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화
"과했네. 점점 더 과해지고 있고."
"그렇습니까?"
토어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로우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할렌의 자식이라는 점을 제쳐두더라도 재치 있는 젊은이라는 점만은 그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재치를 음험하게 발휘한다는 쪽이 문제였다. 이번 일만 봐도 그렇다. 실비아 크렘보르와 비오르 몰던의 일을 지어내고 소문낸 것은 바로 로우렌의 작품이었다. 덕분에 실비아 크렘보르는 지금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고,
"태연하군."
"지레 겁먹고서 떨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크렘보르와 몰던, 두 가문을 가지고 놀았지. 몰던 쪽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그리고, 장군께서는 가만히 계실 것 같은가?"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던가요?"
"이야기했던 것과는 다르니까 하는 말 아니겠나."
처음 로우렌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단지 가볍게 분위기를 만드는 정도에서 그치리라 생각했다. 그만의 착각이 아니라, 로우렌이 그런 투로 이야기를 했었다. 몰던을 끌어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도 비오르 몰던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었고.
비오르 몰던은 가볍게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몰던 가주의 동생이라는 점보다, 그 자신이 몰던 가문의 치부와 같은 자이기 때문이다. 세대가 바뀌고 새로운 주인이 자리에 오르면서 이전 세대와 남겨진 자들을 숙청하는 거야 종종 있는 일이라지만, 현 몰던 가주가 행한 일은 종종 있는 일이라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몰던의 위세 때문에, 혹은 제법 세월이 흘렀기에 다들 쉬쉬하고는 있으나 당시에는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찾아보기 힘든 잔혹한 자가 가주 자리에 올랐다면서 말이다.
비오르 몰던은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 재앙을 피하고, 그 잔혹했던 숙청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현 몰던 가주의 치부나 마찬가지다. 혈통 외에,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는 귀족 사회에서 대우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로우렌은 그런 자를 건드렸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까,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몰던의 위세가 높다고는 하지만, 크렘보르 역시 그 못지않습니다. 불쾌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반응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크렘보르의 독녀가 고자에게 시집이라니. 누가 들어도 헛소리지요."
"반응하지 않을 테니 아무 문제 없다는 건가? 속에 쌓이는 반감은 어찌하려고?"
그제야 로우렌이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토어릭과 눈을 마주쳤다. 토어릭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로우렌의 눈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온갖 경험을 해온 그가 고작 책상물림 젊은이에게서 위협을 느낄 일은 없다.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은 로우렌이 아니라 그가 품고 있을 사상이었다.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말게.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야. 그 어떤 것보다도, 심지어 목 앞에 멈춘 창칼보다도 더 무섭지. 행동은 결과일 뿐 이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지. 자네는 지금 사소한 이유로 적을 만들고 있어. 그것도 절대 얕볼 수 없는 강한 적을."
"귀중한 가르침, 뼈에 새기겠습니다. 하지만 토어릭님의 의견은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르군요."
"무슨 말인가."
"사람이 무섭니, 결과와 과정이 어떻니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힘의 논리 아니겠습니까.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이를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지요. 정말 막다른 곳까지 몰려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발악하는 게 아닌 이상은 말입니다."
"……."
"그간 크렘보르 가문은 꽤나 조용했습니다. 아니, 얌전했지요. 제가 비록 어리고 경험이 적습니다만, 그래도 지금껏 보고 배운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건, 사람은 직접 제 눈으로 보여야 비로소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건가?"
로우렌이 짝! 소리가 나도록 크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과장된 몸짓. 그러나 조롱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예.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약자는 강자의 앞에서 얌전해지지요. 명분이니 뭐니, 그런 것들은 치장 같은 겁니다. 야만적인 행위를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강하냐인데, 사실 누가 더 강한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치하군."
"예. 유치하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은 유치하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성인이 되면 달라집니까? 제 생각에는 아닙니다. 여전히 똑같이 유치합니다. 큰 틀에서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지 않아요. 다만 조심스러워질 뿐."
"뭐, 그렇다고 치지. 그래서…이대로 계속 가겠다 이건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좋아."
토어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득하려 했지만, 사실 통하지 않을 거라 짐작했었다. 할렌의 둘째 아들은 겉으로는 유들유들해 보이지만 고집이 상당하다. 그가 고집을 꺾는 경우는 명령이거나, 자신이 스스로 납득했거나.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장군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걸세."
"그럴까요?"
"그래. 분명 그러실 테지. 그러니 준비해야 할 걸세. 변명거리든, 뭐든."
