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화
군터는 선두에 나와 있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것이 아마도 루밴 카드모스일 것 같은 적장을 확인하고는 눈을 좁혀 떴다.
뜻밖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대어가 갑자기 눈앞에 튀어나온 느낌이랄까. 괴물을 탄 기병들이 막힌 것을 지금쯤이면 알아차렸을 터. 그런데도 물러나기 는커녕 오히려 직접 앞장서서 나왔다는 것은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뜻.
게다가 자신을 보고도 뒤로 숨는 대신 검을 쥐고 더 앞으로 나왔다. 설마하니 부딪쳐보겠다는 것일까?
만용인가 자신감인가. 뭐, 그거야 지금 확인하면 될일.
쿵!
창과 검이 부딪쳤다. 힘으로 단숨에 찍어 눌러버릴 생각이었으나, 의외로 버티는 힘이 상당했다. 순수한 근력은 아니었다. 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강체술의 일종인 듯했다.
"하압!"
노장의 날카로운 기합. 그리고 이어지는 강력한 반발력. 밀어낸다기보다 튕겨내는 것에 가까운, 기이한 힘이 군터를 배척했다. 버티는 것보다는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터는 오히려 더욱 거칠게 밀어붙였다.
"으음!"
루벤 카드모스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검을 맞댄 창에 실린 힘은 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다. 명백히 상상 이상의, 말 그대로 괴력이었다.
"장군!"
호위병들이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군터는 한 번 더 강하게 창을 밀었다. 그러자 루벤 카드모스가 거친 숨을 토하며 뒤로 밀려났고, 그 순간 검은 선 하나가 길게 그어졌다.
"……!"
긴 호선. 그 궤적에 걸린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사람, 말, 무기 할 것 없이 전부.
비명도 없었다. 그 소름 끼칠 정도로 매끄러운 검은 선을 보며, 루벤 카드모스는 전율했다. 비록 젊었을 적에도 무공이나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린 적이 없던 그였으나, 이 나이까지 무장으로 살며 봐온 것들이 있었다. 안목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절대 평범한 일격이 아니었다. 무언가, 섬뜩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저 거무튀튀한 창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의 등줄 기마저 축축하게 적실 정도였다.
"절대 정면에서 맞서지 마라!"
동료들이 무력하게 썰려나가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그의 병사들은 기죽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과 기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관의 명에 따라 정면에서 부딪치는 대신 거리를 벌리면서 포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디라쿠스!"
"옛!"
"해야 할 일을 하라!"
"옛!"
호명을 들은 무관이 간략하게 군례를 취하고는 휘하 군졸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약속된 신호다. 지금이 아닌, 아주 예전부터 약속된 신호.
이런 부류의 적들이 있다. 흔히 맹장, 용장이라 불리는 이들. 그들은 복잡하게 머리를 써야 하는 군략보다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성향은 전장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딱 지금처럼.
'직접 군을 이끌고 돌파해 나왔다. 이끌고 온 병력은 최정예겠지.'
스스로 창 끝이 되어 목표를 찌른다. 그리고 그 목표는 대개 적장이나, 전략적 요충지다. 찌를 수만 있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길 수 있는.
그러나 창을 내지른다는 것은 그만한 위험부담을 지는 일이다. 목표를 제대로 찌르지 못하거나, 창이 다 뻗기도 전에 공격을 당한다면 어찌 될까. 게다가 창이라는 것은 쇠로 된 창 날만 피하면 어떻게든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날카로운 것은 창 끝뿐이다.
'꼬리를 문다.'
용력을 믿고 앞으로 나서는 이들을 상대하는 법은 정해져 있다. 주 전력을 이끌고 앞으로 나왔다면, 상대적으로 후미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면충돌은 피하면서 후미를 노리는 거다.
'…….'
군터는 적의 일부가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적의 속셈을 간파했다. 왜 모르겠는가? 스스로 군을 이끌고 선두에 서기를 즐기는 만큼, 적이 어떻게 나올 때 가장 성가신지도 당연히 알고 있다. 다만 조금 놀란 것은, 적장이 자신의 목이 위태로워진 상태에서도 곧장 그런 지시를 내렸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면서 침착하게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군터의 물음에 루벤 카드모스가 씩 웃었다.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게 버티는 일이지. 별 다른 재주도 없는 내가, 오직 버티고 버티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거든."
