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3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원군을 보내지 말자는 말 같은데…제가 제대로 이해한 겁니까?"
"정확히는, 보내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늦게 보내자는 말이지."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골고스에서 버티고 있는 녀석들이 다 죽어 자빠진 후에 재탈환하자는, 그런 말아닙니까?"
아드리안은 본래 군사 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내가 아니었다. 스스로 머리가 좋은 편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다른 머리 좋은 이들이 주장하는 의견에 고개만 끄덕이곤 했다. 그런 데다, 평소 살라스를 윗사람으로서 존중하여 그의 말이라면 일정 부분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일단은 따르곤 했다.
그렇기에, 지금 아드리안이 살짝 언성까지 높여가며 살라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군터는 조금 얼굴이 달아오른 아드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못마땅한가 보군."
"아군을 죽이자는 말과 다르지 않잖습니까. 설마 장군께서는 시어문드의 말처럼 골고스에 있는 자들이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렵니까?"
"그렇다면?"
"……."
아드리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혼자서 몇 번이고 들썩거렸다. 그러다, 결국은 주저앉다시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입니까? 그… 보머 마쉬라는 작자가 장군께 무례하게 굴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런 적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수월하게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병사들의 피로도 무시할 수 없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골고스를 지원하는 것이, 그렇게 크게 무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머 바쉬는 죽었지만, 녀석을 따르던 휘하 군관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모양이더군."
아드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굴리는 데 별 재주가 없는 그였으나,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놈들이 우리의 아군이었나?"
"……."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 아드리안은 그 눈과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곧장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골고스 부근에 주둔하기 시작한 이후로, 보머 바쉬는 줄곧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사적인 교류는 전혀 없었고, 오직 보급부대가 오갈 때만 서신이나 전령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다.
알고 있다. 어찌 모르겠나. 보머 바쉬는 감시자였다.
그것도 황자의 감시자가 아니라, 중앙 조정에 있는 귀족들의 감시자였다. 그 은밀한 시선이 불쾌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아군이 아니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적과 전투가 벌어지면 당연히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울 동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특별히 의식한 적도 없었던 담담한 한 마디. 그런데 지금은 그 담담함이, 냉정함과 냉혹함이 새삼 두렵게 다가왔다.
"움직이는 것은 이틀 후다. 골고스의 장졸들이 그때까지 버틴다면 살 것이다."
버티지 못한다면? 그럼 어찌 됩니까?
아드리안은 묻고 싶었다. 몰라서가 아니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마지막 물음은 마음속에서만 맴돌 뿐, 끝내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
충성하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줄곧 머릿속에 넣어두고, 마음으로 되뇌었던 철칙.
그러나 충성을 받을 상관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을 만큼 용감해야 하고, 부하들을 소모품 취급하지 않고 충분히 대우해줘야 한다. 그것이 무리한 요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군인이라면 일개 병졸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이겨내야 하고, 그런 용감한 이들을 이끄는 자라면 응당 그들을 대우해줘야 한다. 그게 맞고,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상에는 그런 당연한 사람이 흔치 않았다. 능력도 없고, 하다못해 성품조차 저질스러우면서 권위의식만 가득한 돼지 새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았다. 그리 대단한 포부를 품은 것도 아니건만, 그저 자그마한 바람 한 가지만 가졌을 뿐이건만, 그 자그마한 바람마저도 매번 꺾이고 흔들렸다.
군터 크렘보르, 당시에는 그저 군터였던, 그의 상관을 만난 것은 마음이 꺾이다 못해 아주 잘근잘근 짓밟힌 후였다.
처음에는 뭐 이런 자가 있나 싶었다. 사람으로서 됨됨이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용맹을 목격했고,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는가 하고 감탄했다. 그래. 감탄했지만, 그뿐이었다. 무인으로서 존중할만하지만, 군인으로서는 그냥 눈 한 번 크게 뜨고 말 정도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그에게 감복했던 것은, 그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누구보다 앞에서 싸운다는 것. 그리고 수하들에게 놀랄 만큼 후하다는 것이었다.
말만 들으면 간단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군인이라고 해서 명예욕과 재물욕에서 초연할 수는 없다. 돼지 같은 녀석들은, 어떻게든 일선에서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습지만 군인으로서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안전한 곳에 있게 되니까.
직접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이끄는 대신, 가벼운 말 한 마디로 전쟁을 좌우할 수 있게 되니까.
