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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86화 (886/1,064)

886화

군비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전부터 나오던 것이었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서부 전선 쪽에 임지를 가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의 최전선에 서야만 했고,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했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소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희생.

처음 얼마간은 잠잠했다. 내 땅과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내가 조금 더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전쟁이 격화되고 길어질수록, 그들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불만에 사로잡혔다.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보통 돈 드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 병력이 상하는 만큼 채우기까지 하려면, 그야말로 집안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희생을 몇 번이고 감내해가며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인가? 노고를 알고 있다, 논공의 시기가 왔을 때 그대들의 희생을 상기할 것이다, 등 온갖 달콤한 말을 해대지만 결국은 말뿐이다. 실질적으로 돌아온 것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는 늘 지원군을 보내겠다, 보급품을 보내겠다 하며 대단한 뭔가를 해주는 척하지만, 그 태도는 미적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전장에서 직접 희생하고 있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지원을 하든가, 아니면 직접 이곳에 와서 싸우라고 면전에서 시원하게 외쳐주고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심정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은, 말하자면 목줄이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족하다지만 조정의 지원이 끊기면 그나마 유지 중인 전선마저 속절없이 밀려버릴 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줄을 잘못 섰는가."

속이 참기 힘들 정도로 답답해지면, 목소리를 낮춘채 그렇게 탄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말이다.

가슴을 태우는 불만을 품고서도,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머물던 귀족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자이드라 멕시스가 내민 손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누구인가? 타랴나드의 총독이자, 제국 북부 전역에 명성이 높은 대귀족이다. 비록 7황자의 진영에 합류한 시점은 다소 늦었다지만, 중앙조정에서도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그런 권력자가 자신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에게는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따지고 보면 그 역시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점이다. 타라냐드 역시 전쟁의 불길이 닿는 전선이지 않은가.

"그자의 수완이 상당하군요."

시어문드가 나직이 감탄했다. 테리브란에서 들려온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충분히 세력을 모았다고 판단한 자이드라 멕시스는 망설임 없이 곧장 행동에 나섰다. 전선에 인접한 곳에 근거지를 가진 귀족들, 상인들을 대거 포섭한 그는 그들의 대리인로서 그들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그의 서신에 쓰인 내용은 시작부터 끝까지 잔잔하였으나, 그 파급력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볼모로서, 멕시스 가문의 대표로서 조정에 머물고 있던 로든 멕시스는 부친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보다 확실한 지원이 없다면 전쟁을 이어나가기 힘들다.

미사여구를 다 떼고 보면 딱 그것이었다. 조정 귀족들이 지방 귀족들의 불충을 성토했으나 소용없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객관적인(설령 그것이 상당히 과장되었다고는 해도) 수치를 이야기하며 지금까지와 같은 지원을 받고서는 전쟁을 더 이어나갈 수 없음을 강하게 피력했다. 조정이 통째로 뒤집히고, 대귀족들까지도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자가 묵인한 것도 신기하군."

살라스가 서신을 다시 한번 읽으며 말했다.

조정이 뒤집혔지만, 황자는 조용했다. 자이드라 멕시스와 지방 귀족(정확히는 전선 쪽에 자리한)들의 과격한 행동을 묵인했다는 뜻으로 봐도 좋으리라.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자이드라 멕시스가 사전에 황자와 어떤 식으로든 협의를 봤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행동이 다소 과격하기는 하지만, 그간 조정이 너무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전쟁을 명분으로 전역에서 물자를 끌어모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주머니는 착실히도 챙기지 않았습니까."

소위 중앙 귀족이라 불리는 자들도 아예 뒷짐만 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왔다. 가문의 창고를 열고, 꾸준히 손을 보태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그들의 이름값에 걸맞은 수준이었냐고 묻는다면…그건 아니라고 아주 쉽게 답할 수 있었다.

"지금껏 그들은 말로만 떠들어왔지요. 사실 황자는 그들의 그런 이기적인 행동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황좌뿐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그런 이기심이 진영의 분열을 야기한다면…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겸사겸사 대귀족들의 힘도 빼놓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길 테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확실히 이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팔다리는 바쁘게 움직이더라도, 머리는 진중해야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위에서 떨어지는 자그마한 조각 하나도 아래에 닿으면 적잖은 충격을 일으키는 법. 황자는 윗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아는 자였다. 아비를 보며 배웠는지, 타고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그런 진중 하면서도 모호한 태도야말로 이 불협화음만 잔뜩 일으키는 세력을 지금까지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모호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생각을 읽지 못하게 하며, 따라서 늘 주의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또한, 진중함은 행동에 무게를 실어준다. 시어문드는 윗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켜보시지요. 장군. 어쨌거나, 덕분에 우리는 편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면에서, 그의 주인은 상당히 이상적인 '윗사람'이었다. 표정을 살펴도 생각을 짐작할 수 없으며, 한 번 움직이면 그 파급력은 상상치도 못했던 곳까지 미친다.

