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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88화 (888/1,064)

888화

"모페이브님."

"오랜만이오.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 할렌 공? 롬바드 공?"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호칭 따위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모페이브는 할렌, 혹은 모페이브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어떻소? 이상 징후 같은 것은?"

모페이브는 할렌에게 자리를 권하며 본인도 맞은편에 앉았다. 음침한 지하실이지만 탁자와 의자, 다른 잡다한 도구들을 포함해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없는 것 같지만…모르겠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군요."

"혼란스럽지는 않소?"

"말씀하셨던 대로, 시간이 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소. 영혼이 육신에 어느 정도 안착한 것으로 보이는군.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모험이었고, 도전이었으니까.

술사로서, 구도자로서 의욕을 부리기는 했지만…내심 걱정도 많았소."

"제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걱정하신 겁니까."

"그것도 그렇고, 공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장군께서 가만히 있지는 않으셨을 테니까."

할렌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하시군요."

"거짓을 말해봐야 뭐하겠소. 뭐, 속지도 않을 것 같고."

할렌과 모페이브의 관계는 오랫동안 봐온 사이,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정도에 불과했다. 할렌은 사교도 출신이면서 동시에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 즉 술사인 모페이브와 가까이 지내기도 힘들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데면데면하게라도 봐온 세월이 제법 오래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이다 보니 이제는 모페이브가 전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조금 돌려보도록 하지. 상행은 어땠소? 국외 세상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을 터인데."

"모페이브님도 가보셨습니까?"

"아주 예전에, 잠깐. 공도 알다시피 내 출신이 출신이지 않소.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지. 제대로 정착하기 전에 말이오."

할렌은 물론 모페이브가 말한 국외가 소국 연합의 땅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본래 모페이브는 바크렌의 사교 무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국외란 동쪽이 아닌 서쪽일 것이다. 그러니까, 고향 땅 말이다.

'고향이라.'

할렌은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태어난 땅. 북부의 대초원 역시 제국의 시선으로 보면 국외였다. 야만의 땅. 멸시가 담긴 표현이지만 제국에서 꽤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그 멸시도 근거가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국의 권역에는 질서가 있다. 황제가 세운 단 하나의 질서. 그 넓은 땅. 그 많은 사람이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본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반면 국외에는 질서가 없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다. 그렇기에 오히려 무질서하다. 무질서. 그것이 바로 제국이 말하는 야만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결국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똑같더군요."

"그렇지. 그 또한 맞는 말이오.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은 다른 듯해도 결국 다 비슷비슷하지."

상행 내내, 온갖 인간군상들을 마주쳤다. 그중 대다 수는 도적이거나, 도적의 마음을 품은 이들이었다. 칼에서 피 냄새가 가실 날이 없는 여정 중에, 잠깐은 질린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험난한 여정을 자처한 실비아에게 내심 혀를 차기도,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백 명 남짓한 마적 무리를 쓸어버린 후, 놈들의 수급을 챙겨 한 도시에 입성했을때. 대로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늘어선 시민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울부짖으며 달려 나왔다. 창에 꽂힌 수급 중 하나를 보며 통곡하던 노파, 할렌은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노파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아니, 깨달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한 이유는, 사람이라는 것이 결국 다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눈 두 개, 팔 두 개. 다리 두 개.

비슷한 외관만큼이나 내면도 비슷하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짐승이 살고 있다. 그 짐승이 눈이 뒤집혀 사냥에 나서느냐, 아니면 울타리 안에서 얌전히 먹이를 먹고 사느냐에 따라 삶이 갈린다.

"소국 연합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목소리가 큰 곳들은 있어도 우두머리라고 할 만한 곳은 없었지요. 서로 눈치를 살피기 바쁘고, 속셈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누군가는 균형이라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난립이라고 말한다. 할렌은 후자였다.

"왕이 아닌 자들이 왕을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흐음. 많이 달라지셨군."

"매일 피를 보거나, 피를 닦아야 했습니다. 머리를 비우는 일들만 계속 이어지다 보니 이런저런 잡생각만 많아지더군요."

"좋은 일이오. 생각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삶에 녹아든다는 뜻일 테니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이 전보다 더 나아졌다는 거요. 적어도 이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소."

"…그렇습니까?"

모페이브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푸근한 미소였다.

문득, 할렌은 가지런하게 정리한 그의 흰 머리와 수염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예전, 젊었을 적 그의 모습이 이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가씨께서는 어떠셨소? 사람을 이끄는 것이 처음 이셨을 터인데, 하필 국외를 통하는 상행이라니."

"잘 해내셨습니다. 여인이라고는 하나, 장군의 핏줄이지 않습니까."

