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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81화 (881/1,064)

881화

목이 찢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웃는 얼굴이었다. 꾸며낸 웃음 같지는 않았다. 이 녀석은 왜 웃는 거지? 군터는 순간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했으나, 의미 없다고 결론 내렸다. 뭐가 됐든, 머리를 잃은 군대는 제 힘을 쓰지 못하는 법.

그러나 이후 벌어진 일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대장을 잃은 적은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며 덤벼들었다. '장군의 원한을 갚아라!' 같은 외침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폭발할 듯 치솟은 그들의 기세는, 전세가 뒤집힌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대단했다. 잠깐이지만 군터조차 군을 뒤로 물려야 할 정도였다. 억지로 버티거나, 밀고 나가려면 그럴 수는 있었으나 그랬다가는 아군의 피해도 작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당장은 불이 붙었지만, 어차피 오래 가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적장의 인망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대장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분노가 패배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정도라니.

하지만 감정은 본래 순간적인 것. 그 어떤 강렬한 감정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결국 조금씩 불길은 사그라지고, 잠시 잊었던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들 터.

지금은 일단 곧 꺼질 불길을 피해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군터는 또 한 번 예상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예상까지도 철저하게 빗나갔다.

"카드모스 장군을 위하여!"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적은 자신들 모두 이곳에서 죽어도 좋다는 것처럼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군터는 전장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당황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목도했기 때문에,

"밀어붙여라!"

군터는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훑었다.

부대단위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진 적군 사이에서 유독 목소리를 내는 놈들이 있었다.

장교도 있었지만 군졸로 보이는 놈들도 있었는데, 그놈들이 다른 병사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일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일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짝만 그으면 핏물이 폭포수처럼 튀어나올 것처럼 붉게.

그 모습들을 보며, 군터는 마지막 순간에도 웃고 있었던 적장을 떠올렸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다 준비해뒀던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마지막까지 놈에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다.

'화가 나는군.'

어이가 없기도 했고, 열이 오르기도 했다.

아무래도 제법 이름을 날렸다던 노회한 적장을 조금 얕보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괜찮다. 실수를 범했으나,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으면 될 일이니.

[일어나라.]

그의 영혼에 연결된 감옥. 허락 없이는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에 갇힌 영혼들이 부름을 받고 울부 짖었다. 감옥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와 주변에 널린 식어가는 육신들에 깃들었다.

보통의 망령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영혼의 힘이 혼을 잃은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내게 대적하는 것들을 모두 죽여라.]

적들이 품은 선명한 적의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 누가 적인지 바로 구분할 수 있었으니, 막 일어난 일어선 시체들이 방향을 정하기도 훨씬 쉬워졌다.

그아아아아-!

재앙을 피해 도망쳤던 고대인들의 영혼.

처음 접했을 때는 어느 정도 이지를 갖추고 있었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군터의 감정에 동조하며,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이는 군터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가끔 필요할 때 꺼내 썼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군터의 영혼에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조금씩 변해갔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커헉!"

심장을 찔렀으나 두 눈에 귀화가 이글거리는 시체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발걸음이 느려지지도 않았다. 심장을 찌른 창이 몸을 아예 관통함과 동시에 칼이 창을 쥔 병사의 목을 찔렀다. 병사의 눈에서 급속도로 생기가 빠져나가고, 곧 고개를 떨궜다.

그으으……

그러자 시체가 기이한 울음을 토했다. 두 눈의 빛이 희미해지고, 산 사람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칼에 목이 찔린 채 고개를 떨궜던 병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목을 찌른 시체가 발하던 안광이 번뜩였다.

***

군터가 감옥에 갇힌 영혼들에게 바란 것은 단 한 가지. 전투능력이었다.

사령술로 일으킨 망자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산 자들처럼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전술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마구잡이로 뒤엉켜 싸우는 난전에서나 그나마 활약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잠시 칼받이 역할을 하거나 약간의 혼란을 유도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많은 수의 시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해도, 망자를 일으키는 것은 군터에게 있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술수였다.

하지만 그의 영혼 감옥에 갇힌 영혼들은 달랐다. 그들은 평범한 망령들과 달리 육신의 장악력이 뛰어나, 보다 빠르고 강하게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단한 명령 정도는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이지를 갖췄다. 그렇기에 그들을 불러내는 데 적잖은 심력이 소모될지라도, 군터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을 사용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싸울 수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변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발하는 기운에서 친숙함을 느끼고, 그들의 영혼에게서 또한 친숙함을 느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을 닮아있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싸웠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적의를 드러내는 산 자들을 밀어붙였다. 움직이던 몸뚱이가 크게 상했다면 거침없이 새로운 몸에 깃들어 전투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막을 수 없는 죽음의 파도가 되어 전장을 휩쓸었다.