"덕분인가?"

"아. 물론 저희도 할 만큼은 해줬지요."

시어문드는 고개 숙이며 자신의 표현을 정정했다.

그들은 자이드라 멕시스에게 병력도, 자금도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이름을 빌려주었다. 어떤 면에서는 천 명의 병사보다도 더 귀한 것을 빌려주었으니, 덕분에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

'그런 사소한 부분에 신경 쓰실 줄이야.'

시어문드는 참으로 알기 어려운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던 군터는 이런 표현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거나, 신경 쓰는 자가 아니었다. 당연히 신경 써야 할 것조차 덤덤하게 넘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솔롬 쪽에서는?"

군터의 물음을 살라스가 받았다.

"변함없습니다. 보리스 공자가 제법 일을 잘하는 모양입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솔롬은 큰 문제 없이 잘돌아가고 있었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덕에 징발을 제외하면 분위기도 평온한 편이었고, 국경 너머소국들과의 교역으로 인해 상계에도 활기가 돌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보리스가 통치자로서 특출한 능력을 보인 바는 없었다. 하지만 아랫것들의 도움을 적절하게 받는 것도 윗사람의 자질이고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보리스는 통치자로서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부족하지도 않은 능력을 보였다.

"장군. 이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보리스공자라면 장군께서 일구신 가업을 잘 이어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한 적 없다."

"예?"

"녀석이 잘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랐지만, 얼간이가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 난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려준 것을 불려도 좋고, 까먹어도 좋다. 성 하나와 군대를 물려주면 아무리 까먹더라도 초라한 꼴은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불린다면 말할 것도 없을 테고,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번에 보리스에게 솔롬을 맡기고 온 것은 녀석을 그런 쪽으로 시험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툭!

품에서 반으로 접힌 서신 하나를 꺼낸 군터가 그것을 탁자 위에 던졌다. 살라스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아, 시어문드가 조심스럽게 서신을 집어 펼쳤다.

"이것은……."

서두를 읽은 시어문드가 고개를 들었다.

일반적인 서신이 아니었다. 니클라스가 보낸 은밀한 서신이었다. 그리고 시어문드는 니클라스가 군터의 명령에 따라 암중에서 실비아를 보호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를 포함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니클라스가 보낸 서신에는 근래에 솔롬의 관리들 사이에서 몰던과 조금 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보리스가 군터를 대리하면서 파니른의 다른 가문들과 이런저런 만남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본래 힘 있는 귀족 가문들은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편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가문들과 친분을 도모하고 나아가 동맹을 맺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크렘보르 가문은 굉장히 독특한 경우였다. 한 성의 주인이고, 군대까지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벌이는 사업이라고는 대부분 솔롬 인근에서 벌이는 고만고만한 몇 가지에 그쳤으니까 말이다.

"젊은이들은 의욕이 넘치지요. 젊음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솔롬에서 이는 이러한 여론은 젊은 관리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다 적혀 있었다. 시어문드가 군터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장군의 위상 덕에, 판니른 내에서 크렘보르 가문의 입지는 그 어떤 가문보다도 튼튼해졌습니다. 크렘보르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크렘보르 가문이, 위상에 걸맞은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듯, 의욕이 넘치는 게지요."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아무 문제도 없다. 크렘보르가문의 영향력을 더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몰던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다 좋다. 여기까지가 전부였다면 시어문드가 지금처럼 주인의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젊은 관리들 가운데 몇몇이, 의욕이 너무 넘쳤던 모양이다. 그들은 몰던과의 더욱 긴밀한 관계 형성을 위해, 혼맹을 거론했다. 당연히 군터나, 보리스의 혼사는 아니었다. 군터는 비록 처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예전부터 재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보리스는 이미 정실이 있다. 그러니 자연히 남는 건 한 명뿐.

"의욕이 있는 건 좋지만, 그것과 주제넘게 구는 것은 별개지."

"장군."

그들은 실비아를 거론했다. 게다가, 그 상대로 비오르 몰던을 들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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