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8화
둥! 등! 둥!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 전고의 울림.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피를 보게 될 것만 같은 확신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움찔움찔 떨릴 정도이니,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읽힌 건가?'
무지함과 현명함은 때때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루벤 카드모스는 연이은 도발과 위협에도 반응하지 않는 적을 보며 어느 쪽인지 고민했다.
상대를 과대평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 하지도 않는다. 상대는 만만치 않으며, 힘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어느 정도는 머리를 쓸 줄 안다. 눈치도 빠르고,
'읽혔군.'
루벤 카드모스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어디서 틀어진 것일까? 너무 뻔한 눈속임이었나?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읽혔다고 한다면, 그건 이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저쪽이 뛰어나서일 터.
그는 자책하지 않았다. 대신 어찌할지를 고민했다.
'골고스를 공략중인 군대를 물린다면 손해는 보지 않는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아무리 이쪽을 무시한다고 해도 아예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최대한 물고 늘어지면서 속도를 지연시킨다면 골고스 쪽 군대가 빠질 시간을 버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그래. 그렇게 되면 손해는 없다. 문제는 잃는 것도 없지만 얻는 것도 없다는 것.
'어찌할까.'
이 결정 한 번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의 향방에 적잖이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장군. 놈들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붙어볼까요?"
"……."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하지만,
"장군?"
"그러도록."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겉으로는 별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쉽게 결정을 내린 것 같아 보였다.
"각기병(角騎兵)도 동원한다."
"예?"
"놈들은 지금, 우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분명 우리가 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그리고 아직은 아니라고,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러니 지금 바로 친다. 전력을 다해서."
"아…알겠습니다."
***
세상에는 온갖 신비가 존재한다. 그럭저럭 흔하게 들어봤거나 실제로 종종 볼 수도 있는 비교적 흔한 것들부터 오래된 책이나 전설에서만 접할 수 있는, 실존하기나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들까지.
각수(角獸)라고 부르는 것들은 명백히 후자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생물이라고 하기도 뭐한, 엄밀히 따지자면 정령에 가까운 것들. 그것들은 사람들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눈에 보이는 세상 이면에 존재한다.
누가 먼저 각수의 존재를 발견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던 제국이 그들이 무너뜨린 한 왕국에서 얻은 비서(書)에 그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 수십 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것들과 접촉하고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만이 그나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후, 그 신비의 명맥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연구가 끝나고, 이제 활용만이 남았던 그즈음에 제국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다. 황제는 전장을 떠나 황도에 머물렀고, 그 후로 벌어진 전쟁이라고는 국경에서의 산발적인 전투나 시답잖은 몇몇 반란이 전부였다. 그런 조용한 세월이 계속되면서, 각수에 대한 것은 점점 묻혀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는 아는 이를 찾기 힘들지만, 그 당시 각수의 비밀은 카드모스 가문에 이어졌다. 제국의 명문 무가인 카드모스 가문은 평화의 시기에도 언젠가 올 전란을 기다리며 묵묵히 비밀의 지킴이로서 본분을 다했다.
그리고 지금.
'막을 수 없겠지.'
사실 카드모스 가문은 이전에도 몇 번 각기병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다만 끝을 볼 수 있는, 다시 말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싸움에서만 비장의 한수로 사용해 왔다. 거기에 각수라는 것이 그리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덕에 그들은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올 수 있었다.
"장군."
평범한 인상의 무관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카드모스 가문의 가신이었으며, 백여 명의 가병을 이끄는 지휘관이었다.
"때가 되었네."
"언질을 받았습니다."
"미안하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는 언제나 장군과 카드모스 가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족함 없는 무대일 걸세."
"그것을 알기에, 지금 소관은 오히려 기쁩니다."
사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웃음일까,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일까. 루벤 카드모스는 이왕이면 후자이기를 바랐다.
어렸을 적부터 가문에서 육성한 가신이요, 가병이다.
그들 하나하나,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 외우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어야 한다.
"눈으로나마, 자네들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겠네."
"영광입니다 장군.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음."
당당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루벤 카드모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쐐기 진형을 갖춘 기병 부대의 가장 앞에,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기병 일백여 기가 섰다.
***
"장군! 적이…!"
보고가 들리기 전에 이미 알아차렸다. 군터의 기감은 한참 전부터 등 뒤의 적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반반이었다. 위협이 위협에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골고스를 포위한 병력이 퇴각할 때까지 시간만 버는 정도로 끝낸다면 저쪽도 별다른 손해는 없는 셈일 테니까.
하지만, 보아하니 적장은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온다."
"예?"
시어문드가 눈을 크게 뜨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이제 막 작게 일기 시작한 먼지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깃발 몇 개 정도였다.
"공격입니까?"
"정연한 군기와 거친 살기. 볼 것도 없지."
군터의 기감은 이미 물체를 눈으로 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기운도 놓치지 않는 그가, 이렇게 수천수만의 군대가 발하는 기운을 놓칠 리 없었다.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준비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놈이니 주의하도록."
"예. 물론이지요."
