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4화
직접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군터는 자신이 조금 바뀌었는지 자문했다. 그리고 곧 일부 긍정했다. 이전 같았으면 살라스에게 뒤를 맡기고 직접 적과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할만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본대가 채 뒤따르기도 전에 과감하게 들이받기도 했겠지.
"장군! 곧 살라스님의 부대와 합류합니다!"
몸을 사리게 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저 의욕이 사라졌을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식어버린 가슴이 무엇에도 좀처럼 반응하지 않게 되어버린 후부터.
출세욕, 공명심, 호기 등등. 온갖 감정의 홍수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던 젊은 시절의 그와 지금의 그는 전혀 달랐다.
그렇기에 군터는 지금 느껴지는 짜증과 약간의 분노가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간만의 자극 아닌가. 심지어 그는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군대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적장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장군."
살라스는 모든 준비를 마친 채 군터를 맞이했다.
"최대한 조심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쯤이면 저쪽 역시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
군터는 진군을 멈추는 대신 속도를 늦춰 병사들이 숨을 돌릴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러는 한편 정찰병을 계속 풀어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적군이 구릉 위에 진을 쳤습니다! 이틀 거리입니다!"
싸우기 전에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하자가 없는 한 고지는 모든 면에서 유리한 지형이다. 시야가 탁 트여 있어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도 용이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 적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싸움을 벌일 수도 있으니.
"피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싸우지 않을 것이라면 굳이 힘들게 이동해서 지형을 선점할 이유가 없다. 유리한 지형을 선점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나는 여기서 싸울 테니, 자신 있으면 덤벼보라는.
굳이 상대가 원하는 곳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다. 아니, 상대가 원하는 곳을 피하고 원치 않는 곳에서 싸우는 것도 역시 병법의 기본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반가운 소식이군."
그 정도의 불리함 정도는 힘으로 타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 군터나 휘하 장수들이나 얼굴에 불안감이나 의심 따위는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
"오는군."
나이가 들면 신체의 이런저런 능력이 저하되기 마련이다. 눈 역시 마찬가지. 예전이었다면 적이 들고 있는 깃발의 문장까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으련만, 지금은 깃발의 문장은 커녕 깃발의 위치조차 제대로 찾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거라곤 길게 늘어서서 접근해오고 있는 검은 점의 물결. 그뿐이었다.
"굳이 먼저 자리를 잡은 아군에게 싸움을 걸다니. 어지간히도 자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자의 전적을 자네도 알지 않나. 제대로 맞붙어서진 적이 없더군. 이 정도는 악조건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거겠지. 그게 아니면, 잔뜩 화가 났거나."
어느 쪽일까. 엄밀히 따지자면 둘 다겠지만, 그래도 하나를 고르라면 아마도 전자이지 않을까. 루벤 카드모스는 특출난 재주를 지닌 자들이 자신의 재주에 대해 믿음을 가질 때,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과감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군의 배치는 어떤가?"
"완벽합니다."
루벤 카드모스가 자신감이 넘치는 부관을 보며 혀를 찼다.
"완벽이라는 말은 쓰지 말게. 완벽이라는 것은, 적어도 전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말이야."
"아…송구합니다.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습니다."
부관의 목소리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루벤 카드모스는 그제야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그의 시선이 다시 전방으로 향했다.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듯했던 적이 속도를 줄이더니 곧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6군의 지휘관들에게 다시 전하게. 본대의 지시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말고, 신호가 들리면 즉각 지휘 깃발을 살피라고."
"옛!"
완벽은 없으나 최선은 존재한다. 그리고 최선이란, 질릴 정도의 집요함에서 비롯된다. 루벤 카드모스는 그렇게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해왔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
둥! 둥! 둥! 둥!
전고의 울린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어온다. 흩날리는 허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루벤 카드모스는 걸음을 옮겼다. 왼쪽 가슴 밑. 수십 년 전 갈빗대 두개를 갈랐던 상처가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음."
당연히 아문지 오래된 상처다. 솜씨 좋은 의사가 몇이나 달라붙어 몇 개월 동안 봐준 덕에 후유증도 거의 없이 깔끔하게 나았다. 그러니 지금 이 통증은 실제가 아니다.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몸이 움츠러든다.
이것은 경고다. 다시 한번,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경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는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리라.
'좋군, 좋아.'
까딱 잘못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련만, 두려움은 느끼지 않는다. 늙어빠진 몸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대장기를 높이 들어라."
"옛!"
카드모스의 문장기가 높이 펄럭인다. 듣자 하니 군터 크렘보르 그자도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 같던데, 그렇다면 멀리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여기 있다네. 젊은이.'
가벼운 도발이다. 보고서 눈살이나 한번 찌푸리면 크게 먹힌 셈이겠지.
***
"……."
군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 변화는 극히 미미하여, 옆에 있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기 있군."
"그렇습니까?"
보이지 않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군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라는 생각이 사고의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번에 대장을 노리고 싶습니다만…아무래도 쉽지 않겠습니다."