팔이 저린지, 허공에 검을 몇 번 휘두른 그가 말을 이었다.
"인정하지. 자네는 괴물이야. 하지만 쉽지 않을 걸세."
"글쎄. 그럴 것 같지는 않군."
"그런가? 하지만 곧 알게 될 게야."
그렇게 말한 루벤 카드모스는 계속 싸워보겠다는 듯 검을 고쳐 잡았다. 군터는 그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후미를 노리고 병력을 나누어 보낼 때, 군터는 그가 뒤로 몸을 숨길 것이라 예상했다. 자신을 미끼로 이쪽을 최대한 끌어당기면서…….
'아니. 미끼로 쓰는 건 맞군.'
차이가 있다면, 미끼를 뒤로 슬슬 빼는 대신 코앞에다 대고 흔들어대고 있다는 점일까.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여유로운, 혹은 여유로운 척하는 저 얼굴을 짓뭉개주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순간, 군터의 전신에서 보다 짙은 사기가 흘러나왔다. 이제 그의 안에 깃든 사기는 그의 마음과 동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가 적장의 죽음을 상상하자, 그의 기운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덩치를 부풀렸다.
"대단해. 섬뜩한 힘이야. 불길하기까지 하군."
루벤 카드모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시끄러운 전장에서도, 그 크지 않은 목소리는 군터의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군터는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적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기세를 온전히 받아내고도 저 따위 한가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자는.
나름대로 한 수가 있다는 것은 방금 겪어봐서 알지만, 정말 그것만 믿고 저렇게 까부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더 있는 건가? 뭐가 됐든, 저 색다른 반응은 여러모로 군터에게 색다른 자극이었다.
흥미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군터는 그 미묘한 감정을 창에 담아 다시 휘둘렀다. 이번에도 역시나 루벤 카드모스는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직접 나서기도 전에 그를 지키는 병사들이 몸을 던졌다.
"물러나라!"
"용서하십시오 장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병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군터가 거칠게 창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그들도 대비를 한 터라 단번에 쓸려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널리고 널린 잡병이 아니었다. 타고난 자질도 뛰어난 이들이 다년간의 단련과 실전을 걸쳐 왔으니 전투에서 그들의 감각은 보통 수준을 넘어섰다. 오싹한 감각이 밀려온다 싶은 순간, 그들은 망설임 없이 말의 목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바짝 엎드렸다. 동시에 그들의 머리 바로 위로 서늘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반저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면 평소 병사들에게 잘 대해줬나? 기꺼이 죽음마저 감내할 정도로?
'좋다.'
쓰러뜨릴 적이 시시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아니, 정말 그런가? 적이 강한 것이 반길 일이라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주 잠깐 든 의문 아닌 의문에, 군터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던 의문은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뭐였지? 하고 다시 한 번 떠올려보려 했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중요한 건 지금 그의 앞에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맞서는 적이.
군터가 다시 앞으로 나서려던 때, 살라스가 우측에서 치고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듯, 좌측에서는 아드리안이 튀어나갔다. 그에 군터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적의 신경이 흐트러졌고, 군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당황하지 마라! 측면으로 도는 놈들은 무시한다!"
루벤 카드모스가 당황하는 병사들을 보며 일갈했다. 그러자 혼란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군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지휘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순간이었으나 적은 동요했고, 군터에게는 그 순간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충분히…….
'음?'
빠르게 거리를 좁히던 중, 군터는 정면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조그마한 의혹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 창을 내질렀다.
그러자 직선으로 뻗어나가던 창 끝이 어느 순간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마치 미끄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웃기는 수작이로군.'
술수라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하다 보니 이제는 처음 보는 능력을 맞닥뜨려도 별로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수작에 대응하는 법은 간단하다.
"흡!"
군터가 창에 사기를 몰아넣고 폭발시켰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폭발보다는 순간적인 발산에 더 가까웠다. 힘을 최대한 몰아넣고, 한 순간에 강하게 발산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창의 방향을 제멋대로 바꿔놓던 정체 모를 힘은 사라졌다.
