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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76화 (876/1,064)

876화

뭔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갑작스레 적의 공세가 헐거워지면서였다.

그들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이는 그와 맞서고 있는 적들 역시도 굉음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뜻.

'어떻게 된 일이지.'

알 수 없다. 그의 기감은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전장 전체를 뒤덮는 수준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넓게 형성된 전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악!"

그러나 혼란스러움은 잠시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눈앞에 적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베어 넘기면 그 뿐.

군터는 혼란에 빠진 적들을 밀어붙였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자 뒤를 지키던 병사들 역시 힘껏 뒤따랐다.

푸욱!

얼마나 찌르고 베어 넘겼을까. 군터는 살짝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잠깐 고개를 돌렸다.

"……."

깃발이 바뀌었다. 수가 늘었고, 순서도 달라졌다. 좋은 신호는 아니다. 시어문드는 살라스와 아드리안의 진격이 멈추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역시 조금 전 들린 굉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것은 없으니까.

예상 밖의 상황이었으나 군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 양 측면의 공세가 막혔으니, 중앙에서 힘을 쓰면 될 일이 아닌가.

중앙으로 향하던 전력이 측면으로 빠진 것인지, 압력이 확실히 약해졌다. 지금이라면 밀고 나갈 수 있다.

"물러서지 마라! 몰아붙여라!"

전투가 시작된 후, 군터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의 함성은 적들뿐 아니라 아군 병사들까지 놀라게 했다.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듣는 이들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에 이끌렸다.

와아아아-!

이제껏 고립되다시피 한 채 세 방향의 적들과 맞서 느라 힘이 빠진 그들이었다. 하지만 군터가 몰아붙이라고 일갈한 순간,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해야만 하며 그렇게 되리라고만 생각했다.

쾅!

군터가 창칼을 휘두르며 앞장섰다. 그를 태운 말이 콧김을 뿜으며 전진했다. 비록 달리지는 못할지언정, 한 번 내딛기 시작한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예상했던 대로, 중군이 밀리고 있습니다."

아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목소리는 가라앉거나 힘이 빠지지 않는다. 말했듯,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비극적인 사건이라도 예상하던 것이라면 그 충격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루벤 카드모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던 부관이 당황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예상하셨던 바가 아닌지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이길 생각도,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던 싸움이다.

측면의 적을 묶어두면서 중군이 밀리는 것도 다 예상하고 계획했던 바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밀리는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

적을 과소평가했는가?

'아니.'

충분히 높게 잡았다. 과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간과한 것이 있다면, 적의 힘이 그렇게 높게 잡은 것보다도 더 위였다는 것. 혹은, 중앙에 놓은 화살받이들이 써먹지 못할 만큼 쓰레기였거나.

'꽤 아프겠군.'

잠시 후 일어날 일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속이 쓰렸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전장에는 항상 변수가 넘쳐나고, 그중 일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커지기도 한다.

"신호를 보내도록."

"벌써 말입니까?"

"불이 붙지 않았나. 일찌감치 끊어줘야 피해가 덜하다."

"아, 옛."

두말하는 상관은 어리석은 상관이지만, 상관에게 두말하게 만드는 부하는 무능한 부하다. 다행히 그의 부관은 어리석지만 무능한 자는 아니었고, 루벤 카드모스는 그 점에 만족했다.

***

적은 생각보다 쉽게 밀려났다. 기세가 잔뜩 오른 아군에게 위축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군터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별 저항 없이 물러나는 적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무기를 휘두르고, 피를 보면서 그런 위화감을 감지할 수 있는 이는 지금 이 전장에서 오직 그 한 명뿐이었다.

'뭐지?'

함정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지만, 설마 여기까지 와서? 보이지 않는 곳에 얼마 안 되는 병력이라도 매복시켜둔 걸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령 정말 매복이라고 해도 별 위협은 되지 못할 것이다.

'끌어들여서 둘러쌀 생각인가?'

시어문드의 신호에 따르면 살라스와 아드리안은 지금 발이 묶였다. 그렇다면 그쪽으로 움직였던 병력을 이쪽으로 돌리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상황이 조금 심각해질 수도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졌군.'

문득, 군터는 자조했다. 자신이 언제부터 전장에서 이렇게 생각이 많았던가. 머리로만 전장을 이해하려는 부류를 좋아하지 않았던 자신이, 언제 이렇게 그들과 닮은꼴로 변해버린 것인가.