할렌은 실비아가 자칭 왕이라고 하는, 도시의 지배자들과 만날 때마다 얼마나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했는지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모페이브는 때때로 앞뒤가 잘려나간 할렌의 이야기도 경청하며 간간이 추임새까지 넣었다. 그 때문일까? 할렌은 멀쩡하던 초가 어느새 반 이상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렇군. 잘 해내셨군. 내심 걱정했었는데 말이오. 다행이야."

"다행일지 아닐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음?"

"이번 여정으로 아가씨는 많은 것을 얻으셨습니다. 재물도 재물이지만, 사람을 얻으셨지요."

"……."

"이곳에 오기 전에 니클라스를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모페이브가 쓰게 웃으며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다. 어찌 모르겠는가.

연구실에 박혀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해도 그는 크렘보르 가문의 집사다. 굳이 듣고자 하지 않아도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물며 크렘보르 남매의 일이라면 더 더욱.

"공자는 아가씨를 어찌할 생각입니까?"

"그걸 이 사람에 물은들, 뭐라 답할 수 있겠소?"

"장군께서는 이미 한참 전에 공자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고 미래를 약조하셨습니다. 공자는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겁니까?"

"내가 아는 건 공도 아는 이야기일 뿐이오."

"모페이브님은 보리스 공자를 가까이서 지켜보셨고, 지금도 그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보다는 아는 게 많으시겠지요."

"이번 상행에서 아가씨와 많이 가까워지신 모양이오."

"장군께서 떠나시기 전, 제게 아가씨의 보호를 명하셨습니다."

모페이브가 한 번 더 고소를 머금었다. 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 변치 않는 부분이야말로 할렌이라는 사람을 정의 하는 본질이지 않을까.

"내가 아는 건, 보리스 공자님도 공자님 나름대로 고민이 많으시다는 거요. 하지만 나는 그 고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

"그렇다 해도 모페이브님이라면 공자에게 적절한 조언 정도는 하실 수 있었을 테지요."

"예전부터 늘 그랬지. 나는 그저 장군의 종일 뿐이오. 명하시는 바가 있다면 따르고, 아니라면 조용히 기다리지. 그런 면에서는 공과 다르지 않군."

"용서하십시오. 추궁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해하오."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모페이브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에게도 아들이 있지 않소. 그것도 둘이나."

"예. 둘이 있지요."

"아들들이 생각나지는 않소? 혈육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모든 생물의 본능이지."

"가끔 생각이 나기는 합니다. 하지만 녀석들이 제 존재를 알게 되면, 득보다는 실이 더 클 겁니다."

차갑군, 모페이브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어 확실하게 안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런 반응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뭐, 지금 한 말이 진심이 아니고 억지로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공의 두 아들은 공자님의 벗이자 측근이오. 물론, 공도 알고 있겠지만."

"……."

"만약 마음의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장군께서 오시기 전까지 아가씨의 곁에 머물러야 한다면, 분명 그들과 마주칠 일이 생길 테니까."

"유념하겠습니다."

***

모페이브의 연구실에서 나온 할렌은 다시 가면을 썼다. 차가운 감촉이 얼굴에 닿자,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편했던 마음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롬바드님."

잰걸음으로 다가온 하인이 대여섯 걸음 앞에서 멈춰섰다. 가면을 쓴 그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였다.

'감이 좋군.'

지금처럼 잠깐 상념에 잠겨 있다 보면 외부의 반응에 뒤늦게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만약 하인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허리춤의 칼에 손이 갔을 것이고, 어쩌면 뽑았을지도 모른다.

'제법 단련한 몸.'

짧은 시간, 할렌의 시선이 하인의 위아래를 훑었다.

펑퍼짐한 옷차림에 대부분 가렸지만, 꽤나 단련한 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를 부리는 이 중 그를 찾을 사람은 한 명뿐.

"아, 아가씨께서 찾으십니다."

"곧 찾아뵙겠다 전해라."

시체처럼 희멀건 피부도 피부지만, 그보다도 이 목소리가 더 거슬렸다. 짤막하게 한마디를 할 때마다 듣는 이들이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에 대해 묻는 걸 깜빡했군.'

보리스 공자와 아가씨의 문제 때문에 너무 정신이 팔렸었다. 예전에야 방도가 없었다지만, 그 후로 꾸준히 연구를 이어갔을 테니 지금은 방도가 생겼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필 지금 아가씨의 호출이 떨어졌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할렌은 숙소로 돌아가 검을 제외한 나머지 무장을 풀어놓은 후 실비아의 거처로 향했다. 그러다 도중에 마주친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롬바드님."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얼굴, 바로 어제도 본 청년이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카인 공."

지위로만 따지면 말을 놓는 것이 맞지만, 할렌은 실비아가 인정한 그의 신분을 고려하여 호칭을 높였다.

"롬바드님도 아가씨의 호출을 받으셨습니까."

할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혹 롬바드님께서도……."

다시 한번, 할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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