엄살이 아니다. 직접 와서 본 지형과, 그곳에 미리 자리 잡은 적의 포진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견고해 보였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4개 부대다. 저마다 제법 경사가 진 봉우리 위에 포진했는데, 그 뒤로 두 개의 부대가 더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 끄트머리에 또 하나의 부대가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대장기가 있었다.
"말려 들어가면 낭패를 보겠습니다."
공격에 나선다면 우선 전면에 보이는 네 개 부대를 쳐야 한다. 하지만 곳곳이 움푹 꺼지고 불쑥 올라와 있는 터라 자칫 잘못 하면 적의 협공을 받거나 깊숙이빨려 들어가기 쉬워 보였다. 게다가 배후에 자리한, 적의 중군 역시 신경 써야 한다. 지금이야 뒤로 물러나 있지만, 여차하면 전위에 합세하지 않겠는가.
"되도록 먼저 치고 싶지 않게 해놨군요. 적장의 전술관 자체가 이런 쪽인 모양입니다."
시어문드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가벼울지언정 적진을 살피는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각개전투가 될 확률이 높겠습니다."
"자신 없나?"
"아시다시피, 제 칼솜씨가 어디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드리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긴 하지. 본인도 알고 있었구만?"
시어문드가 실실 웃는 그를 보며 혀를 차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래 끌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지키면서 싸우기는 좋은 지형이지만, 군대가 오래 머물기에는 좋지 않은 지형이다. 보급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려 군을 일곱으로 나눠놓지 않았나.
"물론."
"허면 소관은 뒤에서 장군을 지원하겠습니다."
군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섰을 때부터 단기 결전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어문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런 싸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재주는 용맹이 아니었으니.
"준비하라."
군터는 일곱으로 나뉜 적에 맞서 군을 넷으로 나누었다. 전위 셋. 후군 하나. 시어문드로 하여금 후방에서 전위를 지원하게 했고, 살라스와 아드리안에게 좌우익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중앙에 자리 잡았다.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군터가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의 표정이 보였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들. 군터는 그들을 쓸어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느 때와는 다르다. 대개, 그는 직접 기병을 이끌며 적진을 돌파하기를 즐겼다. 기병 돌격으로 적의 진형을 허물고, 뒤따르는 보병 전력이 마무리를 짓는 식이었다. 가장 자신 있으면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 징그러울 정도로 울퉁불퉁한 곳에서 그런 전술을 사용할 수는 없다. 경기병조차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곳에서 속도를 내기는 힘들고, 속도를 내지 못하는 기병은 먹음직스러운 표적일 뿐이다.
"신호를 보내라."
그러니 그가 지금 말에 올라 앞에 선 것은, 표적을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진군!"
한 걸음 한 걸음. 위협하듯 대오를 맞추어 진군하는 군대의 가장 앞에서, 군터는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장군!"
다급한 목소리. 하지만 군터는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턱!
저 멀리서 운 좋게 날아온 화살 한 대. 군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을 한 손으로 낚아채고는 그대로 분질렀다.
"멈추지 마라."
크지도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장졸들에게는 그 한마디가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발을 멈추지 마라!"
한껏 고무된 장교들이 목청껏 외쳤다. 병사들도 그에 호응하듯,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느릿하게, 하지만 멈추지 않으며 앞으로, 또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쿵! 쿵!
누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걸음에 맞춰 방패와 창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모두가 방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히 힘 빼지 말라며 호통을 치던 장교들도 어느 순간 묘한 복받침에 입을 다물었다.
쿵! 쿵! 쿵!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는가. 전의로 가득 차 가라앉았던 전장의 공기가 이제는 반대로 폭발할 듯 달아올랐다. 규칙적으로 퍼져나가는 둔중한 울림은 기묘한 압박감을 형성해 적을 짓눌렀다.
슈슈슝!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화살이 날아들었다. 육중한 울림은 그제야 멎었으나, 그뿐이었다.
"……."
자그마한 봉우리. 군터는 그 정상에 올랐다.
넷으로 나뉘어 길게 늘어선 적진이 한눈에 보였다.
그 뒤에 자리한 나머지 셋 역시.
멀리서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잘짜인 진형이다. 한쪽이 공격받으면 다른 쪽에서 곧바로 지원할 수 있고, 공격하는 쪽에서 흥분하여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양측에서 협공할 수 있다. 자리만 지키면서 상대의 실수만 기다리면 되는, 아주 편리한 진형..
포진만 봐도 적장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루벤카드모스라고 했던가. 그자는 적어도 지키는 싸움만큼은 달인이라고 해도 좋을 경지에 올랐음이 틀림없다.
뿌-우우우!
아주 잠깐. 상념에 잠겨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장군."
군터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적의 진형은 견고하다. 잠시 틈이 생긴다고 해도 금방 수습할 터."
"믿어주십시오. 죽을 힘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군터가 창을 길게 늘여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