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화
"이탈한 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불만이 쌓인 용병들이 반기를 들었나 하는 것이었다. 루벤 카드모스가 군에 대한 장악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불만이 계속 쌓이는 자들의 마음을 말 몇 마디로 달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의 노력이 결국 한계를 맞이했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다.
물론, 군이 나뉘었다고 해서 무작정 이탈이라고 볼수만은 없다. 루벤 카드모스의 명령일 수도 있다. 이를 테면 불만이 쌓인 용병들을 이용해 다른 지역을 공략하게 한다던가.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곧 보고가 들어올 것으로……."
이어지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군터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함정인가, 아닌가.
용병들이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소식은 전부터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니 불만을 참다못한 용병들이 반기를 들고, 루벤 카드모스가 그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대신 나름대로 타협을 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하지만, 너무 쉽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군터는 살라스와 시어문드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적과 가장 가까이 접하고 있는 그들이 보고 판단한 것이 자신의 막연한 추측보다 더 정확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며칠 사이 적진이 잠잠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의견을 물으신다면,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살라스와 시어문드의 답신을 받은 군터는 친위대 이백만을 거느리고 곧장 골고스로 향했다.
"장군. 어인 일이십니까."
보머 바쉬가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군터는 그의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바로 간파했다. 눈꼬리가 미세하게 한두 차례 떨리는 것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꽤 당황한 듯했다.
"소식은 들었겠지. 적이 나뉘었소. 용병들이 루벤카드모스의 군영을 떠났지."
"예. 들었습니다. 그간의 인내가 마침내 결실을 맺는 모양입니다. 하하."
미묘한 어조였다. 그간의 인내를 운운하며 상황이 좋아졌음을 강조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행동에 나설 것을 권하는, 어떤 이는 이런 말을 들으면 부담을 느낄지 몰라도, 군터는 아니었다. 그는 보머 바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모를 일이지. 아무튼, 내가 여기 온 것은 미리 말해 주기 위함이오."
"무엇을 말입니까?"
"이곳의 상황을 두고 시끄럽게 구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소. 그대가 중간에 끼어서 고생 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보머 바쉬의 억지웃음에 실금이 갔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무식한 놈 같으니!'
짐작한 것일까? 아니, 사실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약간의 생각할 머리와 눈치만 있다면, 누구라도 수만 대군을 거느린 지휘관에게 감시의 눈길이 붙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견제를 하리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하지만 짐작하거나 알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추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세상에 알아도 모른 척하는, 모르는 척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것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서로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며, 갚아줄 것이 있다면 드러나지 않게 뒤로 전하는 것이 이 바닥의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무식한 자에게는 그런 자연스러운 문화조차 통하지 않는 듯했다. 보머 바쉬는 최대한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힘썼다.
"부끄럽습니다. 알고 계시는 듯하니 말씀드리지만, 사실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상황입니다. 전장에 나와 있는 군인이라고 해도 조정의 압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들은 내가 당장 나가서 적과 싸우기를 바라겠지."
"글쎄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장군도 알다시피, 그쪽에는 종이와 펜, 잉크로만 세상을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서신과 전령의 목소리로만 전장의 상황을 다 파악했다 믿는 자들이 또 대부분이고요."
이 대목에서 보머 마쉬는 고소를 머금었다. 진심이었다. 비록 처지가 우습게 되어 박쥐 같은 행세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군인, 똑똑한 척하는 책상물림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신물이 날 대로 난 인사다.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저쪽에서는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기다려서 나쁠 것은 없지. 정말로 나뉜 것이라면 그때 가서 일전을 벌여도 될 테고, 아니라면 함정을 피할 수 있을 테니."
"필요한 시간은 얼마 정도로 보고 계십니까."
"길면 길수록 좋지."
"하긴, 그렇겠군요. 어리석은 질문을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누군가 제게 의견을 묻는다면 그렇게 전하지요."