"그래야지요. 참. 정말이지, 곤란한 분이로군요."
"뭐라?"
처음으로 토어릭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러자 로우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듣기에 언짢으실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장군께서는 군인으로서, 그리고 통치자로서 틀림없이 대단한 분입니다. 하지만…후계자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선대입니다."
토어릭은 이어서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잠시 삭여야 할지 고민했다.
비록 지금은 솔롬에 남아 보리스를 돕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군터 크렘보르에게 충성했다. 보리스를 따른다고 해도 그 충성심만은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 그의 앞에서 군터 크렘보르를 욕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로우렌이 하는 말은 교묘하게 선에 걸쳐져 있었다.
훌륭한 군인은 훌륭한 학살자다, 라는 말이 있다.
군인의 본질을 말한 말이기도 하지만,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한 말이기도 하다. 같은 의미에서, 방금 로우렌이 한 말도 군터 크렘보르를 욕보이는 말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보리스 크렘보르의 친우이자 수하였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토어릭은 화를 억누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로우렌이 다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공자님은 군인이셨지요. 뭐, 지금도 당신께서는 언제든 기회만 되면 전장으로 떠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만…그거야 흘려듣더라도, 어쨌든 그분께서는 어린 나이부터 군인으로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세우신 전공은, 동 나이대의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비슷한 수준인 자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지요."
"그랬지."
토어릭은 로우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꾸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자신이 반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롬의 사람들은 그런 공자님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연하게 여기지요. 왜?
그분께서 군터 크렘보르 장군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야 제법 흔하지만, 공자님의 경우는 더 지독하지요. 장군께서는 여전히 현역이시고, 계속해서 쌓여가는 그분의 업적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감히 장담하건대, 공자님은 평생 인정받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군인으로서는 말입니다. 너무나 대단하신 선대의 그늘에 평생 갇혀서, 숨 막히는 고통에 허덕이겠지요."
"그건 후계자의 몫이네. 증명하고 감당하는 것. 그것이 선대를 잇는 후계자의 의무지. 의무가 버겁다고 울기라도 한단 말인가?"
내정한 반박에 로우렌은 다시 반박하는 대신 선선히 인정했다.
"저도 압니다. 알아요. 선대가 위대했던 것이 어찌 선대의 잘못이겠습니다. 잘못이라면 뒤따르지 못하는 후대의 잘못이겠지요. 말씀처럼,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잘난 자에게는 잘난 자의 방식이, 못난 자에게는 못난 자의 방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따라 할 수는 없다고 해도, 다른 방법으로 뒤를 쫓을 수는 있겠지요."
"그게 이건가? 하나뿐인 동생을 저열한 협잡의 구덩이에 밀어 넣는 것?"
토어릭의 비아냥 섞인 물음에 로우렌이 정색했다.
"예. 그렇습니다. 한심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허나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하지요.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아가씨 쪽입니다. 안 그래도 힘겨워하는 오라비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짐을 더 얹어주지 않았습니까."
로우렌은 세상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보리스와 어울렸다. 당연히 실비아와도 나름대로 친분이 있었고, 정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실비아에게 느낀 실망감은 더욱 컸다. 물론, 그 실망감 때문에 그녀를 난처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하나뿐인 동생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고요. 참으로 안타깝지 않습니까? 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밖에서는 의심받는 후계자라니."
"과장일 뿐이야. 장군께서는 일찍부터 공자를 후계자로 공표하셨네."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사실 꽤 괜찮지 않습니까? 나이 차이야 조금 난다지만, 아가씨께도 나쁘지 않은 조건일 겁니다."
"무슨 말인가."
"아가씨께서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그분의 취향이 범상치 않을 가능성이 크지요."
"뭐…그럴 수도 있지."
"장군께서 혼사의 자유를 주셨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격이 맞는 가문과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가문과 이어지면 아무리 아가씨라고 해도 이래저래 불편한 부분이 많아질 겁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비오르 몰던은 고자가 아닙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군인치고는 열려 있다지만, 토어릭도 결국 군인인지 은근히 순진한 면이 있었다. 로우렌은 말해 뭐하냐는 듯 짓궂게 웃었다.
"이거 참. 이런 말까지 제가 직접 하게 만드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고자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명목상으로만 부부일 뿐이지요. 듣자 하니 귀족 가문에서는 부부가 서로 애인을 두는 일이 제법 흔하다던데, 아가씨께서도 그러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당당히 함께 마차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누가 흠을 잡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토어릭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