군터는 시어문드에게 지휘를 맡기고 후방으로 향했다. 그가 움직이는 사이 군대는 빠르게 진형을 바꾸었다.
"온다!"
"기병이 선두다! 침착하게 창만 들어도 반은 이기고, 들어가! 허둥대지 마라!"
군터는 점점 가까워지는 적 군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았다.
'치고 빠질 생각인가. 그렇다고 해도…역시 무모해.'
기병을 앞세우는 것부터가 그렇다. 제법 무장을 튼실히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중장기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치고 빠지는 것을 염두에 뒀다.
면 당연히 무장을 가볍게 해야 하지만, 그러면 첫 충돌때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아니, 설마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뭔가 있군.'
확신한다. 적장, 루벤 카드모스가 뭔가 꾸미고 있음이 틀림없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한 전장에서 몇 번이나 부딪치며 군터는 상대를 읽었다. 루벤 카드모스가 전장에서 어떤 자인지, 누구보다 깊게 이해했다. 상대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방식은 생소하며, 이해할 수 없다.
루벤 카드모스는 이런 식으로 병사를 움직이지 않는다. 이 단순하고 과격해 보이는 지휘 안에 무언가 숨어 있지 않은 이상,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이냐.'
이전에 있었던 몇 차례의 전투에서 보이지 않은 한 수가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루벤 카드모스는 그 몇 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술책의 너머에 칼날이 숨어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살라스! 아드리안! 내 뒤에 붙어라!"
살라스는 말할 것도 없고, 아드리안 역시 일군을 이끌기 부족함이 없는 재목이다. 그런 이들을 부관처럼 부리는 것은 평소 같았으면 사치다. 하지만 군터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예!"
확인한다. 그리고 정면으로 맞붙어 쳐부순다.
***
히히힝!
창의 벽을 앞에 두고, 흥분한 군마의 몸이 굳는다.
잘 훈련된 군마임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왜 안그렇겠는가. 죽음을 각오했다는 사람조차 떨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무는 판에.
'두려워 마라.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내가 혀를 깨물었다. 부드러운 살에서 흘러나온 피가 입안을 적시다 입천장에 닿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점점 붉어지던 눈에서 기어이 핏물 한방울이 뚝 떨어졌다.
단 한 방울의 핏물. 그것은 말의 목 뒷부분에 닿았고, 닿자마자 증발하듯 사라졌다.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핏방울이 말라 사라지던 그 순간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선이 이어졌다. 기수와 말, 그리고 또다른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그 선을 타고 흐릿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일렁이던 그것은 곧 군마를 감싸 안고 녹아들었다.
우우
이제 군마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굳어 있던 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
"하아… 하아……."
사내의 입에서 피비린내가 새어 나왔다. 각수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머무는 세계와 접해야 한다.
의식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전장에서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바로 계약자가 스스로 이면세계에 다가가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흐트러뜨림으로써.
우-우!
군마의 이마 쪽에 흐릿하게 가시 같은 것이 돌출되어 있다. 눈으로 봐서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나, 기감이 발달한 자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시, 뿔이야말로 이 신비로운 존재가 각수라 이름 붙은 이유다.
각수는 지치지 않는다. 육신을 빌렸으나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평범한 창칼에는 상처 입지 않으며, 상처 입지 않으니 쓰러지거나 죽지도 않는다. 오직 신비를 담은 힘만이 각수를 멈춰 세울 수 있는데, 그마저도 어지간한 힘으로는 화만 돋울 뿐이다.
"돌파하라!"
사내가 크게 외치고 길게 쥔 창을 내질렀다.
***
쾅!
본래의 계획은 창병들이 적의 돌진을 한 번 막아내고, 후에 길을 트는 것이었다. 그 후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이 멈춰선 적을 들이받아, 그대로 밀어낸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그 뒤의 적들까지 집어삼키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 그림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창병의 벽이 적 기병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뚫려버린 것이다.
'뭐지?'
군터도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벽을 뚫고 튀어나온 적 선두를 본 후에야 뭐가 잘못됐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건…….'
흐릿한 무언가를 갑옷처럼 두른 말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독특한 마갑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넘길 수 있었겠으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머리에 달린 뾰족한, 얼핏 뿔 같아 보이는 그것.
'이거였군.'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벽을 뚫고 나온 적 기병은 하나 같이 저 괴상한 말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몸 곳곳에 상처 입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부딪치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물러서라!"
평범한 병사들로는 저 흉포한 돌격을 막아설 수 없다.
군터는 크게 일갈하며 말을 달렸다. 살라스와 아드리안이 바로 그를 뒤따랐다.
"나를 찾고 있느냐!"
적의 선두. 역시 뿔 달린 말을 탄 기수와 군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두두!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상대가 창을 들었다. 전형적인 마상창이었다. 길이만 놓고 보면 군터의 창보다 몇 뼘은 더 길어 보였다.
챙!
창끝과 창끝이 부딪쳤다. 군터는 충돌한 순간 창을 비스듬히 눕혔다. 카각! 불똥이 튀며 창과 창이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