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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85화 (885/1,064)

885화

보머 바쉬가 전사하고 골고스가 함락당했으나, 회군하여 탈환했다.

이 문구만 놓고 보면 어디서도 트집을 잡을만한 구석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흠을 잡고 싶은 이들은 공을 칭찬하는 대신 상세한 상황설명을 요구했다.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보머 바쉬는 어째서 홀로 골고스를 지키다가 전사하게 되었는가. 천혜의 요새인 골고스가 어떻게 적의 손에 넘어갔으며, 군터 크렘보르는 적의 손에 넘어간 요새를 어떻게 탈환하였는가.

사실 설명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만큼 상세한 내용을, 그것도 서신에 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해명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질적인 답변의 작성은 시어문드에게 맡겨놓았음에도 그랬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가 느끼는 감정은 짜증이었다. 같잖은 것들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 이 상황. 자신의 처지에 대한.

"으윽!"

아드리안이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삽시간에 혼자가 된 살라스도 손이 어지러워 지더니, 곧 가슴을 걷어차여 볼썽사납게 쓰러지고 말았다.

"소관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먼저 몸을 일으킨 아드리안이 손을 주무르며 물었다. 미처 흘려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무기를 부딪쳤더니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무기를 놓는 대신 끝까지 버텼다면 분명 손바닥이 크게 찢어졌을 것이다.

"아니. 내 심사가 조금 비틀렸을 뿐이다."

"귀찮게 구는 놈들 때문에 말입니까?"

"그래."

"그놈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소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쩔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왜 어쩔 수 없는 거지?

분명 머리로 이해한 일인데, 가슴은 시도 때도 없이 변덕을 부린다.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흔들리는 들풀처럼.

감정의 변화가 잦아졌다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은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 변화는 대부분 분노 같은, 말하자면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쳐졌다. 왜인지는 모른다.

모페이브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늘 주의하라는 조언만 건넸을 뿐.

하지만, 정말 그런가? 사람이라면 감정의 변화가 있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리고 생각해보면, 감정이 고개를 들 때는 늘 합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전장의 열기, 그 매서움과 참혹함을 글로만 배웠을 머저리들이 저 멀리 안전한 곳에 모여 앉아 현장의 지휘관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를 넘어 대공을 세운 자신을 트집 잡고 있다. 여기에 분노하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겠는가.

'내가 약하기 때문이지.'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소리치며 따지지 못하는 이유. 그건 결국 그 얼간이들을 단호하게 쏘아붙일 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만히 분을 삭이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보머 바쉬 정도면 놈들이 쓸 수 있는 패 중에서도 제법 비중 있는 패였을 터. 그런 패를 하나 잃었으니 놈들의 속도 말이 아닐 터. 어찌 보면 놈들이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것은 놈들의 상실감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어째 아군이라면 아군인 놈들이 적보다도 더 거슬릴까. 그건 아마도 마음대로 목을 칠 수 없어서일 것이다. 전장에서 마주친 적은 목을 치면 그만이지만, 뒤에서 주절대는 놈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어쩌면 놈들이 그리 떠들어대는 것도 자신들의 목이 온전할 거라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허튼소리를 지껄이다가 목이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알아서 입조심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놈들이 떠들어댈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지 않겠습니까."

살라스는 아드리안보다는 비교적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걷어차인 가슴이 조금 뻐근한지 잠깐 멈춰서 숨을 골랐지만 그뿐이었다.

"그러길 바란다."

얼마 전, 자이드라 멕시스에게서 서신이 왔다. 전장에서도 사사로이 서신 따위를 보낸다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식이었다.

어쨌든, 그가 보낸 서신에는 티브리악과 당분간은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고 쓰여 있었다. 본래 중앙 귀족중 하나였던 티브리악은 바크렌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로 조정의 귀족들과 소원해진 상태였다.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멀리 북쪽으로 옮겨간 티브리악을 조정 귀족들이 일방적으로 배제한 것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들은 티브리악이 바크렌의 총독 자리를 맡아서 가겠다고 했을 때 내심 반겼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협력자이면서 경쟁자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우호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경쟁자가 알아서 고꾸라지기를 매일 밤 기도할 것이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중앙과의 줄이 끊어지다시피 한 티브리악에게 접촉했다.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군터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었다. 정확히는 그가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지만, 어쨌든.

