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화
창대를 타고 내려간 창이 벼락이 꺾어지듯 급격하게 방향을 바꿨다.
이름 모를 적장의 몸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기감을 지닌 이라면 그 기운이 갑옷이나 껍질처럼 피륙 위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쿵!
창 날이 목에 닿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날은 곧장 살을 가르지 못했다. 예의 기운이 두꺼운 방패가 되어 막아선 탓이었다.
충돌의 순간, 군터는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목에 창 날이 들어오고 있음에도 상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전의로 가득 찬 눈에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공격이 자신에게 닿을 일은 없다는 듯, 담담하기만 한 얼굴.
군터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량한 재주를 믿고 자신의 앞에서 뻗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어린 아이나 느낄 법한 유치한 감정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으스러뜨리리라. 찢고, 죽여 없애리라.
기분 탓일까? 두 눈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창을 휘두르는 두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갈라져라!'
보이지 않는 벽을 검은 창 날이 파고들었다. 쩌적!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검은 날은 이미 피를 뿌리고 있었다.
캬아아아-!
뿔 달린 말이 울부짖었다. 목이 날아간 것은 기수이건만, 고통은 저가 느끼는지 놈은 흉포하게 울부짖으며 군터가 탄 말을 들이받았다.
히히힝!
군터가 탄 말도 혈통 있는 군마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녀석이라지만 뿔 달린 말의 힘에는 당해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타고 있는 말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자 덩달아 그 위에 있던 군터도 흔들리 수밖에 없었다. 군터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재차 창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몸을 부딪쳐 오려던 뿔 달린 말의 목이 단번에 잘려나갔다.
"장군!"
"걱정은 필요 없다! 앞질러 가라!"
멈춰 선 군터를 향해 양 옆에서 두 개의 창이 찔러 왔다. 군터는 그 중 조금 더 빠르게, 왼쪽에서 찔러오는 창을 맨 손으로 잡아채고 힘껏 잡아당겼다. 창을 쥔 적은 당혹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끌려왔고, 군터는 창을 끌던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붙들고 그대로 분질러버렸다.
우득!
어렵지 않았다. 방금 전 목을 날렸던 적장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손길을 가로막았으나, 영문 모를 분노와 살의가 넘실거리는 그의 손은 어렵지 않게 그 미지의 기운을 부숴버렸다.
캬아아-!
이번에도 역시나, 뿔 달린 말이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부딪쳐왔다. 심지어 이번 녀석은 무작정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뿔을 앞세워 찔러왔다. 눈 한번 깜빡이고 나면 아직도 비틀거리는 말은 목 언저리에 구멍이 난 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흥!"
말을 제 목숨처럼 여겨야 한다. 군문의 병사라면 처음 말을 탈 때부터 질리도록 듣는 말이다. 전장에서 맡게 되는 임무의 특성상, 말을 잃은 기병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분명 틀리지 않은 격언이다. 군터 역시 말을 자신의 목숨처럼, 분신처럼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 말이란 손에 쥔 창칼보다 중요치 않은 도구에 불과했다.
히히힝!
버림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말이 구슬픈 울음을 토했다. 그리고 연이어, 그 울음은 처절한 비명으로 변했다.
푸욱!
뿔이 목 옆을 파고들었다. 제 뜻을 이룬 짐승은 만족스러운 듯 낮게 울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던 군터가 목 꺾인 기수를 걷어차 밀어내고 그의 자리에 안착했다.
히힝?!
주인이 나가떨어졌다는 것도 알아차리기 전에, 놈은 육중한 충격과 무게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군터의 두 다리가 놈의 몸통과 배를 휘감은 뒤였다.
콱!
방금 전 주인의 목을 꺾었던 손이 이번엔 말의 뒷덜미를 쥐었다. 군터의 완력이라면 말 같은 큰 짐승의 뼈도 얼마든지 꺾어버릴 수 있었으나 지금 그의 위협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근육의 힘이 아닌, 영혼에서부터 뻗어 나온 음험한 기운이 말의 탈을 쓴 짐승의 본체를 휘어잡았다.
'굴복하지 않는다면 없애버리겠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거칠게 몸부림치던 짐승이 움직임을 멈추고 낮은 울음을 흘렸다. 군터는 그것을 굴종의 표현이라 여기고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으로 고삐를 잡았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출렁이는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소한 감각이었으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을 탈 때보다도 더 편했다. 말을 타고 있을 때는 말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일체감을 느꼈다면, 이 짐승의 경우는 육신을 넘어 영혼마저 공명하는 것 같았다. 적에는 경험한 적 없는 고양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더 깊숙한 곳까지 차 올랐다.
'그렇군.'
이 이름 모를 짐승, 혹은 괴물과 연결되고 나니 알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이 괴물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괴물의 존재감은 저 먼 곳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군마에게 빙의한 녀석은 본체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부터 소환된 일부에 불과했다.
이 괴물의 소환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계약자에게 크게 의존하는 것만 것 분명해 보였다. 계약자의 목을 분지른 후부터 괴물의 존재감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은 사라질 것이다.
