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4화
"항복! 항복하겠소! 군사를 뒤로 물려주시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성벽 위에서 절박하게 외치는 사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사들에게 목숨 바쳐 끝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던 자였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찌할까요?"
살라스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몸을 돌리며 즉답했다.
"밀어버려라."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인질이 있는 듯합니다만."
"상관없다."
살라스는 무차별 공격을 명령했고, 골고스의 내성문은 다시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자 위에서 욕지거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뒤이어 비교적 멀쩡한 수급 몇 개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살라스는 그 수급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아무 말 않고 죽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적어도 사서에는 충직한 군인의 옥쇄로 기억되지 않았겠는가. 수하들을 죽음으로 떠민 주제에 자기 목숨은 아까워서 구걸했다는, 졸장의 전형 보다는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쾅!
위태롭게 흔들리던 성문이 결국 볼품없이 부서져 활짝 열렸다. 죽음을 각오한 적병들이 성문 대신 진입을 막아섰으나 부질없는 저항일 뿐. 그들도 귀가 있기에 성벽 위에서 자신들의 지휘관이 항복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기에 마지막 남은 투지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다 타서 재가 되고, 식어버린 그것에 억지로 열기를 불어넣을 뿐이었다.
'끝났군.'
기합보다는 울음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는 적을 베어 넘기며, 살라스는 걸음을 옮겼다. 일전에 가본 적있는 곳. 보머 바쉬가 머물던 사령관저다. 골고스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낀 곳. 골고스 전부를 볼 수 있던, 사방에 창이 난 집무실이 떠올랐다.
상당히 인상적인 곳. 분명 적장도 그곳에 있으리라.
다른 곳에서 목이 달아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막아!"
호위병 몇 명만을 거느리고 움직이는데, 첨탑에 가까워졌을 무렵 십여 명 가까이 되는 적 병사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지치고 상처 입어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 살라스는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 모두를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음을 알았다.
"물러나라. 피는 이미 충분히 흘렀다. 그 위에 너희의 피가 더해진들 뭐가 달라지겠느냐."
가벼운 변덕이었다. 나름의 호의이기도 했다. 엉망인 몸에, 더 엉망일 것이 분명한 마음으로도 할 일을 하는 군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그러나 순수한 호의도 때로는 거절당하는 법.
두드러지게 용기 있는 누군가의 호통과 뒤이은 행동은 갈등하던 나머지의 선택권마저 앗아갔다.
"좋아. 그러지."
호의는 거기까지. 살라스는 아무리 기껍게 봤다고 한들, 죽겠다고 달려드는 놈을 억지로 살려놓을 만큼 무딘 사내가 아니었다.
달려드는 놈을 목을 단칼에 베고, 그 뒤편에 있던 놈의 심장을 찔렀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추락하는 것과 멍한 표정이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드는 것은 동시였다.
잠시 후,
살라스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경계병은 금방 처리한 이들이 전부였는지, 첨탑의 입구를 지키는 병력은 없었다.
"뜻밖이군."
"그런가?"
예상했던 대로, 적장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사방으로 뚫린 창문을 통해 불길에 휩싸인 골고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항복을 이야기하던 바로 그 자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려움에 젖어 있거나 절망해 있을 것 같았던 그는 담담한 얼굴로 살라스를 맞이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항복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군."
"그래."
항복을 부르짖던 겁쟁이는 없다. 가죽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장군께서 패하시고, 심지어 전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칼을 뽑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예기. 어찌 이런 자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살라스는 자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아집이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거다."
"그럴지도. 하지만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투항을 거절하고 불필요한 피를 더 흘렸으니."
"조금 더 길게 봤을 뿐."
크게 승리하고, 루벤 카드모스의 목을 벤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승리 뒤에 남은 골칫거리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생포한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것. 덕분에 먹여야 할 입이 갑자기 늘어 버렸다. 처음부터 포로로 잡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투항을 받아들인 이상 늘어난 입을 다시 줄일 방법은 없었다. 그런 와중이니, 거기서 또 입을 늘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골고스에서의 일은 되도록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 이건 시어문드의 말이었으나, 살라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니, 골고스에 남은 자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거다.
"잔혹하군."
살라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적장이 혀를 찼다. 살라스는 그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칼을 겨눴다.
"네 주인을 따라가라."
"물론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아직은 부족하다."
칼을 뽑는 소리도 없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섬뜩한 살기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술법?'