분명,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더 없이 좋았다. 고작해야 이백 남짓한 시체들이 이천의 병력이 낼 만한 위력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날뛰면 날뛸수록 군터가 받는 부담도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감옥을 나와 세상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군터가 문을 열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힘을 쓰면 쓸수록 그 부담은 군터에게로 돌아왔다.

'전보다 확실히 심해졌군.'

불평할 문제는 아니다. 감옥의 영혼들을 풀어놓는 것도 술법이라면 술법이고, 이 정도 규모의 술법을 유지하는 데 적잖은 기력이 소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이것을 한 명이 감당한다는 것이 비정상적이 일이다.

"으…아아……."

군터는 자신의 내면이 고갈되어감을 느꼈다. 그것은 피로, 혹은 허기와 비슷했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턱!

말에서 내려, 발 밑에서 죽어가던 적병의 머리를 움켜잡은 것은 반쯤은 의식하지 못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왜 이 녀석을 잡았지? 군터는 손아귀에 산발이 된 머리통이 잡히고 나서야 자신이 말에서 내렸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움직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이제 뭘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으… 으으윽……."

생명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져버리리라. 그리고 그 빈 자리는 식어버린 죽음이 채우겠지.

군터는 자신의 억센 손아귀 안에서 꿈틀거리는 병사를 눈에 담았다. 죽고자 덤벼들더니, 지금은 조금 아프다고 신음을 흘리고 있다. 죽음과 고통 앞에서 의지는 꺾이고, 자그마한 생명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볼품없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이 초라한 모습이야말로 이놈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흐… 흐어어어……."

실타래를 뽑듯, 천천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시도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반쯤 죽어있던 녀석이다. 죽음을 향해 착실히 다가가던 녀석이었고, 그런 녀석을 살짝 쥐어짜는 것뿐이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

녀석은 이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피를 많이 흘려 창백했던 피부가 급속도로 푸석해지더니, 가뭄에 시달린 땅처럼 마르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생기를 잃으며 흔들리던 영혼이 좁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물처럼 빨려 들어갔다.

손을 타고 들어오는 혼, 그 혼에 묻은 생기와 사기.

그 모든 것이 허기져 있던 내면을 채웠다. 상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군터는 바닥을 향해가던 기운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했다.

"…장군."

떨리는 목소리. 군터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몇 번 보았으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 비교적 신입에 속하는 친위대 병사. 그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말라비틀어진 시체와 자신을 바쁘게 오갔다.

"잊겠나?"

"잊겠습니다."

"좋다."

그가 사령술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령술을 사용할 줄 아는 것과, 누가 봐도 사악해 보이는 술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보고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군터의 곁을 지키는 친위대는 예외였다. 세월과 경험이 쌓아 올린 그들의 충성심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설령, 군터가 죽으라고 명령한다고 해도 거부하지 않을 이들이었다. 명령 앞에서 이유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격해라. 시체들이 길을 틀 것이다."

"옛!"

고통도, 두려움도 모르는 시체들이 가장 거친 적들을 밀어붙였다. 군터와 병사들은 시체들과 부딪치며 이미 한 차례 무뎌진 적들을 재차 공격해 무너뜨렸다.

비슷한 시기에 뒤로 물러나 숨을 고르던 살라스와 아드리안도 다시 공격을 개시하니, 슬픔과 분노에 눈이 멀어 있던 군대도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승기가 굳혀졌다고 판단한 군터는 후군의 소식을 물었다. 시어문드의 능력이야 의심하지 않지만, 공세에 치중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후방이 취약해졌다. 적장이 그 약점을 제대로 약점을 찔렸으니, 시어문드가 낭패를 겪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면목 없습니다. 장군."

예상대로, 시어문드는 꽤나 고생한 것 같은 몰골로 그와 재회했다. 목이 다 쉬어버려 억지로 목소리를 키울 때마다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변명은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알고 있다."

적이 정예 기병을 앞세워 들이쳤을 때, 시어문드는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하더라도, 아무것도 내주지 않고는 적을 막을 수 없다고, 그래서 살을 내줬다. 뼈를 내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 살점을 내주고 피를 흘리기는 했으나 목만은 지키며 살아남았다.

"사상자는?"

"3천 정도입니다. 내일이면 더 늘어나겠지요."

예전이었다면 3천이라는 숫자를 들었을 때 마음이 불편해졌을 것이다. 신병이건 아니건, 출신지가 어디건 간에 자신의 밑에 있는 병사들이 그만큼 상했다는 것 자체에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천 명이 죽고, 그 배나 되는 병사들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장부에 적힌 숫자를 읽는 것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군터는 순간 그런 자신이 낯설었으나 금방 익숙해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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