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화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머리가 멍해지고, 멍청한 의문에 사로잡힌 것은 잠깐이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군터 크렘보르가 군대를 거느리고 적과 맞서고 있다. 이틀 전에 당도한 전령이 전한 바에 따르면, 전황은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곧 공격을 개시할 거라고 했으니 지금쯤 한창 맞붙고 있을 터. 물론 군터 크렘보르가 순식간에 적에게 당해버렸다는 가정도 아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아.'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다. 그에게 받은 개인적인 인상과는 별개로, 군터 크렘보르는 능력 하나만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절대 무능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그가, 아무리 상대가 그 루벤 카드모스라고 한들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적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이제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는 것 따위는 무의미하다. 항복할게 아니라면,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수하들을 일별하고, 보머 바쉬는 이를 악물며 침묵을 지켰다.
***
'침착하군.'
땅이 갈라지고, 군터와 병사들이 멈칫하는 동안 적들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군터는 아예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적들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군터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순간,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거다.'
너무 소극적이긴 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도 생각했고, 하지만 어찌 알았겠는가. 전장까지 그럴싸한 곳으로 선점해놓고, 실제로는 제대로 한 번 붙어보는 대신 뒤로 뺄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이야.
'왜지?'
한 가지 의문은 풀렸으나, 또 다른 의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면, 굳이 이곳에서 기다린 이유는 무엇인가?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마주칠 일도 없이 미리 멀찍이 물러났으면 될 일이 아닌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피를 흘려가며 수작을 부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군터가 신경질적으로 창과 칼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안장에 걸어 둔 활을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수작을 부리는 적장에 짜증이 일었다.
피잉!
화살 한 통이 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대로 보고 쏘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대충 쏘는 모양새였으나,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어김없이 사람 하나의 명줄을 끊어놓았다.
"장군, 어찌할까요?"
쫓느냐 마느냐.
군터는 잠깐 고민했지만, 곧 욕심을 접었다. 지금 바로 쫓아가면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야 있겠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물러날 작정이었다면 당연히 이 이후도 대비했을 터. 그렇다면 추격한 후에 벌어질 싸움은 지금까지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고, 어찌어찌 이긴다고 해도 피해가 클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적을 패퇴시킨 것은 사실이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다. 시끄럽게 짖어대는 놈들을 무시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될 테니.
그렇게 생각하고, 군터는 추격하지 말 것을 명했다.
전장의 상황은 곧 정리됐다. 예상했던 대로, 상황은 살라스와 아드리안 쪽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쫓고 싶었습니다만……."
"잘했네. 무리해서 따라붙었다가는 낭패를 봤을 거야."
"역시 그랬겠지요."
아드리안도 이제 혈기 넘치던 젊은 무관이 아니었다. 난폭한 성정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 역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 뻔히 보이는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호기를 부리며 제 발로 거기에 발을 들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시어문드와 아드리안이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살라스는 군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놈은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군터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적장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놈의 의도는 성공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그랬느냐겠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장군! 골고스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속히 지원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군례마저 잊고 절박하게 외치는 전령. 그가 전한 급보에, 군터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그게 사실이냐?"
처음은 의심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루벤 카드모스의 대장기를 든 적과 금방 일전을 치르지 않았나. 지금도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골고스가 공격을 받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쪽에 혼란을 주기 위한 적의 술책이라고 의심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입니다! 여, 여기 사령관께서 전하시는……."
전령이 품속에서 꺼낸 서신, 거기에는 분명 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군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신을 구겼다.
"어찌 된 일이냐."
"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전령은 그가 본 것, 그리고 들은 것을 소상히 전했으나 그래 봐야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기껏해야 갑작스레 적이 나타났고, 순식간에 골고스를 포위했다는 것 정도.
"아무래도…함정은 아닌 것 같군요."
시어문드가 말했다.
전령이야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 있다고 해도, 보머바쉬의 직인이나 그의 필체는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직인 같은 경우는 더 그렇다. 독특한 문양도 문양이지만, 귀족 가문의 직인에는 술법의 힘이 섞여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군터는 보머 바쉬의 직인을 몇 번이나 보았기에 잘 알았다. 이것은 분명 그의 직인이 맞았다.
