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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82화 (882/1,064)

882화

대승이었다. 적의 주력을 크게 격파했고, 그에 반해 아군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비록 패주한 적의 수가 상당하다고는 하나 머리를 잃었으니 당분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터.

"바로 가시겠습니까?"

시어문드의 물음은 당연히 골고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본군이 패퇴했으니 골고스를 포위했다는 적도 알아서 물러나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래도 한 번 얼굴을 비춰줘서 나쁠 것은 없다는 계산이었다. 적어도 골고스의 장병들에게 누가 너희를 구했는지는 확실하게 각인시켜놓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군터는 시어문드의 제안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가 가라."

"제가 말입니까?"

"그래."

크게 전공을 세운 것은 살라스와 아드리안이지만,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시어문드였다. 군터는 그런 시어문드에게 기분을 낼 수 있는 일을 맡긴 것이다.

시어문드도 그런 군터의 마음을 곧장 이해한 듯,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출발하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군터나, 받은 시어문드나 이것이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골고스로 가서 눈 밑에 짙게 그늘이 졌을 사령관에게 은인 대접을 받으며 적당히 거 드름만 피우면 되는, 그런 가벼운 일 말이다.

그러나, 어수선한 군영을 나서고 고작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을 때. 시어문드는 생각지도 못한 보고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뭐, 뭐라고?"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이나, 심지어 살라스라고 해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바쉬 장군이 전사하셨고, 아군은 내성에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부디 신속히 지원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사람은 순간적으로 공황에 빠지곤 한다. 특히 평소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시어문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버티며 물었다.

"말이 되나?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해도 성벽이 있고, 주둔하는 병력이 있는데 어찌 그렇게 허무하게 밀릴 수 있단 말이냐!"

"내부에 첩자가 있었습니다. 포위가 시작되고 사흘째 되던 날 밤에 갑작스레 동문과 북문이 열렸습니다. 동시에 성 내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바쉬 장군께서는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며 혼란을 잠재우려 하셨습니다만……."

"그때 당한 건가?"

"암살이었습니다. 장군을 곁에서 모시던 병사들이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결정적이었겠군.

시어문드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생각했다.

골고스를 포위한 적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과감했다. 그 과감함을 뒷받침해준 것은 치밀한 준비였을 테고, 도대체 언제부터 골고스 공략을 준비했던 것일까? 첩자는 그렇다 쳐도, 사령관을 암살할 정도라니?

그 정도면 암살자들이 일부라도 군관으로 위장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은밀하게 포섭한 것인가?

'아니. 아니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

보머 바쉬는 죽었고, 골고스는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 골고스가 무너진다면 앞으로가 피곤해진다. 적의 주력을 무너뜨렸다고 해도, 이쪽은 본거지를 잃게 된 셈이니까.

"후우."

그래도 희망적인 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며칠 전부터 공세가 느슨해졌습니다. 그때는 왜인지 몰랐습니다만, 이제는 알겠군요."

"그래. 그나마 다행이로군."

본군의 패퇴 소식을 접한 것이리라. 당연히 흔들렸을 테고, 어쩌면 일부는 전장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다.

본군을 패퇴시킨 적이 등 뒤에서 옥죄어오리라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그걸 바꿔 말하면, 아직도 버티고 있는 놈들은 그만큼 악에 받쳤다는 뜻이겠지.'

어쨌거나,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거듭해서 신속한 지원을 애원하는 병사를 적당히 달래어 보내고, 시어문드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령관이 죽었다. 보머 바쉬가 죽었다.'

여러 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솔직히 보머 마쉬라는 인물에 대해 별생각은 없었다. 특별한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눈치를 잘 보는 자라는 것 정도? 물론 일선에, 요충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만큼 능력이야 어느 정도 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딱 그 정도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군.'

이미 죽은 자를 두고 비웃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도 모르지 않나. 만약 적이 정말 철저하게 준비를 해뒀던 거라면? 등 뒤에서 찌르는 칼은 누구라도 해칠 수 있다.

'공세가 조금 느슨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급하긴한 것 같은데…….'

지원이 늦는다면 골고스는 함락당할까? 그렇다면 서둘러야 할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서두르는 게 맞긴 하지만, 정말 그럴까?

군인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별 같잖은 이유로 정적들에게 이래저래 공격을 받고 나면, 아무 래도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비록 자신이 직접 공격받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이쪽은 승리했다. 루벤 카드모스를 참했고, 그가 거느린 대군을 격파했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공. 반면, 골고스가 함락당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군대를 거느리고도 적을 막아내지 못한 보머 바쉬에게 돌아가겠지? 그렇다면…골고스가 한 번쯤 무너지는 것도 썩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지금쯤 저 남쪽 어딘가에서 어떻게 하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을 몇몇 인사들이 듣는다면 역정을 내고, 칼을 뽑아 들만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이 전쟁은 그들의 전쟁이다. 시어 문드 자신이나, 군터나, 솔롬의 전쟁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우는 것? 그런 건 꿈에서도 불가능하다.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각자의 사정대로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슬그머니 떠올려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래. 나쁘지 않아.'

