감은 없네.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자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도 생각지 않아. 기회가 오면 잡아야지.
하지만…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군."
바오룸의 시선이 아래의 무대로 향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인이 땀을 흘려가며 우렁차게 시를 읊고 있었다. 그 내용의 진부함을 떠나서, 목소리에 담긴 힘만큼은 과연 황도에서 이름을 날린 시인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인가?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지.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네만."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지. 아무튼, 조심하게나. 요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아."
카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