"잘해주리라 믿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무슨 부담스러운 말인가. 보머 바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군터가 돌아서서 나가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장군,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제가 장군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들은 이야기가 전부지요. 그리고 대개, 세상에 도는 이야기 중 반절은 거짓이고 나머지 반절 중 삼분지 이 정도는 과장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군은 제가 들은 것과 많이 다르시더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군."
"제가 들은 장군은 좀 더 호전적이었습니다. 싸움을 피하지 않고, 일단 싸움이 벌어졌다 하면 누구보다 앞에서 싸우는 분이었지요. 그런데………."
"직접 본 나는 그렇지 않다?"
"그냥 조금 궁금해서 말입니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리지요."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다면 겁쟁이지만, 싸우지 말아야 할 때 싸운다면 죽일 놈이지."
"예?"
"말 한마디에 수만이 살고 죽기 때문이지.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
"난 겁쟁이가 아니지만, 죽일 놈도 아니오. 답이 되었나?"
잠시 표정을 지웠던 보머 바쉬가 곧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
군터는 혹시 모를 함정을 경계하며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고, 그에 따라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있었으니, 골고스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디포렘 전선은 남쪽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대병력의 소식에 거의 발작하기 직전이었다.
그렇지 않은 곳을 찾기가 힘들겠지만, 그들 역시 동진하려는 적에 맞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남쪽에서, 그것도 2만을 상회하는 대병력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
"군터 크렘보르. 그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2만이라니! 아무리 용병들이 대부분이라지만, 그만한 병력이 합세하면 버티기가 힘들어집니다!"
"2만이 아니야. 최소 2만이오. 이래서는……."
군터 크렘보르와 보머 바쉬에 대한 성토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목소리만 높인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골고스 쪽의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루벤 카드모스가 골고스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상황이 답답하게 흘러가자, 보수에 눈이 먼 용병들이 불만을 표했다고 하오. 아마 놈들의 북상도 그와 관련이 있겠지."
"으음."
골고스 쪽의 전선을 맡은 지휘관 두 명을 성토하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라면 무작정 그들을 탓하기도 뭐했다. 그들은 할 일을 충실히 해낸 것이고, 지금의 상황은 예기치 못한 사고에 가까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사고라고 해도 어쨌거나 이쪽은 턱밑에 칼이 들어온 셈이니.
"원군을 요청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겠지. 어느 쪽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요."
"전선을 뒤로 물리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적을 막아설 수 있었던 것은 지형의 이점을 살렸기 때문이오. 그런데 여기서 전선을 뒤로 물리면 어찌 되겠소. 우리는 속절없이 다곤까지 물러서야 할 거요."
말이 물러서는 것이지, 성안에 박혀서 숨만 간신히 쉬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그 정도는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간단하게 생각합시다. 우리가 힘들어진 만큼 골고 스 쪽의 상황은 더 나아졌지. 우리가 밀린다면, 골고스 쪽은?"
"음."
"이해했습니다."
***
수렁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수렁이라는 것을 알고 발을 뻗지 않았지만, 어느새 발 한쪽이 제법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수렁이 스스로 제 몸집을 키운 것 같기도 하고, 등 뒤에서 누군가 떠민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짜증나는군.'
끈적한 수렁에 빠지고서도 기분이 좋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어쨌든 상당히 불쾌했다. 남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노기가 치밀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살라스와 시어문드는 최대한 시간을 끌 것을 제안했다. 이미 함정에 빠진 셈이 됐지만, 그래도 시간을 끌 수 있을 만큼 끌어서 적이 먼저 움직이도록 유도해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머 바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전령을 보내 우는소리를 해댔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는소리가 아니라 직접 찾아와 눈앞에서 울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있나?'
이것은 도발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양팔을 벌리기까지 하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냐고.
굳이 남의 싸움에서 피를 볼 이유가 없어서. 여러 불확실한 위험을 무시한 채 부하들을 밀어 넣고 싶지 않아서. 그 외에 자잘하나 핑계가 되기에는 충분한 갖은 이유들로 지금까지는 참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도발을 참을 마음도 없었으며, 피해야 하는 싸움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구는 것인지.
'보면 알겠지.'
무장을 마친 군터가 창을 쥐고 말에 올랐다.