생각하면 할수록,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문드는 서둘러 군터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그가 들은 골고스의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사견까지 모두 적어서 단단히 봉인했다. 그리고 그것을 전령에게 들려주며 말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다. 쉬지 말고 달려라."

"옛!"

***

"확실해?"

의심, 그리고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

반문을 들은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하지만 봤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리고 사실 그럴듯하잖아? 장군이 사령술을 사용하실 줄 알고, 또 종종 사용하신다는 걸 모르는 놈이 어디 있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에 있는 이들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또, 주변이 그만큼 조용하기도 했다. '장군'이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온 후부터 줄곧 그랬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내는 그 위험한 주목을 내심 즐기면서 동료의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의 동료는 맨몸으로 눈밭을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하군. 사람이 마른 나무 조각처럼 비틀어졌다고?"

"그래. 직접 본 녀석들이 말하길, 마치 영혼이 뽑혀 나간 것 같았다고 하더군. 아니. 정말 영혼이 뽑힌 게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죽어서도 신들의 전당에는 가지 못하게 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 듣기로 사령술의 제물이 되면……."

말하는 보람이 있는 반응에 신이 난 사내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차.

"그 입조심 하는 게 좋아. 아니면 누가 그 혓바닥을 뽑아갈지도 모르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거칠게 이야기를 끊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험상궂은 외모의 사내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그의 외모가 어지간한 사람은 단번에 눈을 깔게 할 만큼 거칠었지만, 이곳은 전장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병사였으며,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적의 피를 무기와 몸에 묻혀가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이들이었다. 고작 험상궂은 외모와 거친 말 한마디에 기죽을 이들이 아닌 것이다.

"입조심 하라고 했다. 별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지? 감히 이곳에서 장군의 험담을 하다니 말이야."

"무슨 소리야! 험담은 무슨 험담을 했다고……."

사내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그는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방금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 역시 그의 눈길을 피했다. 사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봐.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닥쳐. 영혼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런 말 자체도 문제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뭐 어떤데?"

"뭐?"

"장군께서 우리의 영혼을 뽑아가신 것도 아니잖아. 우리 목을 노리던 놈들을 잡아다 쓰신 거라면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호들갑이지?"

"아니. 이봐."

교단의 사제들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수준의 상식과 인식을 지닌 사람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이 나올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며, 이 녀석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겠지. 지금 말문이 막힌 사내가 딱 그랬다.

"신들의 전당? 그런 건 몰라. 솔직히 관심도 없어."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한, 험상궂은 외모의 사내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왼쪽 눈에서부터 턱끝까지 이어지는 길쭉한 흉터를.

"내가 아는 건, 끄트머리가 부러진 칼이 여기로 떨어져 내릴 때. 장군께서 그 망할 놈의 머리통을 날려주시시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여기 없었을 거라는 거야."

아아. 그쪽인가.

사내는 내심 잘못 걸렸다고 한탄하며 혀를 찼다.

이런 놈들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드물지도 않다. 그들의 장군이 워낙 앞장서서 싸우기를 즐기는 덕에 그에게 목숨 빚을 진 녀석들이 꽤 있었다.

그런 녀석들의 충성심이 신앙처럼 굳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니까…….

'망했군. 제기랄.'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여기서 변명한답시고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건 별로 좋은 선택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 주먹 정도가 날아올 테고, 운이 나쁘면 칼이 날아올 터.

"이봐. 좀 봐달라고, 맹세컨대 정말로 장군의 험담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단지 조금 무서웠을 뿐이야."

"무섭다고?"

상대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역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어지간한 말장난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래.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서 직접 봤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나도 들은 게 다라고. 그러다 보니까, 그때 그 광경이 자꾸 머릿속에 아른거리더라 이거야. 그, 알잖나? 누가 그런 말도 했다며? 세상의 그 어떤 괴물보다 머릿속의 괴물이 더 무섭다고."

실제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사내는 필사적으로 변명했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를 향하던 날카로운 시선들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뭐, 알았어. 어쨌거나 입조심 하라고, 본의는 아니라지만, 괜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잖아."

"그래. 그래. 내 명심하지."

그렇게 일단락이 나는가 싶어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그때. 자그마한 깃발을 든 전령 하나가 빠르게 군영내를 질주해 들어갔다. 군영 내에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아,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 먼지구름이 피어오를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방금 그렇게 큰일을 치를 뻔했음에도, 사내는 다급해 보이던 전령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방금까지의 아찔했던 순간은 어느새 까맣게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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