어쩌면 사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봐온 돼지 새끼들은 하나같이 그랬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멀리서 돌격해라, 싸워라, 물러나지 말라 외치는 것뿐. 그러면서 본인은 전황이 어려워지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철저히 준비한다. 그런 주제에 피로 목욕을 하고 돌아와 승리를 고하면, 모든 전과가 오직 본인의 지휘덕이라며 자찬하기 바쁘다. 조정에도 그렇게 보고하고, 피땀 흘려가며 싸운 병사들에게는 푼돈 몇 푼 쥐여주는 게 전부다.
말단 군졸 시절, 기름기 넘치는 상관의 얼굴을 보고 몇 번이나 칼을 뽑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야 했다. 그나마 인고의 시절을 견디며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지만, 군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은 크게 옅어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별생각 안 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니. 자네답지 않군."
출진 전야.
홀로 막사를 나와 산책을 하던 아드리안은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그 대꾸가, 정말 엉터리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급히 말을 덧붙였다.
"예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장군을 뵙기 전 말입니다."
"갑자기 말인가?"
"저도 나이가 든 모양이지요. 원래 나이를 먹으면 괜히 생각이 많아진다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자네. 나보다 어리지 않던가?"
"…예. 뭐……."
아드리안은 새삼 살라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매번 선봉에서 싸우기를 즐기는 이답게 얼굴 곳곳에 흉터가 자리 잡고 있어 빈말로라도 보기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흉터를 제하고 보면 살라스도 제법 준수한 용모였다. 게다가, 나이가 무색하게도 그에게서는 주름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저 팔 때문인가?'
살라스가 잃었던 팔을 되찾은 후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이제는 비밀도 아니다. 다만 그 변화가 어디까지 미치는가는 그와 자주 보는 이들밖에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고, 아드리안은 살라스가 이전보다 더 젊어졌음을 아는 소수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부럽기도 했다. 하나씩 나이가 늘어갈수록 기력이 쇠하는 것을 느끼다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살라스가 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할렌 같은 경우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한 편이었지만, 정도만 다르다뿐이지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는 요정의 팔은 아니더라도 피 몇 방울 정도 구해볼까, 진지하게 생각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복잡한 것 같더군."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군요."
"사람은 칼이 아니지 않나. 칼조차도 날을 관리해주지 않으면 무뎌지기 마련. 종종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게."
"한 가지요?"
"충성. 마음 가운데에 그 하나만 박아두면 조금씩 흔들리더라도 어렵지 않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아드리안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너무나도 이 사람다운 조언이 아닌가. 그 스스로 실천하고 있기에 이런 조언도 할 수 있는 것일 터.
'정말 한결같군.'
이 사람이야말로 철저한 군인이다. 마음속에는 오직 충성과 복종뿐. 그 외의 것은 마음에도, 머리에도 담지 않는다. 그야말로 군인의 이상, 그 자체.
'한때는 나도 이랬던가?'
주저 없이 이랬다고 하기는 양심이 조금 찔린다. 하지만 비슷했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로 그리 생각했고, 마음으로도 어느 정도는 따라갔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예. 그런데 잠시…마음이 약해졌었나 봅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서둘러 다잡기를 바라네."
어깨를 두드려준 후, 살라스는 돌아갔다. 출진 전에 한 번 더 준비 상황을 점검한다나. 아드리안은 그 쓸데없는 철저함과 부지런함이 참 살라스답다고 생각했다.
'다잡으라고.'
글쎄. 그럴 수 있을까?
중심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굳건하다면 흔들림이 있더라도 금방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심이 흐트러졌다면?
'내가 정말 나이를 먹긴 먹었구만.'
이런 시답잖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며 한숨이나 푹푹 쉴 거라고, 이십 년 전의 자신은 상상이나 했을까?
이십 년 전의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퍼먹고, 심지어한 대 맞는 상상까지 하며, 아드리안은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에 깊은 한숨을 녹여냈다.
***
골고스는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만신창이가 된 성벽 위에 흩날리는 낯선 깃발이 그 증거였다.
군터는 승자의 것일 텐데도 그리 멀쩡해 보이지 않는 깃발을 잠시 응시하다가 명령을 내렸다.
"공격을 개시한다."
성벽은 군데군데 손상된 부분이 눈에 보였고, 성문도 급하게 보수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다. 공격을 개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외성을 돌파했으며, 적을 내성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싱겁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전투가 시작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아드리안은 마주치는 모든 적병의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원해서 남은 이들이 아니며, 원해서 싸우는 이들이 아니었다.
명령 때문에 억지로 죽음으로 떠밀린, 딱하기 그지없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베고 또 베었다. 그놈들을 등 떠민 썩을 놈은 아직 닫혀 있는 저 성문 너머에 있을까.
콰앙!
"성문이 부서졌다!"
"쓸어버려!"
저 멀리. 아마도 북쪽. 힘이 넘치는 함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맞서 싸우던 적의 사기가 마침내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