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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90화 (890/1,064)

890화

실비아는 이번 상행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금전적인 이득도 이득이지만, 그런 것은 그녀에게 있어 사소한 일부분에 불과했다.

이번 상행으로 얻은 가장 큰 이득. 그건 바로 사람이다. 상인들의 지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 자신의 인지도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을 얻었다는 것. 그것이 실비아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득이었다.

"치졸한 술수지만, 사실 이런 장난은 흔합니다."

흔하다는 말보다 장난이라는 표현이 더 거슬린다.

실비아의 시선이 말끔한 인상의 청년, 카인을 향했다.

비록 지금은 가문을 잃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으나 그렇다 해도 황도의 귀족 출신. 그래서일까. 이런 비열한 수작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한다. 그 덤덤함이 거슬리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이 더러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있을 것 같다는, 다소 우스운 믿음 때문이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이참에 담판을 지으시지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단순한 대답. 실망스러웠지만, 실비아는 내색하지 않고 되물었다.

"담판?"

"예."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피를 보는 날과 보지 않는 날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날들 속에서, 실비아는 여러 사람의 진가를 확인했다. 온갖 그럴싸한 가죽으로 자신을 둘둘 말았으나,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자들. 그런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래도 개중에는 정말 보석 같은 자들이 몇 있었다. 카인은 그 얼마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신분, 외모,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빛나는,

"장군께서 아가씨께 혼사의 자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가씨께서는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에는 정당하게 선을 그으실 수 있지요. 지금까지는 너무 점잖게 행동하셨으나, 아무래도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리스공자와 만나 담판을 지으시고,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시지요. 다시는 거슬리는 말들이 나돌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군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가씨께서 단호함을 보이신다면 말이지요."

카인의 눈빛에는 굳건함과 힘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을 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강하게 나가셔야 합니다. 불만을 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리스 공자에게 보여주십시오. 아가씨께서 여차하면 그분과 후계 다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실비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전에 할렌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카인은 실비아에의 표정 변화는 읽었어도, 가면 뒤에 가린 할렌의 반응은 읽지 못했다.

"정말로 그러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이렇게 나올 경우,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시라는 겁니다."

"오라버니는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협박에 굴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요."

"짐작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엔, 그런 식으로 나가봐야 아무것도 나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변하기는 하겠지요. 적어도 이런 식으로 가볍고, 치졸한 수를 부리지는 않을 겁니다."

"……."

실비아는 카인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혹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록 그녀가 오라비와 각을 세우고는 있지만, 진지하게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마음도 없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카인의 말대로 따른다면, 그들 남매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라비도 그녀를 더는 '성가신 누이'정도가 아니라 '정적'으로 다시 생각하겠지.

'어차피 내게 선택지는 없었어.'

인형이 되어 실이 움직이는 대로 춤을 추느냐, 아니면 인형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증명하느냐. 처음부터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지만, 선택을 강요한 건 오라비다.

"그렇게 하지요."

실비아의 눈에서 망설임이 사라지고, 결연함이 떠올랐다.

***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약간은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침묵을 지키던 로우렌이 슬쩍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님을요?"

"그래. 어머니가 계셨다면…녀석이 저렇게 장성한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했지."

"오라비에게 대든다고 화를 내지 않으셨을까요?"

"어머니께서는 여느 어미들과는 다른 분이셨다. 형제라고 해도 싸워야 할 일이 생기면 대차게 한 판 싸우는 게 낫다고 여기셨지.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하고 앙금을 남기느니, 서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한바탕싸우고 말끔히 털어버리는 게 차라리 나은 거라고."

"공자님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글쎄."

보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의 가족관은 존중하지만, 사실 그들 남매는 어려서부터 싸운 적이 거의 없었다. 소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널 알지 못했구나.'

조금 전. 속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고 돌아서던 동생을 떠올렸다. 지금 벌이는 유치한 짓거리를 멈추지 않으면 그때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정말로 자신이 적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도 했고, 조금은 당황했고, 조금은 기꺼웠으며, 조금은 화가 났다.