"으음!"
루벤 카드모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고 군터는 이 수작이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을 토해내며, 군터는 적장을 향해 내달렸다. 적병들이 이번에도 그의 앞을 막아 섰지만, 그들에게 두 번째 행운은 없었다. 이번에 그어진 선은 조금 전의 것보다 한층 더 빨랐다. 감각의 경고에 반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촤악!
몸을 떠난 목 두 개가 동시에 허공에 떠올랐다. 연달아 찌른 창 끝에 한 명의 심장이 뚫리고,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던 한 명은 군터의 왼손에 머리가 붙들렸다.
콰득!
투구가 찌그러졌다. 그 안에 있던 머리가 형체를 잃고 붉고 흰 액체를 토해냈다. 비명은 없었다.
"교활한 놈. 직접 맞설 것처럼 유난을 떨면서 부하들만 앞으로 떠미는군."
찌그러진 머리통을 한쪽으로 밀어버리며, 군터는 적장을 응시했다. 노장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제야 현실을 직시한 걸까? 두려움이 뭔지 새삼 깨달았는가?
"떠민다고?"
그런데, 그는 웃었다.
"장수는 본디 그런 존재. 부하들을 계속해서 죽으라고 떠밀지. 그게 바로 전쟁 아니던가. 자네나 나나, 위에 계신 분들이나, 결국 다르지 않아."
군터가 창을 들어 적장을 겨눴다.
"유언치고 꽤 길군."
이제 죽음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적장의 웃음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거칠군. 하지만 나쁘지 않아. 체절한 것도 좋지.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어울려."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군터는 이제 상대의 말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전장에서 사담은 사치다.
군터가 전속력으로 말을, 아니 괴물을 몰았다.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창을 내지르고, 그 다음 순간, 창끝은 이미 적장의 코앞까지 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다시 한 번 창 끝이 방향을 바꿨다. 예상했던 바였다. 군터는 코웃음을 치며 기합을 내질렀다. 창에 어려 있던 죽음이 사방으로 번지며, 창끝에 달라붙어있던 무언가를 짓뭉개버렸다.
"큭!"
그러나 이미 약간이지만 방향이 틀어졌기 때문일까. 목젖을 노렸던 창은 목 옆을 살짝 가르는 데 그쳤다. 그것만으로도 가볍지 않은 상처였으나, 상대를 즉 사에 이르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검.
반듯한 검이다. 어떠한 거짓도 없이, 꾸준하게 수련해왔음을 증명하듯 절도 있게 뻗어오는 검. 백발이 성성한 노장이 내질렀다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힘이 실린 검이기도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내지른 마지막 일격. 그것을 보며, 군터는 어쩌면 창의 방향을 틀었던 것이 함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어설프게 방해를 걸어 힘을 쓰게 유도한 다음, 즉사만 면할 정도로 상처를 허용하고 역공을 가한다는 계산, 힘이 달리는 쪽에서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한 수다. 어지간한 각오가 없으면 생각해내더라도 실행에 옮기기 힘든 방법이지만, 지금 이 검에서는 그 각오가 보였다.
하지만,
쾅!
직선으로 찔러오던 검이 허공에서 튕겨나갔다.
비어있던 주먹으로 검 옆면을 후려친 군터가, 빗나간 창을 다시 휘둘렀다. 비틀거리던 적장의 몸을 창대가 후려치고, 적장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낙마했다.
"크, 크헉!"
몸은 흙투성이. 투구는 낙마하면서 벗겨졌는지 엉망이 된 백발이 지저분하게 흩날렸다. 군터는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남길 말이라도 있나?"
"크…흐흐, 패장의 넋두리는 추하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다만, 아쉽군. 안타까워."
"……."
"죽지 못한 폐물들만 남은 시대지. 자네에게는 100년 전이 어울려. 아니, 50년 전만이라도 괜찮았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 이 시대는,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
말이 끝났다고 판단한 군터는 창을 앞으로 밀었다.
날카롭기 그지 없는 창 끝이, 이번에는 정확하고 부드럽게 목젖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