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5화
뿌-우우!
긴 호각 소리.
그것이 신호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장군! 적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느릿느릿 다가오던 검은 물결이 갑작스레 밀어닥치는데, 장님이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래. 시작이로군."
명령이나 신호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이미 한참 전에 세부 지침까지 다 내려놓은 상태. 이제 남은 것은,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 얼마나 맞아들어가는지 지켜보는 것뿐.
'저자인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우직하게 전진하는 적의 중군. 그 선두에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적의 모습이 점으로 보이는 와중에도 그자가 눈에 띈 이유는, 점은 점이되 홀로 큼지막하고 길쭉한 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말을 탄 것 같았다.
눈에 띈다. 마치 날 좀 봐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날아들지 모르는 전장에서 저런 행동은 칼날 앞에 목을 들이미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간혹 그런 위험을 오히려 자초하는 이들이 있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지닌 이들. 대다수는 오만의 대가를 치르지만, 아주 간혹 자신감에 걸맞은 능력까지 지닌 이들이 있다. 루벤 카드모스는 이제껏 그런 이들을 꽤나 봐왔다.
'오랜만이군.'
끝내 쓰러진 자도 있었고, 끝까지 살아남아 무명을 드높인 자도 있었다. 군터 크렘보르임이 거의 확실한 저자는, 오래전에 가라앉은 과거의 잔향을 일깨웠다.
***
군터는 눈이 벌게져서 달려드는 적을 창끝으로 찔렀다. 상대가 발악하기도 전에 그의 창은 목을 찌르고 빠져 나왔다. 평범한 자들은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쾌속의 찌르기. 벌써 다섯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해치웠다.
'성가시군.'
그래. 다섯을 죽였다. 하지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 명을 해치우면 다른 한 명이 곧장 자리를 메우기 때문이다.
말에 올랐지만 달릴 수 없다. 이점이라고는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고, 아래에서 위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 단점은 그 외 모든 것.
챙!
화살을 또 한 대 쳐냈다. 아까부터 집요하게 틈을 노린다. 군터는 숙련된 솜씨의 활잡이가 최소 셋 정도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쁘지는 않다.'
군터가 이끄는 중군은 꽉 막혀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건 적이 삼면에서 옥죄어오기 때문이었다. 이쪽이 주공이라는 것을, 이쪽에 대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노려지고 있다. 위험한, 아니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군터는 이런 것도 썩 괜찮다고 보았다. 적의 전력이 이쪽에 집중될수록 좌우에 퍼진 살라스와 아드리안이 활약하기가 쉬워질 테니까 말이다.
콰직!
방패를 쪼개고 그 뒤에 숨은 머리통마저 갈랐다. 창날이 긴 창의 효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창을 무슨 도끼처럼 쓰는 사람은 찾기 힘들겠지.
방패와 창이 단번에 두 쪽이 나버리는 광경이 인상적이었는지,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계속해서 달려 들던 적병들이 순간 발을 멈췄다. 그 사이, 군터는 슬쩍 곁눈질로 뒤쪽을 살폈다. 정확히는 시어문드 쪽의 기수가 높이 들고 있는 깃발을 살핀 것이다.
푸른 깃발이 하나. 붉은 깃발이 하나. 그리고 다시 푸른 깃발이 둘.
의미는, '이상 없음'이다. 바꿔 말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미끼 역할은 별로지만.'
이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 안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대장이 모습을 드러낸 채 직접 선두에 서 있으면 자연스레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장군!"
"앞으로 나오지 마라."
군터는 옆으로 붙으려는 수하들을 제지했다. 도우려는 것이겠지만, 그의 입장으로는 오히려 방해였다.
주변에 휩쓸릴 아군이 없어야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상대로 마음껏 힘을 쓸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아."
긴 호흡이 새어나간다. 일반적인 숨이 아니다. 죽음의 기운이 농밀하게 섞인 숨결이었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쉰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주변 열 걸음 이내의 적들은 모두 덜컥 몸이 굳었다. 이질적인 기운에 대한 제 항력을 향상시켜주는 법구 같은 것을 지니고 있거나, 그런 쪽으로 타고나지 않은 이상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죽음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굳을 수밖에 없다.
푸욱!
화살처럼 뻗어 나간 창이 전면의 한 명과, 그 뒤의 한 명을 동시에 꿰뚫었다. 군터는 그들이 꿈틀거릴 틈도 없이 창을 회수하고는 곧바로 길게 휘둘렀다. 창의 궤적이 반원을 그리고, 그 궤적에 걸린 이들은 모두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어설퍼.'