아니, 솔직히 조금 많이 화가 났다.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당당해지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설마 여동생과 이런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후우."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물렀다. 근래 들어 수면 시간이 부족해서일까, 종종 머리가 무거웠다.

"조금 쉬시지요."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괜한 말을 하는구나."

로우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야 마님께 변명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나온 마님은 당연히 작고한 '마님'이 아니라 매일 보리스의 눈 밑에 진 그늘을 보며 속상해하는 마님을 이름이었다.

"지금의 휴식은 태만이다."

"설마 마님께도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보리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부인은 나날이 수척해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속상해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 알고 있다. 지금은 조금의 휴식도 용납되지 않는 시기라는 것을.

그것을 알기에, 속이 상해도 최대한 삭이고 삭이는 것이다. 그러다 도저히 삭이지 못한 마음의 일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고.

"애석하군. 내게도 통치자의 재능이라는 것이 있었더라면."

"제가 알기로, 그런 재능을 타고나는 이들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해가지요. 자책하실 것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차피 일이야 아랫사람들이 다 하고, 그들이 한 일에 마침표만 찍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단언컨대, 평생 위에 서 본 적 없는 이들의 헛소리다.

통치자의 역할은 다스리는 것. 그건 달리 말하면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결정과 책임. 경험해본 적 없는 이들은 절대 알지 못하는 무거움. 보리스는 근래 들어 그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다.

아랫사람을 믿는 것과는 별개다. 아무리 그들을 믿더라도, 자신의 결정 한 번에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면 양어깨에 쇳덩이가 올라간 듯하다. 로우렌을 비롯한 몇몇은, 그 무게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보리스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무게에 짓눌리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

로우렌은 말이 없어진 보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저마다 짐 한두 개씩은 짊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짐의 무게가 같은가?

'그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착각이다. 옷가지 몇 개 밖에 안 되는 짐을 큼직한 바윗덩어리라고 착각한 채, 우는 소리를 하는 얼간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바위를 등에 짊어지고도 안간힘을 쓰며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이들도 있다.

'당신 곁에 있는 머저리들이 무슨 말로 당신을 치켜 세울지 몰라도, 사실 당신은 그저 철없는 귀족 영애일 뿐인 겁니다. 아가씨.'

진지하게,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실비아 크렘보르가 자유로운 삶을 갈망한다면 그녀를 건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지위와 힘이 부족하지도 않은 비오르 몰던은 그녀의 짝으로서 제격이다.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말랑말랑한 사랑이야 씨 없는 사내의 아내가 된 후에 꿈꿔도 충분하지 않은가.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귀부인이 애인을 둔다고 해도 세상은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심지어 드러내놓고 같은 마차를 탄다고 해도, 역시 이해할 것이다. 비오르몰던이야 불쾌하겠지만, 감히 크렘보르의 핏줄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테고.

'사람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 것을 무작정 선망하기 마련이라지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습니까.'

사내로 태어나, 맏이로 태어나 후계자가 되고 모든 것을 누린다고 생각하는가. 사내로 태어났기에, 맏이로 태어났기에 져야만 했던 짐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전장에서 영광을 얻었다고 부러워하지만, 매 순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던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살라스 공이 온다는군."

상념에 잠겨있던 터라, 로우렌이 보리스의 말에 반응하는 것은 조금 느렸다.

"살라스님이?"

"우리가 으르렁대고 있다는 것을 들으신 모양이다."

"그렇다면……."

"모르겠군."

다른 이라면 모를까. 살라스가 온다면 그 의미는 크다. 살라스는 가주의 최측근이며, 성주의 대리를 맡기도 했을 정도로 지위와 인망이 두텁다. 그런 그가 단순히 전령 역할이나 하려고 먼 길을 오지는 않을 터.

"어찌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보여주십시오."

"음?"

"공자님은 공자님이 하신 일들이 부끄러우십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무엇 하나 숨길 필요도, 어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후계자로서, 공자님은 해야 할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장군이든 살라스님이든, 분명 알아주실 겁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리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그래.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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