이제껏 그를 이끌어준 것은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가 아니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이 뛰어대던 이 가슴의 울림. 그 울림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홀로 울리는 그만의 전고(戰鼓)가 지금은 밀어붙여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따르면 그뿐.

"이익!"

말에 오른 군터는 큰 표적이었다. 본래 덩치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그가 덩치 큰 말 위에 올라 있으니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게다가 무장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가 대장이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특별한 구석이 있었으니 공명심을 지닌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만큼 유혹적인 대상이었다.

그러나 불빛에 홀린 부나방들이 수십이 넘게 목이 달아나고 몸이 쪼개지자, 공명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이들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죽고 나면 전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들은 수십이나 죽이고도 여전히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게 힘이 넘치는 것 같은 군터를 보며 현실을 깨달았다.

저자는 괴물이다. 물론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더 달려들면 저 괴물도 결국 지치고 상처 입을 것이다. 그러면 목을 벨 기회도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될 수십, 수백에 자신이 포함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게다가 그들에게는 적당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물러나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칼을 휘둘러야 할 독전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두려움이 욕심을 누름과 동시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서로를 밀치며 앞장섰던 그들은 이제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적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전장의 격언마저 망각한 채 달아나듯 뛰는 자들도 있었다. 아니, 달아나듯이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 멍청한 자식들!"

지휘관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병사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고, 저마다 제 살길을 찾기 바빴다.

"젠장! 이래서 용병 놈들은!"

한 젊은 장교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노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는 주변의 다른 함성과 비명에 금방 묻혀버렸다.

***

적은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 일부는 퇴각하더라도 대열을 유지하면서 물러나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것조차도 잊어버린 듯 완전히 등을 돌린 채 달아나고 있다.

"쫓아라!"

군터는 추격을 명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한심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적의 모습에 사라졌다.

만에 하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지금 도망치고 있는 적 중 상당수는 쓸어버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아악!"

달리지 못했던 말이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말 못하는 짐승의 흥분이 느껴졌다. 군터는 녀석을 제지하지 않았다.

'일어나라.'

군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은 어두웠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나, 기감이 발달한 이라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안개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신경 써서 훈련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자연스럽게 이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 갔다. 문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군터는 자신의 이 능력이 술법도, 무엇도 아님을 알았다. 이것은 능력이라고 하기도 뭐한, 그저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것이 가능한가. 한동안은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면 어쩔 것인가. 이 힘을 버리기라도 할까? 한때 집착했던 인간다움에 매달리면서? 웃기는 소리.

그- 어어어.

망자들이 일어선다. 그들은 군터의 뜻대로, 앞만 보고 달렸다. 느리지만 지치지 않는 그들은 조금 전까지의 동료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뭐, 뭐야!"

"사령술이다!"

경험 많은 이들은 단번에 움직이는 시체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알아봤다고 해서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상, 반쯤 흐느적거리는 시체들은 별로 유용한 전력이라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화살받이 정도일까.

그러나 전투력 자체만 놓고 보면 별 볼 일 없을지라도, 이 망자들은 꽤나 유용했다. 기괴하게 움직이는 시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살아있는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래. 지금처럼.

"아아악!"

"비켜! 비키라고!"

안 그래도 무질서하던 적이 이제는 볼썽사나울 정도로 무너졌다. 이들이 정녕 전장에 나온 군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군터는 그들을 비웃는 대신 부지런히 창칼을 휘둘렀다. 거리가 났다 싶으면 말을 몰아 한바탕 휘젓기도 했다.

일방적인 도살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갑작스레, 땅밑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하고 군터가 멈춰 서기 전까지.

쿵!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하지만 군터는 확실하게 들었다.

"멈춰라!"

위협하듯 뱉은 명령에 병사들이 발을 멈췄다. 잔뜩 흥분해 있는 상태에서도 군터의 목소리는 그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한순간, 어울리지 않는 적막이 전장을 감쌌다. 그리고,쩌적 - !

땅이 갈라졌다.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군터는 뒷걸음질 치는 말 위에서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비슷한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땅이 갈라지고 있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

"장군! 적입니다! 적이………!"

보머 바쉬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성벽까지 한달음에 달려나간 그는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점의 향연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이게 어찌 된 ………."

그는 점들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길쭉한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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