살라스는 눈앞에서 사라진 상대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 세 방향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차분히 대응했다.
챙!
흔들림 없이 휘두른 칼이 매끄러운 선을 그었다. 매섭게 그어진 하나의 선이 세 점을 갈랐다.
"사령관이 암살을 당했다더니."
소식을 접했을 때는 한심하게 암살자의 칼에 당했는가 하며 혀를 찼지만, 지금 보니 그럴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을 쥔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힘에서 부담을 느껴보기는 오랜만이었다. 튕겨 나간 상대는 아예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였다.
"군인이 아니라 암살자였나."
"전장에서 싸우면 군인이다. 구분은 무의미하지."
"그것도 그렇군."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적장은 다시 한번 모습을 감줬으나, 이번에는 살라스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상대라면 따라가지 않으면 그만, 드물지만,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서걱!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피륙을 베었다. 조금만 더 과감했더라면 다리 하나라도 받아갔을 터.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
군터는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야 골고스로 들어섰다.
"장군. 외성의 정리는 끝났습니다만, 내성 쪽은 아직인 듯합니다."
"누가 들어가 있지?"
"살라스님과 시어문드님이……."
보고를 들은 군터는 곧장 내성의 안쪽. 가장 높은 첨탑으로 향했다. 가라앉고 있는 전장의 분위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격렬함. 그것이 첨탑의 위쪽에서 느껴졌다.
"장군."
군터가 첩탑을 올랐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된 후였다. 살라스가 시체 하나를 앞에 두고서 생각에 잠긴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적장인가?"
"예. 아마도 사령관을 암살한 암살자가 이 자인 듯 합니다."
암살자라. 군터의 시선이 잠시 쓰러진 시신에 머물렀다.
"그렇군."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다. 죽고 나서 조금 시간이 흘렀는지, 영혼도 이미 상당 부분 흩어진 후였으니, 식어가는 시신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단은 끝났습니다만, 시어문드는 이제 시작일 거라고 하더군요."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통해 감시의 눈을 치웠지만, 조정의 귀족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명분이야 충분하니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할 테지만, 사소한 부분이라도 눈에 띈다면 계속해서 트집을 잡으려 들 것이 분명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상처뿐인 승리가 되겠군요."
루벤 카드모스의 목을 베고, 그의 군대를 와해시켰다. 하지만 골고스의 병력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승리는 승리일지라도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은 승리다.
아마 이 소식을 접한다면 황자를 비롯해서 이 전쟁에 열심인 이들은 마음이 편치 않을 터였다. 골고스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병력을 충원해야 할 텐데, 단시간에 병력을 보충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군터에게 맡기려 할 터. 그렇다는 건 판니른의 병력이 한동안은 계속 골고스에 발이 묶인다는 뜻.
"조정 귀족들의 의심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황자까지 돌아선다면……."
"괜한 걱정이다."
"제가 아니라 시어문드의 생각입니다만."
"마찬가지. 괜한 걱정이다."
사상자를 부풀린다거나, 조잡한 수를 쓸 생각은 없다. 골고스의 구원이 어쩔 수 없이 늦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보고할 생각이었다. 물론 괜한 트집을 잡으려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황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급선무는 조카를 쓰러뜨리고 황좌의 주인이 되는 것. 그 외의 것은 황좌에 앉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고 보니… 어쩌면.'
군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전쟁을 주도하는 황족들. 그리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예를 들면 그들의 인척들을 제외한 나머지 권력자와 귀족들이 정말로 한쪽의 승리를 원할까?
목줄을 잡혀서 억지로 끌려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이것은 남의 전쟁이다. 승리한다면 공에 따른 보상을 얻게 될 테지만, 그뿐이지 않은가. 승리한 주인의 지위는 공고해지고, 힘 역시 강력해질 것이다. 처음에야 공을 세운 그들을 대우해줄 테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어떨까. 그 어떤 후덕한 사람일지라도 아쉬운 게 있는 사람보다 더 베풀 수는 없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던가.
'그래.'
자이드라 멕시스를 비롯하여 몇몇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알게 된 것이 있다.
소위 권세 귀족이라는 자들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여긴다는 거다. 심지어 충성을 맹세한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세상에서는 일개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다.
'말 안 듣는 개들을 풀어놓고 싸움을 붙이는 꼴이로군."
세상의 주인을 가리는 싸움이니 뭐니, 아무리 거창하게 포장해도 진실은 이렇다. 우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