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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87화 (887/1,064)

887화

비오르 몰던.

몰던 가주의 하나뿐인 동생. 정확히는 하나 남은 동생이다. 그리고 판니른 내에서는, 귀족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그 지독한 일화를 한 번이라도 들은 사람은 그의 이름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비웃었다. 전자는 살기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독심에 탄식한 것이라면, 후자는 살기 위해 그렇게까지 비굴해져야 하냐며 비웃은 것이다.

군터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비오르 몰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사내구실 못하는 귀족 놈. 딱 그 정도였다.

독심이니 비굴함이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군."

"장군. 그래도 보리스 공자가 나서서 정리하려고 한다지 않습니까."

"시늉뿐이지."

어떻게든 보리스를 두둔해보려던 시어문드였으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던지라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보리스가 정말 진지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애초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니 나서서 정리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나돌도록 뒤에서 부추긴 장본인이 보리스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지만.

'후우. 보리스 공자는 대체 왜.'

결과적으로 보리스를 두둔하려던 꼴이 됐지만, 실상 시어문드는 보리스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주인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미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보리스 공자에게 경고라도 하시렵니까?"

"지켜보고 있다고 전해라. 그 정도면 되겠지."

"예.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겁니다."

시어문드는 군터가 더 강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문제에는 되도록 휘말리고 싶지 않은 그였다.

머리를 쓰는 일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장 한정이었다. 이렇게 적과 아군이 명확하지 않은 판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야스메티 공.'

평소 그는 없는 것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것은 의미 없는 푸념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이 되고 나니 정작 그 의미 없는 행동을 자신이 하고 있다.

'공이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야스메티가 있었다면, 아마 그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썼을 것이다. 보리스를 만나서 직접 경고를 하든, 잘 구슬리든, 아니면 다른 수를 쓰든 간에.

그가 있을 때는 그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이, 잔머리를 잘 쓰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었다. 진짜 중요한 일은 도시가 아니라 전장에서 일어난다고, 조금은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전장에서 걱정 없이 싸울 수 있는 건 후방의 골칫거리가 없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어렵군.'

무거워진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거대하지만 익숙했던, 그래서 마주하더라도 그리 위축되지 않았던 존재감이 지금은 인정사정없이 마음을 압박해 온다.

'빌어먹을. 공자. 더는 실수하지 말아야 할 거요.'

시어문드는 부디 보리스가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친의 엄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니.

***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창고 구석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을 꺼내 드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쌓인 먼지를 털어내니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녀석들이 어렸을 적. 별문제는 없었다. 한 배에서 난 자식들 간에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경우가 흔하다 들었지만, 녀석들은 제법 잘 지냈다. 사내 하나 계집 하나라 그랬을까. 서로 가지고 싶은 것을 두고 다 투는 일도 없었고, 두 녀석을 차별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제법 우애가 좋던 녀석들 사이에 대화가 줄고, 때때로 언쟁 비슷한 것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을 직접 봤던 것도 아니다.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건너 들었을 뿐. 그래서였을까? 형제라도 다툴 때가 있는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은, 만약 그때 그렇게 넘기지 않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쓸모없는 가정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도, 과연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섰을까? 군터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했더냐.'

보리스가 앞에 있다면 한번 묻고 싶었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삼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겠노라 공언했다. 귀족 가문에서 흔히 일어난다는 후계다툼의 싹을 처음부터 제거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뭐가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하나뿐인 동생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되었을까.

'너무 편향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군.'

보리스에게도 할 말이, 나름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군터는 그러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실망이 클 것 같으니.

"장군께서 그리 격하게 반응하시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혈육의 힘일까요."

"글쎄."

뒤에서 다가오는 살라스의 기척은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기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도 자연스레 답할 수 있었다.

"공자의 일은 어찌 처리하실 요량입니까."

"글쎄. 아직은 모르겠구나."

"공자는 어리석지 않지만, 밖에는 머리 굴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놈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공자가 그런 놈들에게 놀아난 것일지도 모르지요."

"몰던을 말하는 것이냐?"