"이익!"
군터가 잠깐 발이 묶인 사이, 그를 앞질러 갔던 살라스와 아드리안 등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마상전투 실력은 어딜 가더라도 큰소리 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맞붙는 적과 접촉을 아예 피할 수는 없었다. 그건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쿵!
방어를 도외시한 육탄돌격. 창을 최대한 뻗어봐도 창 날은 벽에 부딪친 것처럼 튕기거나 멈춰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이런 일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도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최대한 충돌을 회피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작정하고 따라붙는 적을 떼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작정 피할 수만도 없었다. 앞서가는 그들이 피하기에 급급해서는 군의 대열이 무너질 테니까 말이다.
"비켜라!"
그러던 중. 뒤에서 들려온 군터의 목소리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군터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다.
적들이 기묘한 술수를 부려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군터라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충성심에 기반한 맹목적인 신뢰가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직접 보고 겪어오면서 쌓인 믿음이었다.
'빌어먹을!'
말머리를 돌리며, 살라스는 이를 악 물었다. 평범한 자신의 창칼이 원망스러웠다. 이름난 무장들 가운데 법구를 무구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 관심 없이 넘겼다. 하지만 지금,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평범한 자신의 창칼이 원망스러웠다. 그것이 결국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드리안! 둘로 갈라지세!"
"알겠습니다!"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살라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아드리안에게 지시를 내리곤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의 측면을 빙 둘러갔다.
기이한 힘을 발휘하는 녀석들은 비율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았다. 문제는 놈들이 선봉에 섰다는 것. 그리고 한 데 뭉쳐있다는 것이었다. 우회하려고 해도 놈들이 작정하고 따라붙으면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군터가 정면에서 놈들과 부딪치고 있다. 그렇다면 성가신 놈들은 그에게 맡기고, 이쪽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
'뭐지?'
군터가 각기병들과 정면에서 맞서고 있을 때. 루벤 카드모스는 뭔가 잘못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구체적인 전황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적진을 파고드는 아군의 속도가 줄었음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적과 교전을 시작했으니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 면에서 그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과한 반응이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벤 카드모스는 각 기병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그들의 돌격을 막을 수 없다. 알고 있다면 모를까, 모르는 상태에서 정면으로 그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상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맞설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기병돌격에 어찌 대응 하겠는가.
그런데, 벌써부터 속도가 줄어듦은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설마 막힌 걸까? 아니면 어떤 이유로는 발이 묶였나? 어느 쪽이든 간에 예상 밖이다.
인정해야 한다. 계산이 틀어졌다. 전장에 변수는 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해왔지만 직접 경험하게 될때면 늘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돌리느냐. 밀고 나가느냐.'
일군을 이끄는 장수라면 언제든, 누구나 똑같이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그런 똑같은 상황에서 차이를 만드는 건 장수의 판단력과 결단력.
'돌리기에는…이미 들어간 것이 너무 크지.'
무엇이 옳은가, 혹은 더 나은가. 그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을 미루지도, 회피하지도 않았다.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르는군.'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안, 기대, 즐거움, 온갖 감정이 뒤섞여 뛰고 있다. 몸뚱이는 다 늙고 쇠약해졌지만, 이 떨림은 틀림없이 예전 그대로다.
"속도를 내라!"
각기병을 위시한 기병이 막혔다면, 더 이상 밀고 나아갈 수 없다면 뒤에서 받쳐주면 된다.
뚫느냐, 막히느냐. 이 전투의 승패는 거기서 갈리게 되리라.
"진격하라!"
흥분에 몸을 맡긴 루벤 카므모스는 직접 검을 들고 선두로 나섰다. 호위대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지만,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아니, 애써 무시했다.
그는 지금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칼과 창한 자루. 말 한 필에 의존해 한 목숨 지키기에도 급급한 애송이였던 그때로, 매 순간이 사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위기를 해쳐나갔고, 그 뒤에 숨어있던 기회를 거머쥐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너머에는 분명…….
콰앙!
상념을 깨는 굉음. 동시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인의 장막이 갈린다.
피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비현실적인 광경. 그 한가운데에 익숙한 신형이 보인다.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어둠. 루벤 카드모스는 그것에 눈길을 빼앗겼다.
'저게 뭐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문했고, 곧 스스로 답을 냈다.
'저것은…죽음인가?'
바보 같은 답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눈에 보인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장군! 피하십시오!"
피한다? 바보 같은 소리, 저것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이 아가리를 벌린다. 폭풍이 덮쳐오는 듯했다.
섬뜩한 비명이 가까워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만 보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다려왔다. 하지만 기다려온 손님이라고 해서 그냥 맞이할 수는 없다.
늘 상상해왔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맞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래. 와라!"
노장의 몸에 혈기가 솟구쳤다.
"아악!"
앞을 가로막았던 호위병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흩날리는 피와 살점 속에서, 검고 붉은 창이 한 대의 화살처럼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