두 번 행동하고 나자 굳어있던 적병들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늦다. 상당히 늦다. 기대 이하다. 잡병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군터는 그들에게서 부족함을 느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그럴지도.'
명장 밑에 약졸은 없다. 무인에 비유를 하자면, 무인이 자신의 무구를 공들여 손질하고 관리하듯 장수는 휘하의 군졸들을 관리한다. 훈련시키고, 무장을 점검하고, 온갖 노력을 끊임없이 거듭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강군으로 만들어 나간다. 하물며 명장이라고 불리는 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이것들은 어떻게 봐도 강군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했다. 어찌 된 일인가?
챙!
또 한 번. 서늘한 감각에 곧장 반응했다. 이번에는 두 대였다. 좌우에서 각기 한 발씩. 거의 동시에 날아들었다.
'제법이군.'
군터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냈다. 당장 말 안장에 걸어놓은 활을 들고 응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은 활이 아닌 창을 들어야 할 때다.
아쉬움을 가라앉히며, 군터는 오른쪽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검을 든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적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허허."
루벤 카드모스는 큰 점 하나를 둘러싼 작은 점들을, 다가가기 무섭게 무너지고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자세한 상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 큰 점 하나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짐작했던 대로 저 큰 점, 군터 크렘보르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자였다. 아무리 용병들이 상대라지만 저 정도라니. 게다가 욕심에 눈이 돌아간 용병들의 전투력은 우습게 볼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날뛸 수 있다니. 훌륭하지 않은가?
"장군. 놈들이 밀고 들어옵니다."
적의 중군은 발이 묶였다. 그러니 밀고 들어온다는 건 중앙의 적이 아닌 양 측면의 적을 말함이다.
"보고 있다."
머릿수로 틀어막다시피 한 중앙에 비해, 양 측면의 적은 비교적 빠르게 아군 진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예사 돌파력이 아니다.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정말로 크게 손해를 볼 뻔했다.
"계속해서 물러나고 있습니다. 슬슬 신호를 보낼까요?"
"아니. 아직이야. 조금 더 끌어들여라."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다. 너무 조급하게 굴면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제대로 날아가더라도 힘을 내지 못한다. 반면, 너무 망설이면 화살이 시위를 떠날 즈음엔 적의 칼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조급함도, 망설임도 없이 적기를 기다린다. 화살 한 대가 가장 큰 효율을 낼 수 있을 때까지.
***
"약해 빠졌구나! 자리에서 뭉개는 것 말고는 재주가 없는 놈들이었어!"
오랜만의 전장. 오랜만의 피 냄새. 아드리안은 자신이 들떠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들뜨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너무 쉽습니다!"
"그래! 너무 쉽지!"
부관의 말에 답하며, 우측으로 스치던 놈의 목을 그었다. 그의 칼은 이미 온통 붉게 변해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군께서 놈들의 이목을 확 끄셨지! 우리는 빈집을 털고 있는 것이고! 이상할 게 무엇이냐!"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쉽습니다!"
"겁먹은 거냐!"
"실수하는 것보다는 겁쟁이가 되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드리안은 수하의 말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할 말이 있다면 눈치 보지 말고 얼마든 하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너무 쉽다고?'
그렇기는 하다. 전투가 시작된 후로 단 한 번도 막 힌 적 없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군터가 중앙에서 적의 주의를 끈 덕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힘을 냈지만, 확실히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까지도 이렇게 쉽게 길을 내준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함정인가?'
뜨겁던 머리에 찬 바람이 불어왔다.
함정. 함정이라. 정말 함정이라고 가정한다면, 적이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적의 전력 상당수는 틀림없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 적의 대장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우리를 끌어들여서 뭘 할 수 있지?'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 함정이라고 한다면 뭐가 달라지는가? 여기까지 와서 발을 멈추거나, 돌아설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설령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함정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흥분은 이제 완전히 가라앉았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도 냉철하게 식었다.
"속도를 조금 늦춘다."
"옛!"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부관의 목소리에 힘이 감돌았다.
***
순조롭기는 살라스 쪽도 아드리안 쪽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쉬웠다. 살라스의 눈은 이제 적 후방에서 펄럭이는 대장기를 또렷하게 담고 있었다.
'거의 다 왔군.'
옛적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공명심일까? 기대와 흥분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적이 물러납니다!"
"추격하……."
조금 힘 싸움을 벌이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적들. 살라스는 그에 대한 추격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전방의 구릉 한 부분이 소리도 없이 주저앉았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악!"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세가 올라 바짝 적을 따라붙던 병사 수십이 무너지는 지반에 휘말려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