"가능성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고자 놈 하나를 팔아서 크렘보르와 피를 섞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겁니다."

피를 섞는다고 하지만, 살라스도 말했듯 고자 놈 아닌가.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듣고 넘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터가 손에 힘을 쥐었다. 그러자 쥐고 있던 자그마한 돌멩이가 잘게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성가신 일투성이구나."

"어디 안팎을 가리겠습니까. 요즘 보면 세상 전부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문득, 예전 할렌이 자식들의 문제를 두고 푸념했던 것이 떠올랐다. 같은 씨로, 같은 배에서 난 녀석들인데, 왜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다며 뭐라고 떠들어댔었다.

그러면서 자식들의 문제는 부모에게는 너무 어렵다고 했던가?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는 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네게 부탁이 있다."

"장군께서는 제게 부탁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이라고 하십시오."

언제나 그렇듯, 기다렸다는 듯 담담하다. 부탁이는 명령이든, 분명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도.

"직접 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성가신 일들이 줄줄이 따라붙겠지. 그러니 네가 가줘야겠다."

"어찌 처리할까요."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니클라스의 보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네가 직접가서 보고 판단해라. 모두 네게 맡기겠다."

살라스는 군터가 가장 신뢰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전장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전장 밖에서도 마찬가지.

"부담스러운 말씀이군요."

"내 자식들의 문제라서?"

"……."

"모두 네 뜻대로 처리해라. 목만 붙여놓는다면 네가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

상행을 끝내고 솔롬으로 돌아온 실비아는 따뜻한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시녀들은 괜한 고생을 자처했다.

이름이 상당히 긴 꽃잎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몸이 녹아내린다는 표현, 한참 전부터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간의 고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그런 느낌은 배가 되었다.

"아가씨."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산드라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몸을 돌린 실비아는 산드라의 굳은 표정을 보고 덩달아 낯빛을 굳혔다.

"무슨 일이야?"

"근래에 아가씨와 관련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소문? 네가 굳이 직접 전할 정도면, 평범한 소문은 아닌 모양이네."

"그……."

산드라는 똑 부러지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생각을 길게 할지언정, 한 번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면 망설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그 소문이라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뜻일 터.

산드라의 반응을 보며 미리 마음의 준비를 마친 실비아가 재차 물었다.

"그 소문이라는 게 뭐지?"

"아가씨께서 몰던 가문에 시집을 가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몰던? 상대는?"

혼사에 관한 헛소문이야 전부터 심심찮게 돌곤 했다. 혼인적령기를 살짝 넘은 크렘보르 가문의 독녀가 아닌가. 귀족의 여식이 평생 노처녀로 살다가 죽는 일은 없으니 그녀는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실비아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몰던 가문과 연결됐다고 하여 바로 역정을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러려니 했다. 산드라가 직접 와서 어렵게 이야기를 꺼낼 정도면 그 소문이라는 놈이 제법 구체적으로 난 모양이지만,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질 것이다.

"몰던 가주의 동생. 비오르 몰던입니다."

"비오르 몰던?"

귀에 익은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던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몰던 가문의 주요 인사라 할 수 있는 자의 이름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설마 그 이름이 자신과 엮이겠느냐 생각한 탓이 컸다.

비오르 몰던. 어찌 모르겠는가. 현 몰던 가주의 하나 남은 동생이자, 그 잔혹했다던 숙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아닌가. 그리고.

"그자는 분명……."

"예. 아가씨께서 알고 계시는 대로입니다."

산드라는 차마 이어질 망측한 단어를 직접 입에 담지는 못하고 실비아의 말에 긍정했다.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 실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소문이 많이 퍼진 모양이네. 그렇지?"

"예. 정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그 정도로 소문이 퍼질 동안 손 놓고 있었다는 건, 소문을 막을 의사가 없었다는 뜻일 테고?"

담담한 목소리. 허나 그 안에 찬 분노를 느끼지 못할 산드라가 아니었다. 실비아의 곁에서 머문 세월이 얼마던가. 마치 인형처럼 표정이 사라진 실비아의 모습은, 그녀가 가장 크게 분노할 때에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불러."

"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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