그간 자이드라 멕시스는 지방 세력을 계속해서 규합해왔다. 전장에서 직접 군을 지휘하면서도 꾸준히 정계의 일에 관여하는 모습만 봐도 여우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꾀만 많은 것이 아니라 치밀함까지 갖춘, 그야말로 괴물이라 할 만한 인사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능력 하나만큼은 군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제껏 중앙 조정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해왔다.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가 아니라면, 부딪치더라도 되도록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렇기에 중앙의 귀족들은 그가 자신들의 힘을 인정하여 굽혔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조금 모자랐을 뿐이다. 힘을 인정한 것도 맞고, 그래서 굽힌 것도 맞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굽힌 채로 꾸준히 준비를 해왔다. 판을 새로 짤 준비를.

그리고 이제, 그 준비는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그자는 뭘 어떻게 할 생각이랍니까? 매번 사람을 모은다, 힘을 합친다, 같은 소리만 들었지 정작 그렇게 해서 뭘 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아드리안이 묻자, 살라스가 답했다.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거겠지."

"그게 전부란 말입니까? 허무하군요."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러니 뭘 할지는, 힘부터 손에 넣고 생각해도 늦지 않은 것이야."

"오, 방금은 제법 높으신 분 같았습니다."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라스의 말이 옳다. 힘을 기르는 데 목적은 필요 없지."

힘은 뿌리다. 뿌리가 굳건하지 않으면 자그마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 뿌리를 굳건하게 내린 후, 어떻게 가지를 뻗을지 생각해도 늦지 않다. 아니, 그게 올바른 순서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한 주의 최고 권력자다. 그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궁금하군요. 원하던 것을 얻은 그가 뭘 요구할지. 설마 전쟁이라도 멈추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는 없겠지."

이번에도 군터는 살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리는 없다. 이 전쟁이 저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쪽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쟁자체를 주도하는 이는 다름 아닌 황자다. 다른 것이면 몰라도, 직접 전선에 나선 황자에게 황위가 걸린 전쟁을 중단하라고 어찌 요구할 수 있겠나. 그건 설령 자이 드라 멕시스가 테리브란 조정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전쟁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그 형태와 방식을 바꾸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소위 고위 귀족이란 자들이 뒷짐만 진 채 입으로만 주절대는 상황은 바꿔놓을 수 있겠지.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족하다.

***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추가 너무 기운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당장 충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마땅치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징집병으로 가득 채운 군대를 최전방의 요충지에 주둔시키기를 원치 않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이대로는."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회의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관심 없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척, 귀 기울이는 척 연기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의의 주재자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이제껏 그래왔듯,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가면을 유지했다.

"여러분의 말씀들이 다 옳습니다. 곤란하게 되었지요. 바쉬 장군의 군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바쉬 장군 본인은 전사. 반면 판니른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고 골고스까지 탈환했습니다. 전공에 대해 논하기 전에, 당장은 대안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 압니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군대. 거기에 군터크렘보르가 이끄는 판니른의 군대. 손을 잡은 이들의 대군이 전선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지요. 충분히 우려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전하께도 이 점을 상기시켜드려야겠지요."

"그래야겠지만, 전하라고 한들 달리 무슨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그분께는 우리나 저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잘 달리기만 한다면, 검은 말이든 하얀 말이든 개의치 않으실 거란 말이지요."

이제 이들도 황자가 어떤 인물인지 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협하지만, 반대로 목적에 거슬리는 것은 무엇이 됐든 치워버린다.

"그러실 테지요. 하지만 진심이 담긴 충언이라면 전하께서도 달리 생각지 않으시겠습니까."

자그마한 씨앗을 심어두는 거다. 당장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절한 때가 온다면 잠들어 있던 씨앗은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의 실착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쉬 장군이 이렇게 무능한 자일 줄 누가 알았겠소."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는 없지 않소?"

"그러고 보니 그를 추천한 것이 분명……."

"어허!"

사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여기 모인 이들이 각출하여 군대를 소집하면 된다.

그리고 능력 있는 장수를 대장으로 앉혀 골고스로 파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력의 공백 없이 이번 사고를 무마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저들의 꼴을 보라. 전사한 장수의 이름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들먹이고, 서로에게 눈을 흘기기 바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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