"우리를 끌어내고 골고스를 친다. 훌륭하군요. 어떻게 병력을 빼돌린 것인지는…아!"
홀로 중얼거리던 시어문드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성을 내뱉었다. 군터의 시선이 향하자, 시어문드가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일전에, 루벤 카드모스에게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떠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군요. 아니, 분명 그럴 겁니다."
"그게 속임수였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돈벌이를 찾아서 북상했다고 생각했던 놈들이, 사실은 은밀하게 길을 바꾸어 골고스로 향한 거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놈들이 용병이 맞는지도 의심이 드는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적의 중군이 이상할 만큼 형편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그놈들이 정규군이 아니라 복색만 그럴 듯하게 갖춘 용병이었다면 어떻습니까? 쓸모없는 놈들을 눈속임용으로 배치하고, 제대로 된 전력은 은밀히 빼돌려서 골고스를 노린 거라면……."
시어문드의 추측은 과격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제법 그럴듯했다. 살라스와 아드리안이 설마 하는 생각에 반신반의할 때, 군터는 그 추측이 맞을 거라는 데 마음이 기울었다.
"장군. 당장 회군하셔야 합니다. 골고스가 함락당한다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맞이해야 할뿐 아니라, 보급마저 끊기게 됩니다. 철저히 고립되겠지요."
"바로 말머리를 돌리라는 소리냐."
"추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만약 추측대로라면, 적은 우리를 쫓지 못합니다. 설령 그런 시늉을 한다 한들, 시늉일 뿐일 테고요. 왜냐하면……."
"놈들의 절반 정도는 용병일 테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어설픈 전력으로 뒤를 물려 하다가는 자칫 반격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 적장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시늉은 하겠지만,
"돌아간다."
추측일 뿐이다. 만약 잘못된 추측이라면 크게 피해를 보게 될 터. 그러나 군터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어문드를 믿어서만은 아니다. 적이 보였던 이상한 움직임. 정황.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은 일종의 감이었으나, 그것이야말로 군터가 이제껏 믿고 따랐던 전부였다.
"회군한다!"
갑작스러운 회군 명령. 그것도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의 회군.
병사들이야 의아해도 명령이 떨어졌으니 군말 없이 움직였지만,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장교들은 이 갑작스러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린 살라스가 그들을 한데 모아 상황을 설명했다.
"골고스가 적에게 공격받고 있다."
"예? 어찌 그런……."
"사실이다. 병사들의 귀에 들어가는 일이 없게 주의하도록."
의문도, 의심도 없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믿기 힘는 말이라도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신뢰도가 달라지는 법. 그런 면에서 살라스의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
"빠르군."
적이 회군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루벤 카드모스는 쓰게 웃었다. 그는 적이 조금은 망설여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너무 과한 기대였던가.
'의심하고, 망설여주기를 바랐건만.'
어찌 일이 항상 기대한 대로 흘러가 주겠는가. 아쉬움은 잠시였다. 그는 즉시 추격에 나설 것을 명했다.
"저…장군, 병사들의 사기가……."
망설이는 목소리에 루벤 카드모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 만하다. 병사들의 사기? 용병들의 사기겠지. 그들은 자신들이 버림말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모른다.
몇몇 눈치 빠른 놈들은 의심 정도야 하겠지만, 그렇다 한들 감히 자신에게 따지고 들지는 못할 터.
그들은 단순히 직전의 자그마한 패배에 기가 꺾이고, 겁에 질린 것이다.
'한심한 것들.'
신념이나 명예도 없이 그저 돈 몇 푼에 목숨을 팔고, 칼을 휘두르는 놈들의 한계다. 기대한 적이 없으니 실망도 없지만, 그래도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현 상황을 알리고 전후의 후한 보상을 약속하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무엇인가."
놈들의 땅에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리려면 출혈이라 할 만큼 큰 지출이 있어야 할 테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살아남은 놈들에게 돌아갈 보상이다. 그렇다면, 머릿수를 줄여놓으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놈들을 달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잘 달래도록. 아직은 써먹을 구석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